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대한민국은 스트레스 공화국

“대한민국은 스트레스 공화국” 입시·취업 관문에 이어 실업 걱정까지 끝없이 펼쳐지는 스트레스 장벽. 우리 국민은 이런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가. 입시·취업·육아·카드빚·실직 스트레스에 고통받고 있는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스트레스 지옥’의 실상을 털어놓았다. ⓒ 이우일 그림 입시 스트레스에 취업 스트레스를 거쳐 실직 스트레스까지. 대한민국은 이제 요람에서 무덤까지 스트레스 공화국이다. 매년 수능시험 날이면 수험생의 자살이 잇따르고, 공대생들은 의대·치대·한의대에 다시 진학하기 위해 실험실을 팽개친다. 기껏 대학에 들어가도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기 일쑤다. 그나마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곧 퇴출 위기에 몰린다. 한참 일해야 할 30대까지 퇴출 대상으로 몰리고 있다. 사회에서 일찍 밀려난 ‘사오정 세대’ 남성 가장은 같은 연령대 여성에 비해 세 배나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여성들의 전유물이던 화병까지 앓고 있다. 불황으로 가정도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 경제적 이유에 의한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육아 스트레스로 인해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노후대책이 미비해 노인 우울증이 증가하고 있고, 주부들 역시 불황 여파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한 여성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여성은 조사 대상 35개국 여성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예방약’까지 등장한 우울한 사회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한 이민도 급증해서, 홈쇼핑에서는 비싼 이민 상품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나마 탈출구가 없는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경찰청 조사 결과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급기야 ‘자살 예방약’까지 등장했다. <시사저널>은 오늘날 갖가지 스트레스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 지수가 특별히 더 높을 것으로 판단되는 다섯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각각 입시·취업·육아·카드빚·실직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은 이들은, 방담이 끝난 뒤 ‘스트레스 왕’을 가렸다. 방담 참가자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스트레스보다는 모두 대한민국 사회가 주는 특수한 사회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이번 방담에 참여한 정재웅씨(21)는 올해 세 번째로 수능을 치른 삼수생이고, 서주원씨(24)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여대생이다. 조인숙씨(29)는 카드빚 때문에 맞벌이에 나선 애기 엄마이며, 강상래씨(31)는 카드빚 돌려막기를 해오다 끝내 개인 워크아웃을 신청한 신용불량자이다. 정외식씨(40)는 퇴출 은행과 증권사에서 명예 퇴직한 보험맨이다. 스트레스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의 방담에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국립감호정신병원 최상섭 원장이 함께 참여해 조언하고, 관전평을 썼다(박스 기사 참조). ⓒ 시사저널 윤무영 어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가? 서주원(서):이제 본격적으로 경쟁 사회에 떠밀려 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요즘은 취업 걱정뿐이다. 조인숙(조):형부 공장이 부도가 나서 언니가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언니를 돕기 위해 카드빚을 냈다가 함께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 카드빚을 갚기 위해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육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외식(정):은행원 생활을 9년 했다. 나름으로 자긍심과 보람을 가지고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다니던 은행이 퇴출되었다. 갑자기 금융 구조 조정의 한가운데 서니 인생이 막막해졌다. 뒤에 증권회사로 옮겼지만 나이 때문에 다시 나와야 했다. 정재웅(웅):재수하고 서울공대에 들어갔다가 올해 수능을 다시 치렀다. 이공계 위기를 느끼고 의대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 선배들처럼 취업할 때 가서 후회하느니 지금 다시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상래(강):나는 사회 적응에 실패한 사람이다. 대학에도 못 갔다. 단순 직종으로 일하다가 IMF를 맞았다. 인터넷 쇼핑몰 열풍이 불면서 쇼핑몰을 만들었는데 매출이 거의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카드빚을 쓰기 시작했는데 몇 년 쓰다 보니 빚이 감당 못할 만큼 불었다. 개인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명문대 학생이면서 수능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정재웅씨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가? 웅:우리 세대는 철저하게 경제적 이유로 학과를 선택한다. 나도 물리학자가 되고 싶지만 의대를 선택했다. 수중모(수능에 중독된 사람들 모임)라는 다음 카페가 있다. 그 카페에 가면 재수 삼수는 기본이다. 8수생·9수생도 있다. 군대 가서도 수능을 준비하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수능을 준비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가관인데, 그것이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학원에서 강사의 삼촌뻘 되는 분이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대부분 의대나 치대, 한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한의대 준비생들의 연령층이 제일 두텁다. 서:수능이 쉬워지면서 재수가 유행했다. 퀴즈 푸는 식으로 일정한 룰만 알면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 중에는 4수·5수를 한 친구도 많다. 그다지 좋지 않게 보고 있다. 욕심을 부리는 것 같다. 웅:친구들에게 말한다. 로또라도 당첨되면 물리학자가 될 것이라고. 바꾼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연구원의 생명은 짧다. 선배들을 보니 30대 후반이면 퇴출 대상이다. 관리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나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전문직은 60이 넘어서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정:전문직이라고 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니다. 요새는 문 닫는 병원도 많다. 그 안에서도 계층이 분화하고 있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나? 조: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어느 자리에 가서나 분위기를 이끌었는데, 이젠 어디 돌아다니기도 싫고 말도 하기 싫다. 3증 4중으로 고충이 겹치니까 무슨 일이든 짜증부터 난다. 어깨가 결리고 뒤통수가 자주 아프다. 어떤 때는 뒤통수에서 뒷목을 거쳐 등까지가 모두 경직되기도 한다. 정:은행이 퇴출되었을 때 7개월 동안 실업자 생활을 했다.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정말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집사람이 한 달에 50만원 받는 임시직을 구했다. 