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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20,1-17
그 무렵 주님께서
1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밭’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말씀)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밭이 씨앗을 일구는 줄로 알지만, 사실은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앗을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가시덤불 밭이 됩니다.
쓰레기가 가득하며 쓰레기 밭이요, 똥이 뿌려지면 똥밭입니다.
그러니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밭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다.”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성모님은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말씀이 자라고 있는 ‘말씀의 도서관’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자라는 잡초 밭인가요?
하오니,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랄 수 있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 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소서!
기꺼이 죽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십계명 묵상>
오늘의 탈출기는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묵상하다 보니 한 번도 십계명에 대한 나눔을 한 적이 없었음에 생각이 이르렀고, 어찌 이러했을까에도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죄의식은 있어도 계명에 대해 생각지 않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무의식에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의 무의식에도 죄의식이 깊이 있고, 그래서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저나 여러분도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싶고 멀어지고 싶은 무의식이 있어 그 무의식이 작동하였던 것입니다.
첫째 계명이 하느님만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인데, 그러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피하여 다른 사랑 안으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럴 때 하느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가만히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고 탈출기는 얘기하고 질투하신다고 얘기하는데, 설마 하느님이 우리의 사랑을 놓고 질투하시다니 그것 좀스럽고 하느님답지 않으며 하느님 체면 엄청나게 구기는 것이 아닐까요?
체면 구기는 것이긴 하지만 하느님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상대의 사랑에 좌우되거나 꺾이지 않습니다.
상대의 사랑이 작아도 사랑을 거두거나 줄이지 않고 발산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질투하신다고 함은 좀스러움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음이며, 우리의 사랑을 끝까지 원하시는 영원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질투할 바엔 포기해버리는 우리의 작은 사랑과 비교하면 알 수 있지요.
어쨌거나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당신만을 사랑하라는 계명인데, 그래서 이것은 계명 또는 명령이라기보다 호소입니다.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말은 정당하게 부르면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미천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나이다.”라고 프란치스코가 노래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옛날 우리가 예의를 굉장히 차릴 때 누가 아버지 이름을 물으면 ‘김현설씨입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김자 현자 설자입니다.’라고 답함과도 같지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이름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유한한 존재는 창세기에서 인간이 피조물의 이름을 붙여 주듯 다 이름이 있지만, 무한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이름 지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셋째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의 뜻이 무엇입니까?
탈출기의 말씀을 잘 새겨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나를 위한 안식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고, 이렇게 안식일을 지내는 것이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날이고, 하느님 사랑 안에 온전히 잠기는 날이며, 그래서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새로워지고 힘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십계명 가운데 대신 계명만 묵상하고, 대인 계명에 관한 묵상은 다음을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개의 화분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놓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곧 죽을 것 같던 거실의 화초가 거짓말처럼 생기를 찾았습니다.
저는 물 한 모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 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지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 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 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좋은 농부는 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해설해 주십니다.
길-교만, 돌밭-육욕, 가시밭-탐욕을 갈아엎은 좋은 땅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은 열매를 맺는 땅임은 어떻게 알까요?
좋은 땅은 곧 좋은 농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땅에 상관없이 씨를 뿌리고 있다면 좋은 땅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가 되게 하시려는 사람은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8-20)
주님께서 뿌려진 땅은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는 땅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땅 안에 그리스도께서 뿌려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이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큰 사랑의 실천은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가 복음을 전하는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예언자를 파견하실 때 하느님은 그에게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에제 3,3-4)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그 맛에 꿀처럼 답니다.
기쁨에 넘칩니다.
하지만 그것이 소화가 되면 배를 아프게 합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말씀도 들어봅시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묵시 10,10-11)
왜 말씀을 깨달으면 기쁘면서 동시에 배가 아플까요?
바로 그 말씀은 사랑인데 그 사랑의 기쁨을 나만 느끼는 것이 마음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녀는 굶고 있는데 어떤 부모가 꿀처럼 맛있는 것을 먹고 자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그래서 말씀을 다시 뿌리는 좋은 농부입니다.
