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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을 경계하는 공회원들 4:13~17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공회원들의 경고를 거부하는 사도들 4:18~22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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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종교 지도자들은 병 나은 사람으로 인해 사도들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표적에 대한 소문이 더 퍼지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합니다. 관리들은 백성을 의식해 사도들을 위협만 하고 석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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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을 경계하는 공회원들 4:13~17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학문 없는 범인’(13절)은 전문적으로 지식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최고 지혜자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전했기에 사도들은 짜임새가 있고 논리적인 말을 했으며, 최고위층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적이 일어난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공회원들은 이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이름이 가져올 파장을 두려워해 그 이름을 금하고자 합니다. 이는 사탄의 속성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담대히 말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원들이 이상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복음을 언변으로 전하나요,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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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들의 경고를 거부하는 사도들 4:18~22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경고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라고 하며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겠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19절)이 동시에 같은 대답을 한 것은 이것이 열두 사도의 공통된 신앙 고백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부활 신앙이 있기에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담대합니다. 이적을 본 백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도들을 지지하자, 관리들은 백성을 두려워해 사도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위협만 하고 놓아줍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미문에서 예수님 이름의 능력으로 40여 세의 병자를 일으킨 이적은, 복음 전할 기회로 작용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위협에 어떻게 반박했나요?
나는 복음 전파의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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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유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시절,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폐암에 걸린 이후로 교회에 출석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믿으며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면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이분이 천국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보여 주시는 생명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책에는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는 성도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 일은 가족과 친척들을 불러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족과 친척들을 전도했습니다. 고통으로 힘겹게 버티는 순간에도 구원받은 사실을 생각하며 기뻐했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최대 위기는 핍박이나 환난이나 고난이 아닙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고,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두려움을 이겨 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으로 기뻐하라 / 김은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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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4장 20절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도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말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최고 법정인 공회의 말에 불복종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는 성도가 할 일은 그분에게서 보고 들은 것에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죽음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 마크 뷰캐넌
오늘의 기도
주님, 안개같이 사라질 세상 것을 지키려다 구원의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배운 것이 많지 않아도, 보고 듣고 경험한 주님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소심함을 버리고 주님의 제자답게 행하도록 제게 용기와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오늘의 찬송(새 505 온 세상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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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빌어서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세상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서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고도 말씀하신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신 예수님입니다.
< 나 >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보여 주시고, 경험하게 해 주신 것들을 이들의 말로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함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해야 함
지혜롭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실제적인 방법들을 모색해 보고, 담대하게 주님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노력해야 함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들을 행하도록 하자/때가 되었을 때 담대하게 주님께서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전하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열심히 전하고,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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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권위로 유혹하기도 하고 경고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님의 증거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증거를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의 폭풍이 밀려올 때에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내가 지은 피난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며 우리의 힘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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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최고 종교지도자들은 비난할 말도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 부인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더욱 당당한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풀려난 사도들과 그 동료들은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이 충만하여 모두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보고 비난하거나 부인 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13~17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13절). 율법에 관하여 무지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줄도 알고..’ 예수님 역시 정규 랍비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알기에 그들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14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무식한 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지만 베드로는 그들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위풍당당하게 복음의 핵심을 전달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십니다. 위풍당당하게 그리스도인임을 들어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의논을 해 보았지만 이미 이들이 행한 표적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6절)고들 말할 뿐입니다.
