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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5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집회 35,1-15
복 음 : 마르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기사입니다. 아래의 퀴즈를 한 번 맞춰보십시오.
“영국에서 가정집 생활용품의 위생 상태를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면봉으로 각 표면의 박테리아를 검출하는 방식이었다.
박테리아가 많이 나왔을 것 같은 순서대로 다음 용품을 나열해보자.”
보기: TV 리모컨, 주전자 손잡이, 화장실 변기, 주방 수도꼭지
저의 예상은 리모컨과 변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1등은 주방 수도꼭지였고, 그 뒤를 이어 주전자 손잡이,
TV 리모컨, 화장실 변기의 순서였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자동차 키, 컴퓨터 키보드, 마우스 등에서 많은 박테리아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연하게 깨끗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지.’라는 막연하게 잘살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죄’라는 나쁜 병균이 나를 뒤덮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깨끗한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니까 우리도 막연하게 좋아하는 것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재물의 유혹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재산까지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우리의 첫째 자리를 차지할 것이 많은데,
우리의 첫째 자리는 무조건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방해가 되거나 경건한 삶에 걸림돌이 되는 유혹이라면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즉, 육적인 일보다는 영적인 것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손해 보는 것 같은 일들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이득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막연한 생각들을 버리십시오. 주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자의 길이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떠나지 않고서는
만남도 없다.
버리지 않고서는
얻을 것도 없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향하여 있다.
새로운 삶은
신앙의 본질이다.
새로운 삶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애끓는 마음을
다시 만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
십자가의 기쁨과 영광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참된 기쁨이란
우리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기쁨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느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이며
참된 자유이다.
우리 생명이
거(居) 할 곳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생명의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들이다.
낙심과 절망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나눔이다.
하느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만으로
영원한 기쁨이 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하느님의 길을
만날 때이다.
꼴찌를 첫째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믿는
새로운 오늘이다.
믿음을 드리고
생명을 받는
감사의 오늘이다.
오늘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소중한 것들을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가?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를 비록 잘 모른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채 알지 모르면서도 매료당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면서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는 일은,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중심이요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께서 목숨을 버리시며 이루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것이 되어, 온전히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전부터 눈이 뻑뻑해지더니 자고 일어나면 충혈이 되었습니다.
인공눈물을 넣고, 안약을 넣었지만 여전히 불편하였습니다.
안과에 전화해서 예약을 잡고,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59년간 저를 위해서 눈은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영화를 볼 수 있었고,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고,
구름과 달 그리고 꽃과 나비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수고해준 눈을 위해서 감사의 표시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좀 들지라도 눈을 위해서 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자신을 돌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이 몸을 떠나면 그 많은 재물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정년퇴임하는 분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는 선물을 하였는데
본인을 위해서는 선물 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한
본인을 위해서 선물을 하나 하겠다고 마음먹었답니다.
혼자서는 가기가 머쓱해서 친구와 함께 갔고,
정년퇴임 선물로 작은 반지를 하나 골랐다고 합니다.
직장 생활이 바빠서 평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는데
본인의 영적인 선물로 평일미사에 참례하겠다고 하였답니다.
선물(膳物)은 좋은 뜻을 담아 주는 것입니다.
선물(present)은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길이 열립니다.
그러기에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가정의 달 5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웃과 본인을 위해서 정성어린 선물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에게 가난과 그로인한 고통이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척박하고, 소출이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부익부의 골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들 또한 그 선물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목적지가 다르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최선을 다해서 되돌아 와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가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앞서가던 일행이 되돌아오는 경우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뒤에 있던 사람이 첫째가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은 오르면 오를수록 위험하기 마련입니다.
그 탑의 정상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라야할 천국의 계단은 나눔의 계단이어야 합니다.
희생의 계단이어야 합니다. 선물을 주는 계단이어야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의 바벨탑은 무한 경쟁의 수레바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계단은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경쟁도 치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가지 못하는 계단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소유와 내어드림이 어떤 의미인지 숙고하게 도와주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예수님의 이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버림의 '지향점'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무언가를 봉헌하거나 나누거나 내어놓을 때 그것이 재물이든 자기 자신이든 시간이든
그 이유는 명백히 주님, 그리고 복음 때문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되받을 요량으로 계산해서 하는 행위나 짐짓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자기 영광이 목적이라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 별 소용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이어서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은 "박해"입니다.
소유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은 탐욕을 용인하고 과시에 열광하며
부의 축적에 면죄부를 남발하고 정당성까지 부여합니다.
철저히 물질적인 가치관에 찌든 세상은
욕망을 불의한 과정마저 허용되는 선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가난은 마치 절대 악처럼 혐오합니다.
물질이 정신과 영혼의 가치마저 장악해 버린, 가치 전도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서 자발적 버림과 비움, 떠남과 나눔이
이해받기 어려운 영성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일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시대와 지금이 이천 년의 간극을 지니고 있음에도
적용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당시의 박해는 매우 직접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 했지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인권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사회에서 박해는
은근한 조롱과 무시, 혐오와 차별, 소외와 낙인찍기 등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복음적으로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물살에 역행하는 고되고 험한 광야 길에 비길 수 있을 겁니다.
"영원한 생명"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건네시는 보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현세에서 되받으리라는 물질적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의 선물이지요.
어쩌면 원죄 이후 죽음을 제거 불가한 꼬리표로 달고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가장 위안이 되는 축복이 아닐까 합니다.
막막한 죽음 이후의 삶을 생명과 행복으로 보장해 주시니까요.