그런데 착한 농부는 길과 돌밭과 가시밭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누가 나의 말을 무시하든 욕을 하든 공격하든 무조건 뿌립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는 더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밭이 무서워서 씨를 뿌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권한을 가진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는 지금은 목사님이 된 ‘고구마 전도왕’이라고 불리는 김기동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고구마 전도법으로 노상 전도로만 수천 명이 세례를 받게 한 인물입니다.
그도 아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목사님 설교할 때 중앙을 가로질러 예배를 방해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교회를 가지 못하게 차에 태우고 두 어린아이와 함께 스키 타러 가는 중 커다란 사고가 발생합니다.
자신도 많이 다쳤지만, 그는 모두가 무사하게 해 달라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했고 하느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그를 바로 노상 전교로 데려갔고, 그는 첫날 네 명에 실패하고 다섯 번째 사람에게 전교하게 됩니다.
기도 중 그는 고구마와 감자가 삶아지는 모습을 보고 젓가락으로 찔러보는 것처럼 선교하게 됩니다.
고구마가 무서워서 젓가락으로 찌르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분에게 정말로 그런 환시를 보여주셨다고 믿습니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도 맞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심지어 하느님을 손 위에 얹고 그분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사람을 보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좋은 밭에 떨어져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분은 모든 권능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김기동 목사는 자신이 아무 힘도 없을 때 자기 가족을 아무도 죽지 않게 해주신 그분이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믿기 때문에 전도할 때 힘들지 말라고 주님께서 씨앗이 뿌려질 대상을 고구마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좋은 농부는 땅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사람이 고구마로 보이지 않으면, 그냥 밭이나 길이나 자갈밭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 안에 권능의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은 광야에서 아무 먹을 것도 없이 버티실 수 있으셨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와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문을 두드립시다.
존 스타트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복음이 그 자체가 주장하는 대로 기쁜 소식이며 또한 우리를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 따로 삶 따로>
때로 동료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깊은 묵상과 숙고의 과정을 거친 형제들의 강론 말씀은 신비 체험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마치 말씀이 살아있는 존재처럼 뚜벅뚜벅 걸어서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말씀은 세파에 지친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반대로 그 말씀은 흐리멍텅하게 앉아있는 제 뒤통수를 철퇴처럼 후려치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은 시들시들 죽어가는 제게 생명수처럼 다가옵니다.
때로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게 저를 자극하고 저를 돌아보게 만들고,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은혜로운 말씀 앞에 우리가 보이는 태도나 반응은 영 시원찮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형제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 소중한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꼭 감고, 인상을 빡빡 쓰고, 마치 지옥 벌이라도 받고 있는 표정입니다.
어떤 분은 말씀 선포만 시작되면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주무십니다.
주님 말씀을 대하는 오늘 우리의 태도를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조금도 열지 않고 빗장을 딱 걸어놓고 있다면, 그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공허하게 울리는 꽹가리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메마르고 척박한 돌밭 같다면, 아무리 좋은 명강론이라 할지라도 말씀이 우리 내면 안으로 스며들 틈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주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루 거의 모든 시간을 성경과 말씀 안에서 살아갑니다.
휴대전화기는 거의 명강사들의 영성 강의 시청을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감동을 받고 박수를 치고, 울고 웃으며 강의를 듣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강의 따로 삶 따로입니다.
말씀 따로 생활 따로입니다.
매일 매 순간 좋은 말씀 속에 살아가지만, 구체적인 삶과는 유리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깊이 새겨듣지만, 세상과 시대의 아픔에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동료 인간의 고뇌와 슬픔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나 헌신은 조금도 없습니다.
말씀이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 말씀의 비유는 좋은 땅이 되어서 열매를 맺으라는 권고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을 차리라는 훈계입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땅’이 여러 종류로 구분되어 있는데, 심판 때에는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좋은 땅이거나 나쁜 땅이거나, 즉 열매를 맺거나 맺지 않거나...