당당하게 행동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더 이상 믿는 나를 향해 비난하거나 그리고 전한 복음의 메시지 앞에서 부인할 수 없도록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무식하고, 지혜가 없고,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를 들어 지혜롭고 강하고, 힘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당당해 집시다..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보고 들은 것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18~22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 경고합니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이들의 경고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이 믿고 있는 바를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인간의 그 어떤 막강한 힘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위협과 경고로 막아 보려고 했던 그들의 시도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믿음 앞에서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핍박과 위협과 조롱하는 소리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궁극적 사명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는 일시적인 위로를 안겨다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참 생명과 영원한 소망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이들의 말은 진리의 복음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꾸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담대하게 삶의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꼭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작은 것이나마 행동으로 실천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곧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 기대와 소망을 품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경고하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목숨까지도 내 놓으면서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던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사람들의 말에 더 많이 귀 기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더 많이 귀 기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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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 충만해졌고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 충만이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오히려 담대히 말씀 전하기를 기도했을 때 이들은 성령 충만해 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제목은 바뀌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항상 덤으로 주시는,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고난 앞에서 오히려 더 담대하고 기탄없이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말씀 충만이며 세상 앞에 굴복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박해의 시대가 아니라 편안함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도 쉽게 타협하고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동료들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쉽게 무너지고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성령 충만 말씀 충만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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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담대한 증언과 명확한 증거 앞에 당황한 종교지도자들은 갖은 위협과 회유를 해보지만, 사도들의 복음 전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종교당국자들의 심문
13절~ 17절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사도들의 석방
18절~ 22절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3,14절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거침없이 예수의 이름을 증언합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지만, 종교지도자들조차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구약을 인용하며 논리정연하게 증언했습니다. 예수와 함께한 세월의 열매이며, 기도에 착념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구속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다시 깊이 상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주님과 교제한 날들도 나를 담대한 증인이 되게 하고 있습니까?
14~18절 당국자들은 걷지 못하던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증거가 명백한데도, 입막음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진실의 확인도, 믿음도 아닙니다. 대중의 시선이고, 여론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보다 사람들의 구미를 맞추려는, 허울뿐인 종교의 전형적인 가식입니다. 복음의 능력 앞에서 실체가 드러나고 기득권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종교권력자들의 처절한 자기기만과 진실 은폐 노력이 애처롭지 않습니까?
19,20절 사도들은 권력자들의 위협에도 그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도리어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기까지 합니다. 세상 권세가 두려워 ‘진리’를 버리고 ‘실리’를 택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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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자들은 제자들이 학벌 없는것을 알고 무시했는데, 교양 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놀랐고, 병 나은 사람이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었고 병 나은 것을 부정할 수도 없어서 비난할 것이 없자, 위협하여 석방하기로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협박을 무시했고, 단호히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우리가 누구를 무서워하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
무서워할 분은 심판의 주 하나님뿐입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0~31)
무서워할 이는 세상 집권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집권자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이라도 어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1:17)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세상 집권자보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순종했을 때에 풀부불에서도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그때 완악한 느부갓네살 왕조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3:28)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에게 좋게 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1:10)
사람이 아닌 우리 주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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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능력의 하나님
공회에 불려온 사도들이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더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할 수 없는 능력의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학식이 얕은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해 주시니 지혜로운 자들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도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도 사도들같이 복음을 전하는 용기를 가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사는 자인가?
2.하나님 앞에 사는 믿음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권력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아주 담대하게 말합니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고백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닮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소리를 듣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음성은 뒤로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요?
항상 하나님앞에서 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사는 자인가?
(예화) 믿음 신뢰 두려움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하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한 꼬마를 만났다.『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이 사람이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왜 무섭지 않지?』다시 이 사람이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하나님을 인생의 주인 으로 삼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이사야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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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5천 명이 넘는 이들이 예수님을 회개하고 믿으며 예수님의 제자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이제 과거 주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줬듯이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을 경고를 주고 제자들의 입을 닫게 위협하는데 그치고 말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심판자가 되시는 분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더욱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들을 둘러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나음을 받은 40세가 넘은 앉은뱅이였던 이가 그들 곁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함께 세워져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욱여쌈을 당하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에 부딪혀도 능히 구원을 베푸시고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성령 충만한 힘 있는 증인으로 세워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마태복음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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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13절)
제사장 무리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단 총회장급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권력과 지식의 마루에 있었던 저들은 하찮은 어부 출신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의 말이 조리있고 힘이 있었을 뿐 아니라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22)"라는 시편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구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고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총명한 자를 쓰시기도 하시지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쓰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세상에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어느 주일 아침, 큰 교회에 사람들이 넘쳐나도록 모여들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트렌치코트 차림의 두 사내가 교회에 들어섰습니다. 한 사람은 뒤쪽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가운데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코트에서 기관총을 꺼내서는 “예수를 위해 총탄을 맞을 각오가 된 사람만 자리에 남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연히 신도들은 자리를 비웠고, 합창단과 부목사도 뒤따라 나갔습니다. 남은 사람은 순식간에 20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목사는 설교단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내들은 총을 치우고는 목사를 보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위선자들은 죄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예배를 보시지요.”
