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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 5:1~11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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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의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에게 냅니다. 베드로가 이는 마음에 사탄이 가득해 성령을 속인 것이며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아나니아를 책망합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고, 거짓을 말한 그의 아내도 죽습니다. 이 일로 온 교회가 두려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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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 5:1~11
초대교회는 성도들의 헌신적인 섬김과 사랑으로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두려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들 소유의 땅을 판 후에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공모했고 사도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3절)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들의 거짓은 단지 개인 차원의 죄가 아닙니다.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려 한 것이며, 교회의 정결함을 깨뜨리고 사도적 권위를 무시한 일입니다. 그들은 거짓말과 탐심으로 인해 결국 생명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사도의 권위를 경시한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리심으로 모든 성도에게 반면교사로 삼으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의 형벌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의 말과 행동 중에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경시하는 부분은 없었는지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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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 5:12~16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성도들이 두려워하지만, 그 일이 복음 전파를 위축시키지는 않습니다. 사도들이 공회의 경고를 거부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니, 그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사도들과 함께하신다는 가시적인 증거로,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권위를 확증해 줍니다. 복음 전파와 더불어 많은 표적이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자 믿는 사람이 더욱 많아집니다. 심지어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사도들에게 데려왔고,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통해 모두 고침을 받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함을 보여 줍니다.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은 증인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하나님이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성령의 역동적 역사하심을 언제, 어떻게 경험했나요?
한절묵상:사도행전 5장 4절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땅 판 값을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권한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범합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의 악함은 세상 법으로는 처벌의 이유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큰 죄가 됩니다(창 6:5).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주인이십니다. 성도는 마음의 에덴에서도 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경홀히 여기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가 주님을 위해 사용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 마이클 하이저
오늘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고 싶어 저 자신을 포장했던 위선을 회개합니다. 탐욕과 거짓의 유혹을 예민하게 분별하고 멀리하며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복음의 능력으로 저의 몸과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고쳐 주소서
오늘의 찬송(새 321 날 대속하신 예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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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집사님 다시 복습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들이 주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하면서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배웠습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 후 40일을 경험하고, 주님의 승천을 목도하면서 이들은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그동안 배웠던 것들이
이들의 삶에 확고한 원리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이 생겼습니다.
말씀을 증거하고 싶은 강력한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순종이라는 꽃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순종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의 다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말씀, 기도, 교제, 증거 등등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로 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포괄해서 나타나는 열매가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없이는 절대로!!
이런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없이
주님이 가지셨던 그 놀라운 사랑의 에너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에너지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안에서 누려야할 이 기쁨!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신 기쁨이요 평안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성령의 소욕이 없습니다.
말씀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욕망도 시간도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맥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배의 감격도 없습니다.
순종에 대한 의지도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생명을 거는 사람입니다. 방금 옥에서 풀려나왔지만 나가서 전하라고 할 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감옥의 문을 열고 하시는 말씀에 주목합시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아멘.
오늘 우리 삶이 생명의 말씀을 말하는 삶,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 오늘도 새로운 날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담대하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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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밭에는 곡식만 아니라 가라지도 잘 자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할 때는 가라지도 퍼지는 것입니다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13:25)
그런데 곡식과 가라지는 외모가 너무 비슷해서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와 비견할 만큼 매우 경건해 보였습니다
자기 밭을 판 값 전부를 바친 바나바처럼 그들도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탄이 천사로 가장하는 것처럼 사탄의 일꾼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로 가장하는 일이 많습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고후11:14~15)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처럼 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바나바처럼 영광은 받고 싶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3)
그래서 바나바처럼 보이게 해서 사람의 영광을 받으려고,
땅 값을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 앞에 놓으며 전부를 바쳤다고 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여도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욥13:9)
누가 썩은 것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썩은 마음까지도 다 살펴 아시고 그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그래서 성령을 속이려고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습니다
이렇게 가라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다가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곡식과 가라지를 분별하실 날이 정말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30)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로 성령을 거슬러 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육체를 거슬러 행함으로, 경건함과 온전함에 깨어 있기 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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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1절~8장 3절은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이야기합니다.
안으로는 부정행위(5장 1~11절)와 행정 문제(6장 1~7절)가,
밖으로는 핍박으로 인한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5장 1~11절 아나니아 부부가 공모하여 밭을 판 값의 일부를 숨기고 전부를 다 바친 것처럼 속인 것은 사도들만이 아닌 성령을 기만한 범죄였습니다. 새 시대를 여는 교회의 시작에서, 그들의 거짓과 부정은 교회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성결’을 위협하는 일이기에 엄중한 심판이 뒤따랐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 직후 아간의 범죄를 처벌하여 이스라엘 진영을 정결하게 하신 것처럼(여호수아 7장), 초대교회의 ‘첫 범죄’를 단호하게 정죄하여 경계를 삼고 공동체의 순결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성과’보다 ‘성결’입니다.