여기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에는 구원을 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갈라질 뿐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들 가운데 몇 가지를 예로 든 것이고, 심판 때 그런 이유들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유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열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
(요한 15,1-6)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좋은 땅’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신앙인’입니다.
‘나쁜 땅’은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은 듣지 않고 세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거나,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거나, ‘말씀’을 실천하기는 하는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형식적인 실천으로 그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에게서 떨어져서 산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신앙생활이 될 수 없고, 그렇게 산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즉 구원받지 못합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첫째 종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고, 두 번째 종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는데, 주인은 그 두 사람을 ‘똑같이’ 칭찬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 25,21.23)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의 차이는, 즉 결과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맡긴 임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할 뿐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라는 열매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이 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주인은 그를 대단히 엄하게 꾸짖고, ‘밖으로’ 쫓아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마태 25,30)
쫓겨난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 근거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나쁜 땅’들을, ‘좋은 땅’이 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를 지은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그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그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 (루카 10,27)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죄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 죄입니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열매를 맺지 않는 나쁜 땅’입니다.
반면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실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좋은 땅, 좋은 수확의 사람이 됩시다 - 렉시오 디비나(성독)의 습관화>
어제 밤에 받은 카톡 메시지 행복의 비결 중 마지막 권고에 공감했습니다.
1.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2.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3. 노래하라, 아무도 듣지 않은 것처럼.
4.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고 노래하며 춤추며 살라는 현실적 지혜가 담겨 있는 사랑의 충고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날마다 시편성무일도를 바쳐도 참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70대 넘어서부터는 아침 산책 때 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옛 동요들을 힘차게 부르곤 합니다.
어제 준비했던 강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참행복, 참자유, 참평화, 참희망, 참기쁨에 웬만한 병은 다 낫는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뿐이다.”
오늘 강론의 결론과 같은 제목을 말씀드린다면, “누구나 좋은 땅. 좋은 수확의 사람이 될 수 있다-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자발적 선택과 훈련, 습관화와 더불어” 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삽니다.
비관적 부정적 인생관이 아니라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닐 때 누구나 좋은 땅, 좋은 수확의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 제가 요근래 참 많이 강조하는 좋은 덕목의 선택-훈련-습관화의 영적 삶의 도식입니다.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 나온 글이 좋았습니다.
메주고리에서 7.26-7.30일 까지 벌어지는 젊은이들 축제에 보낸 메시지 서두 말씀부터 은혜로웠습니다.
“하느님은 너희 각자를 위한 사랑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의 모든 신뢰를 그분의 은총에 놓으라.
하느님의 뜻은 참행복에로의 길이다.
사랑의 계획, 젊을 때 ‘예’하고 대답하라.
더좋은 세상을 위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응답하라.”
젊은이들뿐 아니라 모드 세대에 해당되는 격려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누구나에게 당신 사랑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좋은 땅, 좋은 수확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우의적 비유 해설은 예수님이 아닌 초대교회의 해석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나, 예수님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있다 생각됩니다.
네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만, 확정된 고정적 현실이 아니라 유동적인 가변적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아무리 옥토같은 마음밭도 방치하면 잡초들 우거진 박토로 변하지만, 박토같은 마음밭도 끊임없이, 한결같이 가꾸고 돌보는 수행의 선택, 훈련, 습관을 통해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화됩니다.
문제는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밭에 있습니다.
과연 내 삶의 성향은, 현 마음밭 상태는 넷 중 어디에 해당됩니까?
1. 길에 뿌려진 씨처럼, 말씀을 깨닫지 못해 즉시 악마가 가져가 버리는 상태가 있고,
2. 돌밭에 뿌려진 씨처럼,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박해에 곧 걸려 넘어지는 상태가 있고,
3.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처럼, 말씀을 들어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며 또 고정 확정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은 하느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입니다.
