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나의 모국어 / 이기철
1
돌이 따뜻해질 때까지
돌 위에 앉아 시를 쓴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바삐 일손을 다듬는 햇살
바람이 난생처음 배운 말을 하며 지나가면
나무에도 조금씩 젖니가 돋아
이파리가 음계를 물고 제 몸 위에 떨어지면
개울물은 비로소 청춘을 회복한다
일생을 서 있는 나무들은 발이 부었지만
잎들은 산맥에 넘겨준 햇빛을 두 손으로 되찾아 온다
아버지 나무가 작년에 피웠던 꽃을 빼닮은
올해의 꽃을 들고 서 있는 아들 나무들
가장 가난해서 부자인 나무는 나의 모국어
네가 부려 놓은 그늘은 늘 내 머리 위에 있다
2
나는 나와 함께 이 세상 건너는 사람들에게
한 오리 실밥만 한 선물도 보낸 적이 없다
오늘은 시 한 줄 햇빛 보자기에 싸서
발송인 없는 선물을 보내려 한다
작게 작게 생각하면서 익은
열매들의 깨끗한 잇몸 같은
꽃씨가 물고 있는
베낄 수 없는 언어 같은
손바닥에 떨어지는
향기 묻은 새똥 같은
이 말을 읽는 그의 가슴에
금잔화 새 움 같은 기쁨 하나 싹 틔울 수 있다면
올해 고령인 돌이 내 무릎 아래서
첫돌배기나 되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내 손등의 정맥 사이로 날짜와 요일이
소풍가는 아이마냥 지나간다
3
저 새조차 울지 않으면
내 오후가 많이 아플 것 같다
머리 위를 나는 새들의 날갯소리가
종잇장 찟는 소리를 낸다
나무들이 부끄럼 많은 여자처럼 유방을 감추고
나뭇잎은 습관적으로 강물 소리를 낸다
벌레들은 대개 제 청춘을 여기서 낭비한다
제 빛깔을 흔들며 불편한 어제를 잊는 잎들
인편 끊긴 날엔 속속 나비 엽서가 도착한다
이 엽서는 꼬박 열흘은 읽어야 한다
한 번도 이별을 경험하지 못한 나무에게
이별의 적요를 가르칠 순 없다
나무가 보내는 신선한 소식들이
나이 든 마을을 젊게 한다
4
돌 위에 앉아
돌이 따뜻해질 때까지 시를 쓴다
나무 외에도 숭고한 명명은 또 있지만
오늘은 다른 이름은 부르지 않으려 한다
오전을 핀으로 박아 놓아도
오후는 어김없이 찾아와 누룽지처럼 말라붙는다
내 발이 가까이 가면 길을 비키는 나무도 있다
그러나 나무는 내 나무가 아니고 나무의 나무다
걸음을 배우기 전 덩굴 벋는 법을 배운 가지들
구름은 그 가지에 가슴을 찔려 보고 싶어 한다
나는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 안에
이 시를 마치려 했는데
내게로 밀물져 오는 생각의 물살로
사흘에서 닷새 동안 이 시를 쓴다
어느덧 내 살 닿은 돌이 따뜻해졌다
- 이기철 시집 <나무, 나의 모국어> 2012
[출처] 이기철 시인 50|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