12~16절 교회 내의 죄(1~10절)가 청산되자, 복음의 역사는 더욱 정진합니다. 표적과 기사와 함께 증거되는 복음에, 믿고 주께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집니다. 지금도 복음으로 인해 거룩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에 참 회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 기도하며 복음에 충실할 때 비로소 참 부흥과 연합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5장 3,4,8절 아나니아 부부는 그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려 했습니다. 거짓을 말하고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죄는 너무 적은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5장 7~9절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지만 삽비라는 끝내 거짓을 버리지 못한 채 심판을 받습니다. 주께서 말씀과 사건을 통해 내 죄를 폭로하실 때 더는 숨기지 말고 실토하십시오. 그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12,13절 복음의 능력 앞에서 칭송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성전에서 감히 사도들과 상종하거나 그들의 신앙에 합류하는 이들은 적었습니다.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한 두려움(5,11절) 때문일 수도 있고, 사도들에 대해 적대적인 종교지도자들(핍박의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을 유보할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주께서 우리 생명을 위해 치르신 대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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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권능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일으켰고 자신들의 활동을 막고 겁을 준 종교지도자들이 활동하는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거리낌 없이 한마음으로 그 증인 된 역할을 넉넉히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 칭찬받는 존재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로가 되었으며 믿는 자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주변 마을에서도 이들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고 많은 치유와 회복의 사건들이 날마다 더 힘 있게 나타났습니다. 막을 수 없는 창조의 능력, 감출 수 없는 빛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더욱 세상 가운데 영향력 있게 만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견디는 신앙인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변화되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감출 수 없는 존재로, 그 한없는 은혜가 넘쳐흐르는 담대한 증인으로 오늘도 신실하게 주님 붙들고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한복음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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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나바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공동체와 나누었습니다.
5장은 그들 중에 한 부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도 자신의 소유의 땅을 팔아, 그 일부의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으나, 일부를 드렸음에도 전부를 드렸다고 속였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단순히 거짓말로 규정하지 않고, 성령님을 속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부는 각각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바쳤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냐고 동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 타락할 위험도 상존합니다. 얼마나 바쳤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성령의 역사가 왕성한 자리에 마귀의 역사도 들끓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허망한 영광만 얻으려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들 부부가 그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모두 바쳤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또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더럽히는 일이었기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엄중히 다루셨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업과 상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온 교회와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 도전이었고,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다룬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교회의 거룩을 방해하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 일 후에,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고 세상 앞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누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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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일어난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앞서 사도들과 120문도, 그리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크고작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제자들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앉은 자를 일으켜세운 것과 또한 그가 공회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이자 도전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헌금을 한 자나 도움을 받은 자나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눔을 통한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바나바와 같은 자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서 헌금하기도 했는데, 그 액수는 상대적으로 큰 액수였을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에 놀라기도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많은 헌금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생각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생각 자체가 바로 사탄이 부정한 생각을 집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헌금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물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신도 그러한 부를 허락해 달라고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하는 목적이 자신의 물질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남이 부럽고 시기하는 마음에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허영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사탄의 마음이며, 그것은 교만입니다(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사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처럼 영광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탄의 마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교만은 사탄의 정체성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진 자는 높임을 받고 스스로 높아진 자는 무너지는 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주보에 헌금한 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3). 하물며 그렇게 하지는 못할망정 이름을 버젓이 올리는 것은 위선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길모퉁이에서 나팔을 불라고 선동하는 것입니다(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교회의 기복주의 신앙이 신바리새인을 양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오늘날 교회들은 왜 교훈을 얻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교훈을 얻지 못하기보다 무시한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사건에 대해서 올바른 해석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일부를 처분한 것입니다(행 5:1,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땅을 팔아 그 돈에서 얼마는 감추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왔다.- 현대인의성경). 즉 저들은 자신들도 재산이 있으니 그 중에서 얼마를 팔면 남들처럼 장로직분을 받을만큼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저들이 갈등한 것은 막상 전재산을 팔아서 내놓자니 먹고 살일이 막막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내놓을만한 헌금을 작정하고서 속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9:7).
