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법이란 조화의 길.
정법이란, 대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법칙이 조화된 중도를 말한다. 춘하추동의 사계절, 주야의 구별, 생자필멸, 인과응보, 모두가 다 정법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다. 자연의 모습이 바뀌지 않는 한, 정법도 바뀌지 않는다. 정법은 영원이며, 불교의 철학적 용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까운 생활환경 속에, 정법은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려고 하면, 정법을 배우는 것 이외에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은 항상, 지상의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대자비를 베풀고 있다. 참(眞)은 거짓의 반대, 거짓(僞)이 있으므로 참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정법의 이치는, 오직 한 가지 신의 이치를 말한다.
정법의 신리는, 대자연이 가르치는 가르침인 것이다. 유(類)는 유를 부르고, 친구는 친구를 부른다. 마음은 만물을 살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치료한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낮은 데로 흐름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하는 자는, 남도 또한 살린다. 정법에 기초한 신리(神理)는, 영원하며 불변이다. 실천이 없는 정법은, 그림의 떡이다. 그 맛을 모른다. 정법은, 생활 속에 살려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보라,,,,,, 자연은, 일초의 휴식도 없이 활동하고 있다. 정지하는 것도 없다...... 자연은 항상 움직이고 항상 행하고, 행하므로 정법은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법은, 중도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 정법은 지식이 아니다. 관념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행위인 것이다. 정법을 깨달은 자는 행위에 의해서, 대자연과 일체(一體)가 된다. 우주즉아(宇宙卽我)의 경지의 그 극치(極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현상계의 만생만물은, 모두 윤회하며, 한 시도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 무상(無常)의 모습이다. 인간의 상념도, 윤회의 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악(惡)의 상념은 악(惡)으로 통한다. 행복을 원한다면, 우선 악(惡)의 상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여움, 미움, 시기, 질투, 모략, 중상, 등 이러한 상념을 뽑아버리고, 책임, 박애, 용기, 지혜, 노력, 진보, 조화, 등의 선(善)의 상념을 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행, 불행의 근본은, 매일의 상념과 행위의 결과에 달려있다.
많은 물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 어느 쪽이 행복할까. 가진 자일까. 못 가진 자일까. 만일 가진 자가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해서, 한층 모으려고 하면 괴로울 것이다. 갖지 못한 자가, 그것을 탐을 내면, 욕망의 노예가 된다. 이 둘 다 불행한 자들이며,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다. 하루의 식량은, 몇 조각의 빵으로 족하며, 잠자리는 수 제곱미터로 족한 것이다. 소유물의 다소(多少)에 행. 불행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언젠가는 대지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맨몸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행복한 자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며, 항상 족함을 깨닫고 생활을 하는 평화로운 마음의 사람들이다.
이 대자연계는, 신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인간도 또한 자비와 사랑의 소유자이다. 정법이라고 하는, 신불의 법에 귀의한 자는, 우선 그 마음을 체득하고, 그 뜻을 이해하여, 실천하는 자라야 한다.
자비를 법이라고 하면, 사랑은 법의 실천 행위다. 자비를 신(神)이라고 하면,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자비는, 만생만물에게 무한의 빛을 주는 것으로서, 사랑은 관용으로서 상부상조하며 서로 용서하는 행위다. 자비도 사랑도, 스스로 돕는 자에게 그 빛은 주어지는 것이다. 양심없는 자. 실천을 주저하는 자는, 자비의 빛도 도달하지 않는다.
사랑을 원하는 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어야 한다. 자비의 문을 통과하려는 자는, 법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말법을 구제하는 자는, 여래이며, 신의 사자다. 여래는 정법을 설하여, 자비와 사랑의 광명을 중생에게 주지 않을 수 없다. 자비는,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윤회한다.
자비는, 신의 세로의 빛, 사랑은 실행의 가로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여움은, 거기에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 파동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혼의 전진을 저해하게 된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용,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벼이삭같은, 심경이 되어야 한다.
항상 집착하지 않는 유화한 마음은, 신의 마음이며, 법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타협은, 조화의 모습은 아니다. 자아가 따르기 때문이다. 타협에 의해서, 일시적인 균형은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하면, 이 세상은 일순간에 암흑이 된다. 타협은, 파괴를 막는, 일시적인 방파제에 지나지 않는다. 영속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타협에는, 진심의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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