지식은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가지고 우쭐대는 자들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없습니다. 오늘날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말씀을 재단하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우기 기독교 방송 매체는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교만해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지식은 우리를 믿음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한 발자국 내 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16절)
제사장의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육체가 정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오감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위협을 받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고민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역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은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정신의 출처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을 때 온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서 벗어난 정신을 가진 자들을 우리는 '정신 나간 놈, 정신 없는 놈', 다른 말로 '얼 빠진 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얼빠진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창조적 능력과 도덕적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일반은총 아래에서 온전한 지혜의 산물이 나올 수 없고, 더 나아가 구원은 요원한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늘 하나님을 주목함으로써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이 거룩한 자가 있습니다(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얼굴 값을 하는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정신, 즉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계속 선포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늘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서 하나님의뜻을 이루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C. S. 루이스의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노련한 삼촌 마귀 스크루 테이프가 신출내기 조카 마귀 웜우드에게 인간을 속이는 서른 한 가지 방법을 전하는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웜우드. 인간을 진정으로 속이려거든 아무런 걱정 없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단다. 사람들은 잘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단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잃는 게 있지. 건강, 자신의 내면, 그리고 가족이란다.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린 후, 그 건강을 찾기 위해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써버리고 말지. 건강을 되찾을 때쯤, 그의 인생도 끝나 버린단다. 기뻐하렴. 대부분은 그것도 찾지 못하고 삶을 끝낸단다.
웜우드. 인간을 진정으로 속이고 괴롭힐 땐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단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면 자기의 삶을 돌아보거든. 그리고는 방향을 수정해버리지.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잘 살게 내버려둬.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한방에 보내버리렴."
이처럼 마귀는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교제하는 것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할 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갖은 방법으로 훼방하는 것입니다. 때론 베드로와 요한에게 했던 것처럼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가급적 이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무너지고 있듯이 형식적인 예배를 통해서 세속적인 부흥을 보여주면 금방 주저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20절)
남의 것을 가지고 얘기하면 마귀의 훼방이 있을 때 주저 앉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들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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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절 사도들의 두 번째 변증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절에서 두 가지 반응이 확연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 없는 범인인데 말을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응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담대함의 파레시안은 사도행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로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자유민의 특징'(존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선처를 구하지 않고, 지도자들의 억압에 굴하지도 않았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은 말 그대로 학식 없는 사람을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또는 정식적인 학업 과정을 밟지 않은 일반 사람들입니다. 문맹율이 현저히 높았던 당시에서 범인은 일반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읽고 쓰고 공부했습니다. 심지 그는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였습니다. 이건 단지 예수의 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는 공식 공부가 아닌 예수를 따름으로 그에게 공부를 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더 할 말을 잃게 만든 것은 베드로가 치유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증인이 앞에 있기에 지도자들은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러한 명백함 앞에서도 그들은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악입니다.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공회원들은 의논합니다.
표적이 나타났음이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도록 사도들은 위협하기로 합니다. '유명한(그노스토스 γνωστός)은 '잘 알려지기 적합한' '알려질 수 있는'의 의미로 특이하고 분명한 사건입니다. 너무나 명백함에도 그것을 강제적으로 억제하려는 지도자들은 완악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부당하고 황당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 소문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사도들을 위협하여 막자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입 단속하고, 대중매체를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는 명백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협박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너희'와 '하나님'을 대척점에 두고 선택할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관리들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아준 이유는 '백성들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은 백성들의 눈입니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할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악도 죄도 짓는 악행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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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협박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답한 말입니다. 그곳은 유대인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법정으로, 판결에 불복종하면 곧장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당히 답변하고 그 악마의 소굴에서 나와야 합니다.