둘째, 저들은 남들 앞에서 마치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었음에도 성령의 감동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성령 충만한 사도들까지 속이려 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속이는 행동은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비록 지도자에게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질서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무시했습니다. 자신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교만한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의 탈선으로 목회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물론 잘못을 한 목회자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교회에서 시정잡배처럼 행사하며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자의 죄는 탈선한 목회자의 죄보다 그 죄질이 더 큰 것입니다. 목회자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것처럼 목회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교회가 싫다면 조용히 옮기면 되는 일인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본전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본전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헌신이 위선이며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시대적인 상황에서 특히 교회의 태동의 시기에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 본보기 차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본보기든 아니든 성령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느끼게 해 주는 동시에 성령을 거역하고 경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느끼게 해 주는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을 무시하면 성령으로부터 영원히 무시를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16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들을 통해서 병든 사람, 귀신 든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왜 초대교회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오늘날에는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이 계실 때에도 훨씬 많고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 10명을 고치셨는데 예수님께 찾아온 자는 1명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았을 때 예수님은 저들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26).
초대교회때 많은 기적이 행해진 것은 시대적으로 그러한 역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가끔 기적이 행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안수를 통해서 병 고침을 받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고통 가운데 영적인 광야를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무슨말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생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풀어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병이 낫는 표적을 예수 믿는 표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병이 낫거나 아니면 물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가 회복되면 육신과 물질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해 악한 세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표적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역자를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그 일을 행하게 하시지만, 그러나 믿음의 목적은 병 치료나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근본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병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교회는 병을 고쳐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병원과 철학관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 6:53-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말씀으로 찔림을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진리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단점이나 습관 정도를 고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병 고침 받고 귀신 쫓아내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성령이 역사하는, 즉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진정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히 4:12).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말씀을 듣고 이와 같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할 때 저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신 축사 사역을 통해서 귀신이 떠나가더라도, 암 병이 치유를 받더라도 말씀을 통해서 회복되지 않으면 이전 상태보다 더 심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많은 기도원과 같은 곳이 문을 닫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 교회에 모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작은 일을 하려고 해도 온갖 비난, 판단, 주장들로 인해 일하기 전에 시험이 오고 열매를 맺기도 전에 흔들어 떨어지는 것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 자신의 경험과 주장으로 일을 하면 결코 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돈과 실력, 사회적 경험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발버충 치며 변화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한 변화를 일으킵니다(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과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입니다. 변화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희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자들로 인하여 변화의 불씨가 당겨지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늘 같은 일들만 반복되었습니다. 원망, 시기, 질투, 다툼은 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한 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행 2:17-18,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성령을 통한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닙니다. 늘 생활하던 습관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동안 늘 해오던 말이 아닙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만듭니다. 새 마음, 새 영, 새 믿음, 새 일을 일으키십니다. 즉 성령은 육의 세상을 영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저들은 말씀을 통해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나누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변화 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오직 말씀을 통해 변화를 받으며, 그것은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모이면 기도하기를 힘쓰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구역 또는 목장모임에서 형식적인 기도를 드리고 수다로 일관하는 모임이 아니라 구역과 교회 그리고 가정을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숨 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는 종교인들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교회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직 말씀과 기도로 변화 받은 성도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 변화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살고 죽는 것에 대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사 66:1-2,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는 죽음을 각오하고 변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대충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가득 찬 종교집단을 원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심령에 통회하며 두렵고 떨림을 갖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돌보신다 하셨으니 그러한 사람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생명 연장 프로그램을 강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 살기를 가르치기보다 주님처럼 사는 것을 가르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세상은 100세 시대를 말하지만 교회는 오직 오늘의 죽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생명 연장, 생명 보존을 말하지 않고 생명 가치, 생명 존중, 생명 희생을 전하는 곳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오셨다면 이제는 오직 주를 위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라는 건물에 충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대로 살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십시오. 그것을 삶의 전부로 여기십시오. 그럴 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난 자유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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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탄으로 충만한 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람을 속인 것이 성령을 속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 성령을 속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속인 것이 성령님을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으로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보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고백합니까?
시51: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아니하십니다. 형식적인 헌신도 받지 않습니다. 은혜가 없이 인간적인 댓가를 바라는 봉사를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삶 가운데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의 제사입니다. 회개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속이고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이 당장 목숨을 거두어가는 것도 있지만, 은혜를 거두어가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죄대로 그대로 내어 버려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당장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하나님은 지금도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고 합니다.