타고난 것들에 어리석게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하느님 말씀을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화하여, 즉 부단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수행으로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자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좋은 땅, 좋은 수확은 우리의 좋은 선택과 훈련, 습관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계명의 말씀들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데, 사람에 따라 어떤 이는 백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서른 배를 낸다.”
바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착실하고 항구한 수행자들이 그러합니다.
말씀을 1.경청하고, 2.묵상하고, 3.기도하고, 4.관상하고, 5.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습니다.
사랑의 십계명의 말씀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할 때 좋은 땅, 좋은 수확일 것입니다.
십계명의 실천 정도를 자체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10점 만점에 몇점쯤 되겠습니까?
1.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십계명의 준수는 인간관계에 지극히 기본적인 전제 필수 조건입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준 이 사랑의 십계명만 지켜도 좋은 신자입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의 준수만으로 착한 신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성인은 못됩니다.
십계명 준수는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다 예수님께서 주신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실천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완성이요, 거룩한 성인이 됩니다.
한 번 참행복의 진복팔단의 실천 정도를 해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8개 항목, 2점은 기본점수로 하고 10점 만점에 내 성덕 점수는 얼마쯤 되겠는지요?
1.행복하여라, 마음의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렇게 성덕의 삶을 산 이들에 대한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무엇보다 날마다 정성을 다해 바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좋은 땅, 좋은 수확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크루즈에는 승무원이 1,500명, 승객이 5,600명 정도 탑승합니다.
승무원도, 승객도 비록 탑승의 목적은 다르지만 도착지는 같습니다.
승무원은 직업으로 탑승하면서 승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탑승합니다.
승객들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인과 모처럼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탑승합니다.
비행기에는 여러 등급의 좌석이 있듯이 크루즈에도 여러 등급의 좌석이 있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등급을 정해 탑승하게 됩니다.
등급에 따라서 제공되는 음식과 편의시설이 차이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크루즈를 통해서 삶을 즐기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고급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시장에서 국밥을 먹는 것도 좋습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최상의 등급을 이용해도 그리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몸이 편하고 모처럼의 휴가에 마음까지 들떠있다면 어떤 등급이라고 해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저도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왼쪽 손목이 아프면서 눈은 경치를 보았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육체의 허기를 채울 수 있지만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는 광야라는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그것이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주어진 현실에 불평과 불만을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주어진 현실에 감사드리라고 합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변하지 않는 북극성과 같습니다.
십계명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고, 헛된 것을 섬기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많은 축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 근본정신은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길가의 밭과 같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자갈밭과 같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가시덤불과 같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크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의 밭이 좋은 땅과 같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크게 열매 맺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을까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마음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넘어서 참된 진리를 찾아 예수님을 찾았던 니코데모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도 십계명을 잘 지킨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과 그 가족들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며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한 마더 데레사 성녀와 그 가족들입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 하느님을 찬양하듯이 알려지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지키면서 마음의 밭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비행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다른 교통수단은 괜찮은데 유독 비행기 탈 때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비행 기간 내내 극심한 불안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갈 일이 있을 때, 배로 갈까도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행 공포로 인해 해외 나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주변에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이 공포증을 없앨 수 있는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을 확률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을 확률보다 낮아.”
친구의 이 말을 들은 이 형제는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제 비행공포증이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아쉽게도 아니었습니다.
비행공포증은 그대로 있고, 여기에 화장실 공포증까지 생겼습니다.
화장실 가는 일이 하늘을 나는 일만큼 무시무시해진 것입니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만드는 법입니다.
따라서 불안을 멈추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비행공포증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심호흡과 복식호흡, 그리고 사람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안하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본인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것은 모든 불안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잘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수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나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떤 마음에 떨어져야 할 것인지를 보라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깨닫지 못하는 길에 뿌려진 씨,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않는 돌밭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숨을 막아 버리는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이런 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씨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 부족한 자신을 노력으로 계속 변화시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걱정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뜻에 맞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기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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