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긴 줄거리는 이면에 가려져 괄호에 말을 가두고 두려움을 삼켰지 빛나게 해준다는 틀에 박힌 문구는 오히려 식상해서 오래전에 잊었어 입술이 뭉개진 계약서를 만지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린 별은 빛났어 빛깔 좋고 향기 좋은 말이 맛집 반찬처럼 깔려있는 당신과 계약이 손발을 묶었어 위태롭게 목줄을 달고 별의 입을 틀어막고 누군가 끌고 간 사이 해는 밝게 빛났어 잘려 나간 말머리가 휴지통에 버려진 밤
우리는 갈 곳을 잃은
문장을 꺼냈어
- 이송희, 『대명사들』, 다인숲, 2024.
<시작노트>
우리가 어렸을 적 읽었던 아름답고 감동적인 동화들은 실은 그 원작이 지극히 잔혹하여 각색 혹은 윤색된 상태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림 형제의 그림동화를 비롯하여 우리의 전래동화인 「콩쥐팥쥐」 등도 마찬가지다. 마녀사냥, 살인 등의 잔혹한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읽혀줄 수가 없어 동화의 결말은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딩으로 처리되었다. 「잔혹동화를 읽다」라는 제목의 이 시는 직장(조직) 내 갑의 폭력과 부정비리를 알면서도 아무 대책 없이 쫓겨나야 하거나 침묵해야 하거나 눈 감아야 하는, 을의 수모를 현대판 잔혹동화로 보고 쓴 사설시조다. 맛집 반찬처럼 맛깔스럽게 올라온 메뉴는 `을`의 눈을 가리고 입을 틀어막는 속임수였지만, 그럴 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업무를 해야 하는 열악한 처우를 고스란히 담았다. 조선 후기, 양반 관료들의 부조리한 행태를 비판하면서 출발했던 사설시조의 특성을 반영하여 우리 시대 몰상식과 불공정을 현대판 사설로 풀어 보았다. "잘려 나간 말머리가 휴지통에 버려진 밤", "갈 곳 잃은" 우리들이 안타깝게 서 있다.
이송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열린시학』 등에 글을 쓰며 평론 활동,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시집 『대명사들』,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4권, 평론집 『유목의 서사』 외 4권,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음,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