여러분 성령충만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경회
그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심을 죄가 소멸이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의 초기에는 주로 병이 낫고, 귀신을 물러가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 고침과 귀신을 물리침과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들을 통해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좋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싫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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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우리 위에 없을 때, 용서 받을 기회마저 놓치는 불행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5:1~11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와 임재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 여실히 증명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2~3절). 누가는 건강한 초대 교회를 세워 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 이 사건을 통해 경각심을 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막 입성 했을 때, 전리품을 숨긴 아간의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벌하심으로 하나님 경외의 중요성을 심어 주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9절)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삽비라도 남편의 전철을 밟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10절). 그녀에게는 분명 자신과 남편의 잘못을 뉘우쳐 용서를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음을 다시금 인지하여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전해들은 예루살렘의 온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11절). 하나님의 교회를 바르고 온전히 세우시기 위해 불가피한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떳떳한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위선적인 거짓 신앙이 우리의 교회 공동체를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은혜아래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변명할 시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우리고 있습니까?
복음 안에 있는 기적과 능력...-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민간에 표적과 기사를 일으킵니다. 점점 믿는 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베드로를 향한 사람들의 인기는 높아만 갔습니다. 사두개인의 당파가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옥에 가두지만,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그들을 끌어내어 가서 전할 것을 명령합니다.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가르치는 사도들을 다시 잡아 왔지만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기적과 능력이 있습니다(12~16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12a절). 하나님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를 베푸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는 주체가 사도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게 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12b절). 같은 주, 같은 믿음 안에서 일치되는 우리의 교회를 소망해 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섬긴다고들 말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분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순수한 복음의 열정에만 사로잡혀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잘 실천해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 합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다 나음을 얻으니라..’(14~17절). 복음에 대한 핍박이 더욱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그 성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은 사도들을 통하여 죽어가는 자들까지도 살리는 기적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복음 안에는 생명을 살리는 기적과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 죽어가는 주변의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면 우리는 직무유기의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내 자신을 통하여 당신의 사역이 계속되기를 바라십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을 두기를 원합니다.
사도들이 민간에 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보일 수 있도록 한 주체는 누구입니까?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생각과 태도는 어떠합니까?
오늘도 사랑과 섬김을 행동으로 나타냄으로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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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결단
바나바의 헌신을 보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밭을 팔아서 헌금하기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첫 번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들은 말씀이 주는 감동앞에 자신들이 가진 것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어 놓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단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 그들의 결단의 동기가 순수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의심이 갑니다. 신앙의 결단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됨으로 행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른 헌신을 하며 살고 있는가?
2.변질된 헌신
좋은 뜻으로 결단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결단은 자신의 욕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처음의 믿음의 결단은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사소한 욕심때문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속이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믿음 생활을 행할때 항상 조심하며 행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며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그 순간부터 효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은 하였지만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는 변질되어서 결국 죽음을 당하는 슬픈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실수가 없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마음이 변질되어 주님의 마음을 슬퍼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3.본질의 회복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감히 성령님을 속이려다 베드로 사도앞에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일이후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더 왕성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결국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많은 사람들앞에서 증거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인정이나 사사로운 생각에 끌리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쫓았을때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착오없이 지키게 될때 성령님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믿음의 원칙을 지키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쫓을때 우리에게 더욱 더 큰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신앙의 본질에 가까운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4. 참된 성장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성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 이후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성장은 오직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영적인 칭송을 받고 성도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갈망할 때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장 주요한 요소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안에서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때 우리 교회는 자연적으로 성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실 때 항상 영적인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영적성장의 열매를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묵상하기
나의 삶은 성령님의 역사로 인하여 성장하고 있는가?
(예화) 부흥케 하는 성령(행 2:38)
대 로마 제국의 박해를 극복하고, 예수의 복음으로 천하를 점령한 것은 힘으로 한 것도 아니며, 능으로 한 것도 아니라, 성신으로 한 것이다. 루터와 칼빈이 로마교의 미신을 때려 부시고서 복음주의 교회를 재흥한 것은, [도이취] 의 힘도 아니고, 영국인의 정치능도 아니며, 성신에 불타는 [퓨리탄] 정신이다. 18세기 산업혁명후에 부패막심한 영국의 정신계를 혁신한 것은 요한. 웨슬리가 모라비아의 기도단에서 받은 성신의 불의며, 1907년의 한국 교회의 대부흥은 길 선주 목사에게 임하신 성신의 불이다
(부흥케하는 성령을 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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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속이는 죄악, 성령에 힘입은 사역” 윤광서 목사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소유물을 팔아 서로 나누는 하나의 공동체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그의 땅을 팔아 사도들에게 모두 맡겼지만 아나니아는 그의 아내 삽비라는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모두 맡기지 않고 그 값에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사람에게 칭송을 받고 싶어서 자신의 소유를 드리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전부를 드리기가 아까워서 소유 일부를 숨깁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추궁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 하나님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탐심과 교만으로 거짓된 행동을 했습니다.