아내가 처음 출근하는 날 배웅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강: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면 신경쇠약에 걸렸다. 어떻게 돌려 막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 카드사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시때때로 전화가 걸려왔다. 터뜨리지도 못하고 괴로움만 쌓였다. 서:내가 못나서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많이 위축되고 주눅 들었다. 가끔 꿈을 쫓아온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냥 부모님 말씀대로 교대나 사범대를 갈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생이 수능을 봤는데 잘 보지 못한 것 같다. 교대나 사범대에 갈 생각이 아니면 재수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강:일단 빚을 내서 쓴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카드를 빚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구 사용한 잘못이 크다. 그러나 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남발한 카드회사도 책임이 있다. 월급이 100만원도 안 되던 내가 카드회사 한 곳에서 1천5백만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 카드사가 지금 부도 날 위기에 몰렸다. 이를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한 정부도 잘못이다.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미명 아래 카드사를 적절히 규제하지 않았다. 조:카드 빚을 진 사람이 모두 과소비나 유흥비로 돈을 쓰고 빚을 진 것은 아니다. 생계형도 많다. 기업에 수조원씩 공적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신용불량자들에게는 너희들이 빚내서 썼으니 알아서 갚으라고 한다. 신용불량자가 되기 전에 지원해서 막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계를 들어 곗돈을 타서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정부의 지원책이라는 것이 계만도 못하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 정:그래도 우리는 IMF 한파를 일찍 겪으면서 많이 단련되었던 것 같다. 다들 제자리를 찾았다. 조:주부들이 빚을 진 경우 남편에게 고백하기 꺼린다. 이혼당할 것이 두려워서다. 나도 고민고민하다가 어렵게 남편에게 얘기했다. 다행히 이해해 주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준다. 가끔 ‘그 돈을 어디어디에 투자했으면 지금 어찌어찌 되었을 텐데…’하고 말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서:대학가에서 4학년은 외모부터 구별된다. 피곤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4학년이다. 4학년 학생들에게는 독특한 패션도 있다. 치마 입고 구두 신고 다니다가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는다. 화장도 하지 않는다. 번거로워서다. 색깔만 다른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사서 매일 돌려 입는 친구도 있다. 웅:주변에 대학을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본 친구들이 많다. 이번에 떨어지면 군대에 끌려가게 된다. 수능이 끝나고 연락이 끊긴 친구들이 몇 있다. 아마 시험을 못 보았을 것이다. 시험을 망치면 자학하게 된다. 허탈한 마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었다는 친구도 있다. 강:궁지에 몰린 신용불량자에게 일부 변호사들은 파산하라고 부추긴다. 파산하면 면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수수료를 받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파렴치한 짓이다. 파산하면 인간 이하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그걸 부추기다니, 정말 무서운 인간들이다. 자신의 스트레스와 관련된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아침에 애를 맡길 때마다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3개월 동안 애를 맡기고 오면서 매일 울었다. 저녁에 데리러 가면 애가 거지꼴을 하고 있어서 또 마음이 아팠다. 출산 지원금? 그것 주고 애 맡길 데라도 있으면 더 낳고 싶다. 그런데 그것 받고 낳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사교육비는 또 얼마나 드는데. 정부는 애 낳는 일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일인 줄 아는 것 같다. 그나마 정부가 운영하는 놀이방은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그리고 그런 놀이방은 여는 시간이 낮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낮시간에만 직장 생활 하는 여자가 얼마나 있는가? 행정편의주의다. 늦게까지 일하는 엄마는 사설 놀이방을 이용해야 하지만, 한달 이용료가 27만원이다. 늦게까지 맡기려면 12만원을 더 내야 한다. 단순직에서 일하는 엄마들이 한 달에 40만원 정도 하는 놀이방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강:신용불량자가 3백60만명이다. 예비 신용불량자 격인 1개월 연체자가 100만명 정도라고 한다. 돌려 막기에 정신 없는 사람도 한 100만명은 될 것이다. 국민 중 5백만명이 카드빚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 웅:이공계 대학이 나라의 기반이라고 말들은 하는데 우리가 본 모습은 처참하다. 친구 아버지가 과 선배이시다. 그런데 서른아홉 살에 IMF 한파를 맞고 퇴출되셨다. 지금 장사하고 계신다. 그런 모습을 보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흉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강:언론사 기자들이다. 그들은 너무 편파적으로 보도한다. 은행편만 든다. 신용불량자들은 언제나 매도당한다. 특히 나 같은 개인 워크아웃 신청자들 가운데서도 빚을 갚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비난 일색이다. 웅:교육부다. 경쟁만 강화시키고 입시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해 분란만 야기하는 교육부가 가장 문제다. 입시 혼란으로 수험생들의 정신 세계가 피폐해졌다. 다른 답을 주장하는 수험생들이 서로 원색적인 비난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교육부 때문에 수능생들의 품성마저 거칠어졌다. 정:정부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라면 나라 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든 재정경제부 관료들이다. 국민연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국민들이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보건복지부 관료 역시 문제다. 서: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뽑으려고 하는 기업들도 문제다. 우리가 대학에서 4년 동안 배운 것이 학점과 토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줄창 싸워대기만 하는 정치권도 불만이다. 과연 ‘스트레스 왕’은 누구일까? 강상래씨는 카드빚과 육아 스트레스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조인숙씨를 꼽았다. 정재웅씨는 자신을 꼽았다. 정외식씨는 사회의 문을 두드려보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서주원씨를 꼽았다. 서주원씨는 여러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라며 조인숙씨를 꼽았다. 방담을 관전한 최상섭 원장은 조인숙씨를 꼽았다. 조인숙씨 역시 본인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