일단 살아야 복음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것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지체 없이 거부해버리니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결코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들에게는 일말의 타협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또한 그 중간지대도 있습니다. 일명 회색지대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의 술과 담배문제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진리와 비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들로, 일종의 개인의 자유 영역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고기의 문제입니다. 곧 우상에게 일단 받쳐진 후 시장에 나온 것들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장에 상품으로 나온 고기를 먹을 수는 있으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술에 대해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술 자체를 금한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술과 담배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전통이고 문화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분위기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술 문제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특히 그것이 신앙의 문제를 떠나 생업의 문제로 이어질 때 어떻게 판단해야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술을 파는 경우입니다. 농촌이나 어촌의 경우 술은 음료수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대형 갈비 집에서는 술을 팔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식당업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충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신앙으로 믿음으로 극복하라는 말은 당사자에 대하여 너무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하며, 그래서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하더라도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이웃에 덕을 세우는 큰 원리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양심에 따라 결정하라는 것으로, 만약 상처 받을 이웃에 대하여 고려할 사항이 없다면 얼마든지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성경에서 금하고 있거나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캘빈도 이것을 양심과 관련된 것으로 봅니다. 즉, 양심에 따라 허용된 것에 관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비본질적인 것이라 그렇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맡겨야 할 문제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단지, 신앙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신앙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그것을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적이라는 것으로, 비본질적인 것은 그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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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일어난 기적을 보고 놀라서, 솔로몬 행각에 모인 많은 무리에게 이 일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12). 이것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초점을 자신들에게 맞추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기적을 보고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부하여 죽인 바로 그분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주(생명의 수여자)를 죽였다는 모순어법을 사용합니다(15). 생명의 수여자가 어찌 죽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이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주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였다면, 이제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베드로는 촉구합니다(19). 그렇게 하면 그들은 세 가지 복을 얻을 텐데,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회복되며(19),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 예정하신 주님을 ‘그들을(너희를) 위하여’ 다시 보내주실 것입니다(20~21). 죄 사함, 영적 갱신, 그리고 우주적 회복이라는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음으로 우리가 갈망해야 할 복이 바로 이러한 복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 모든 약속의 중심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구약성경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그리스도는 모세가 말했던 ‘나 같은 선지자’였고,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가 말했던 그 분이십니다. 이 설교의 청중은 소위 언약의 자손들입니다.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언급합니다(창 12:1~3).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아들을 먼저 보내신 이유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보는 초대 기독교의 모습은, 은이나 금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성령 안에서 의지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증거한 말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촉구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증언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때 가장 강력한 교회가 됩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 외에, 그리고 복음 외에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니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로 배불러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들을 찾기까지 합니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금이나 은이나 권세가 교회의 능력이 아니며, 교회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에 있음을 저희로 분명하게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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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전함을 싫어하는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에게 말한다. 병자에게 행한 일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다. 이 예수는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하게 말함을 듣고 이들이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비난할 말이 없음으로 공회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할까 서로 논의한 후,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으냐고 하면서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한다.