탐심이 가득한 아나니아는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 엎드러져 죽자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세 시간 후에 삽비라가 들어오자 베드로가 다시 삽비라를 추궁하자 발아래 엎드러져 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죄악을 범하고 죽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향한 복음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초대교회를 떠날 수 있었겠지만 믿는 사람들이 뭉치는 계기가 됩니다.
백성들은 한 마음으로 모인 성도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들을 우러러보고 칭송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갈수록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아지고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와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하루도 성령님과 함께하며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는 끊어내야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던 죄가 언제나 가득했습니다.
오늘 주님 주신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소원하며
단호히 끊어 낼 수 있게 하옵소서!
마땅한 힘을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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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 어째 건 잘 믿어보고자 하는 부부가 참변을 당한 일로, 이로 인해 초대교회 공동체에 큰 충격이 왔다는 말입니다. 헌금 일부를 숨긴 것으로 인해 죽은 이 사건은 생명의 경시라는 윤리적 시각에서 비판받아야 할 성경의 오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만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만약 탐욕으로 인하여 그런 엄벌을 받았다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재물 욕, 거짓말 때문에 이렇게 성경에서 비중 있게 다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으니, 이는 성경의 큰 줄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과 그에 따른 신학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나라의 전개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이 사건을 푸는 단서입니다. 그 때는 바야흐로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셔 기독교가 세상에 퍼질 중차대한 시기입니다. 교회의 모태인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잉태되는 순간으로, 그 출발점은 깨끗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가 마무리 되고 본격적인 하나님나라가 그 때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은 그 무엇보다도 정결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실은 그러한 사건은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전환기의 시대로 즉, 광야시대가 끝나고 막 가나안 시대를 앞둔 시절입니다. 그 때 아나니아 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간입니다. 적들의 물건들을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그만 탐욕 때문에 금과 은 덩어리를 꼬불쳐 놓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와 그의 모든 가족들을 돌로 쳐 장사시켰는데 그 때 만들어진 것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실은 그 골짜기에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욕심이 매장된 곳이기도 합니다.
모든 백성들의 마음도 아간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광야 시대가 끝나고 가나안 시대를 여는 시점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베드로는 하나님나라를 세우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오는 영을 분별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것으로, 탐욕으로, 그리고 꾀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방문합니다. 그 실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베드로의 눈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탐색기가 우리 마음에서 원활히 작동되면 좋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우리와 같은 교인입니다. 늘 경건하고 거룩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영과 더러운 영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깨끗한 방에 쓰레기가 있으면 금방 발견합니다. 그러나 청소가 안 된 방에 쓰레기는 별거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늘 청결되기를 소망합니다. 깨끗하지 않으면 더러운 것이 얼마든지 숨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정화작업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정화가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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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밭과 집 있는 사람이 그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두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그랬고 많은 은혜 받은 자들이 그랬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랬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두었다. 하지만 전부가 아닌 일부를 드렸다. 얼마를 몰래 감추고 얼마만 가져다가 드렸기에 죽게 되었다.
모든 것을 바치지 않은 헌신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드리는 것에 내 이기심, 내 유익을 구하는 것, 내 목적이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100% 온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을 받으신다.
하지만 나의 삶은 그렇지 않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부분이 많다.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안에 내 욕심이 담겨 있을 때가 많다.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자. 내 욕심, 내 이기심을 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자. 얼마를 빼고 일부분만 드리면서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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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사람들을 매우 당황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땅을 팔아 헌금하고 있는 것인데 왜 이른 끔찍한 일을 당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은 구약의 가나안 정복 때에 아간의 행동'과 거의 흡사한 행동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었습니다.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능력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이 중요하다면 그가 헌금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비록 거짓말을 하였어도 헌금을 안 한 사람보다 더 낫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일을 더 많이 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 행위로 끝나지만 교회의 정결은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역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마치 괄호안의 사건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이 앞뒤에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도록 정결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말하면서 교회가 어떤 모습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처음 시작된 교회의 모습이 어떠하였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도 초대 교회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공교회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너무 가난하고 어떤 교회는 너무 부요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죽이는 결과를 낳는데 왜 그렇게 불균형이 심화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고쳐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삽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헌신자들이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진정 가난에 찌든 사람이 없도록 말입니다.
교회는 능력이 아니라 순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능력이 많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순결할 때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가 교회답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낼 때에 사단의 세력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격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파워를 사용하여 성도들을 핍박하기도 하고 세상의 복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사단의 도전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사단의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욕심과 최악에 육신을 내어주지 않고
오직 의의 무기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복된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사 이 땅 가운데 맡겨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과 평강을 전하는
거룩한 주님의 제자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