제1독서는 어떻게 내어드리고 비워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이 가득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집회 35,3)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집회 35,12)
주님은 물질의 양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지에 달렸지요.
오늘의 독서 대목에 머물다 보면
"기꺼이, 즐겁게, 기쁘게" 내어드리는 이의 마음을
주님도 기꺼워하시고 반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이든 능력이든 시간이든 존재 자체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사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채워 주신 것이지요.
이 선물이 우리 안에 고이고 쌓이면 물이 그러하듯 성품을 왜곡시키고 악취마저 풍겨
인간 본연의 선함을 훼손하게 됩니다.
물이 흘러흘러 땅을 적시고 생명을 싹 틔우듯,
주님께서 주신 것이 우리를 통해 제 길을 찾아 흘러나갈 때에야
비로소 유익이 되고 보물이 되어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까지 이끌어 주게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이 무엇이 아쉬우셔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목숨 바쳐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은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요.
주님은 가난한 이들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속되어 계십니다.
그분의 거처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비움과 나눔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실천하는
어떤 지고한 선택적 덕행이라기보다 주님과 함께 사는 이의 일상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미 벗님도 체험하고 계시겠지만, 비움과 나눔은 긍정적인 중독성이 있습니다.
실천한 만큼 기쁘고 행복하다보니, 자기 깜냥 안에서 더 바치고 싶어
'어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게 되지요.
이 선량한 중독은 더 깊은 영적 행복을 추구하게 해 준다는 차원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비움과 나눔의 행복은 물질과 소유와 과시가 절대 선인 것처럼 부추기는
세상의 교활한 목소리를 식별하게 해 줍니다.
물질과 소유와 과시의 끝은 결국 인간성 파괴임을 깨달았기에,
우리는 어둠으로 기울어져 가는 세상에서 미소하고 미약하나마
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주님과의 사랑을 지키고 복음을 살아가려고 투신하게 되지요.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 시기의 문을 닫고 일상에서 복음의 생명을 사는 연중 시기로 들어온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도전도 되고 위안도 됩니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복음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비운 만큼, 나눈 만큼이 영원한 생명으로 쌓여갈 것이니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버릴 수 없는 것은 즐길 수 없고, 즐길 수 없는 것은 잃게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부자가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더니 부자가 슬픈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정말 예수님 때문에 버리면 백배를 받게 될까요?
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과 재산을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많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버려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백배로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사제가 되면 정말 많은 가족과 재산과 명예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노력해서 그것을 쟁취하고 가져서 누리면 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스트레스 받는 것을 누릴 수 있을까요? 두려운 것을 즐길 수 있을까요?
EBS 포커스, ‘집착’에 여자 친구에게 집착해서 스토커가 되어버린 한 청년이 사례로 나옵니다.
처음 2년은 여자 친구와 좋았습니다.
막일해서 일 년에 버는 수백만 원을 다 여자 친구를 위해 썼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어서 여자 친구에게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메일과 문자를 보내고
여자 친구 SNS에 자신과 찍었던 사진을 올리며 나중엔 찾아가서 위협도 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신고해서 경찰서에 갔다가 결국엔 군대에 억지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군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빨리 제대를 할 수밖에 없고
지금도 여전히 여자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한 여자가 나왔는데 자신이 버는 모든 돈을 자기 외모를 가꾸는 데 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카지노에서 딜러가 되고 싶었는데 그냥 재미로 시험을 함께 치르러 간 친구는 붙고
자신은 떨어진 것이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 믿고 외모를 가꾸는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집착에 관한 사례를 예로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집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집착은 사랑받지 못해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
자신의 자존감을 되찾아 줄 어떤 것을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버릴 수 없는 것은 즐길 수 없습니다.
집착하는 것은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즐기지도 못하고 잃고 맙니다. 에밀레종과 같을 것입니다.
자꾸 종을 쳐서 망가질까 두려워 박물관에 가져다 놓았는데
종을 치지 않으니 진짜 종이 갈라져 더는 종을 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즐긴다는 것은 무엇이든 소진된다는 뜻입니다. 소진되어도 되는 것만 즐길 수 있습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떠나보낼 수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인도 마찬가지고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류시화 시인이 명상 센터에서 한 프랑스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일곱 살에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해서 마르타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습니다.
마르타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시아 문학을 전공해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부족함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서 일주일 동안 아일랜드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마르타는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또 누구도 그녀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떠나야 했고 자신의 외할머니가 그랬듯이 마르타의 어머니가 와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녀는 명상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돌연 자신을 떠남으로써 자기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에
그녀가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마르타란 자매는 왜 남편을 잃게 되었을까요? 남편을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고 싶어지면 동시에 잃게 될 두려움이 커집니다.
잃게 될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즐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즐길 수는 없고 두려움만 주는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있을까요?
자기 스스로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잃고 마는 것입니다.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즐기는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재물을 즐기지 못하면 결국 가진 것을 잃게 됩니다.
자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믿는 자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재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누리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누리려면 모든 것에서 가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집착하는 것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가난하도록 권고하시는 이유는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누릴 때는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의 100배를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이미 100배를 가진 것처럼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100배가 많아지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한 번에 다 잃습니다.
다만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삶을 누리십시오.
더 가지면 행복하겠다고 믿으면 그것도 잃게 되고 지금 가진 것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버려야 누릴 수 있습니다. 가지려 하는 것은 누릴 수 없습니다.
누릴 수 없는 것은 결국 잃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