<해석 및 적용>
태어나면서 못 걷게 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을 일으켜 걷게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된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였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다. 구원이 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죄 사함이 있다(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2:1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이 이름에는 능력과 구원과 죄 사함이 있기에 이 이름을 부르며 이 이름을 사모하며 이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삶을 오늘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을 불러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하고 부르면 뭔가가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오늘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그분을 내 마음에 초청하며 하루를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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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을 통해 드러난 위대한 기적은 위대한 표적이 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적을 통해 사도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들에게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놀라는 바 성경에 대한 전문가가 자신들인 것으로 알았는데 '사도'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학과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함으로 어느새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문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학문적으로는 '에스라'의 사역으로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전에는 유대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을 유대교라 부르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말씀의 완성자이신 메시야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어 구원의 계보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산헤드린공회를 보면 유대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권세를 가졌으나 말씀의 권위는 이미 사도들보다 훨씬 더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지극히 평범한 것 같았으나 이스라엘(하나님 백성)의 권위는 이제 산헤드린공회의 권위를 넘어 더 큰 권위를 갖게 되는 사도집단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Ac 4:18–19) 말씀의 완성자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산헤드린은 말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 사도들은 대단한 선택을 합니다. 항거정신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공적인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공회가 거짓을 요구하였기에 그들은 신앙양심에 비추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절의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공회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공적인 권위를 상실하였으며 사도집단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가장 마지막으로는 산헤드린공회로 이어진 하나님 백성의 권위가 예수님이 오셔서 온전히 성취되었고 그 권위가 사도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전히 겉모습은 산헤드린공회와 사도를 비교해 볼때 71명의 저명인사로 구성된 산헤드린이 훨씬 더 권위가 있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더이상 말씀을 보존하고 가르칠 권위를 상실하였습니다. 사도가 그 책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공회가 사도들을 풀어주었을 때 그들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Ac 4:24) 그곳에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였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Ac 4:29) 산헤드린공회 사람들은 사도들을 위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사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온전히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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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의 축복 >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는 자를 일으킨 일로 체포되어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 섰을 때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치유를 행했는지를 물었다. 그때 베드로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했다. 복음을 잘 전하는 지혜로운 구변도 필요하다. 요새 말을 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도 있지만 말을 지혜롭게 잘하면 사실상 유익이 많다. 진실하게 말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말과 웃음을 주는 상큼한 말도 잘하고 특히 복음을 설득력 있게 잘 전하는 것은 복된 은사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변증을 듣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고 또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았다(13절).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한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상히 여겼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가? 성령충만 때문이었다.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어도 성령충만한 사람이 교육은 많이 받았어도 성령충만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능력 있게 산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비난할 말이 없어 그들을 나가게 하고 그 문제 처리에 관해 서로 의논한 후 표적이 나타난 것을 부인할 수 없기에 그 사실이 민간에 더 퍼지지 않도록 사도들을 위협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16-17절). 그리고 사도들을 불러 경고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자 사도들은 담대하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18-20절).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생겨났는가? 그것도 성령충만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성령충만이 얼마나 사람을 담대하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행하는 단 하루의 일이 성령의 권능 없이 행하는 몇 년의 일보다 때로는 더 효과적이다. 은혜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면 넉넉한 믿음으로 기다리라. 어떤 목적과 필요에 의해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라면 기다리면서 보낸 날들이 결코 헛되게 되지 않는다.
<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라 >
어떻게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신뢰하라.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나를 위한 계획을 준비해놓으셨다.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 만약 그 사실을 믿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겠는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한 방울에도 목적을 두고 들풀 하나에도 뜻을 두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욱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왜 많은 사람에게 자기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가? 마음속에 자기 계획으로만 넘쳐서 하나님의 계획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뜻과 계획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영적 시야를 차단하는 베일과 같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내 삶을 드리면 하나님은 그 베일을 벗기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현명한 척 하지 말라. 진짜 현명한 것은 자기가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려울 때 능력이 있다는 사람을 찾아다니지 말라. 그런 시간은 거의 낭비이고 영혼을 더 혼란하게 만든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성경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 뱃속에 아기가 태어날 때 일찍 태어나려고 어금니를 악물고 노력해도 한두 달 만에 태어나지 못한다. 예정보다 너무 일찍 태어나면 그 다음이 좋지 못하게 된다. 축복이 늦어지는 것이 때로는 더욱 큰 축복이다.
내가 원하는 일이 늦어지면 다른 일에서 축복이 주어질 줄 알고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역사를 신뢰하라. 그리고 사명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내 시간에 하나님이 맞춰주기를 원하지 말라. 기도할 때 “하나님! 이때까지 응답하세요.” 하고 자기가 시한까지 정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가장 적절한 때 성령충만의 은혜와 최상의 축복이 허락된다.
하나님 아버지, 증인의 삶은 멈출 수 없고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아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