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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을 맞추다
6.25 전쟁 중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졸업한 햇수가 67년인가, 8년인가가 흘렀었다. 초등학교 동기 모임이 고향 마을에서 있다며 연락이 왔다. ‘누구, 누구도 온다더라.’ 평생지기인 친구 Y는 나의 속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어 내게 그리운 이름을 들먹이며 유혹한다. 요즘에는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유혹의 말들에 예전처럼 마음이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머뭇머뭇 하고 있으니, 차표를 예약해야 하니 빨리 결정하라며 재촉이다. ‘그래 갈게.’ 얼떨결에 가겠다고 했다.
고향가는 기차는 무궁화호 완행열차이다. 예전에 칙칙푹푹 기차를 타고 함께 통학하였던 시절을 생각하니---,그때의 통학생 셋은 고향 가는 완행열차를 탔다. 우리는 대구에서 살고 있지만, 이 중의 한 친구는 만난 지가 5-6년이나 된 듯하다. 젊은 날에 단짝이 되어서 팔공산을 함께 올랐었던 친구인데, 만남이 뜸해진 건 순전히 세월이 흐른 탓이고, 나이 탓이다. 또 하나는 그 친구의 건강 탓이기도 하였다.
입담이 좋은 그 친구는 끊임없이 초등학교 동기들의 지난 이야기를 한다. 그들 중에는 나와도 친하게 지냈던 이름도 나온다. ‘**있잖아. 그 친구는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허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한다 더라.’ 어릴 때 나와도 자주 어울렸던 이름이다. 내가 공부하러 대구를 떠난 후로는 만남이 없었고,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는데, 부산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형편도 어려운데 교통사고로 몸까지 성치 못해서 ---.’
우리는 신나게 이 친구, 저 친구의 소식을 전하다가도 잠시 잠시 말을 꾾고 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 물보다도 풀과 나무로 뒤덮여서 푸른 풀색만이 시야를 메우고, 간간이 그 사이로 흐르는 물길 위로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금호강이, 기찻길을 따라 이어지고,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고향도 이런 풍경이다. 나는 방금 몸이 성치 않아 집에서 쉬고 있다는 친구를 생각하였다. 그의 집은 초갓집이었고, 썰렁해서 가난의 티가 줄줄이 베여 있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제재소를 운영하는 부자였다더라. 친구의 아버지가 우리 고을의 좌익세력의 우두머리였단다. 붙잡혀 처형당하고, 제재소도 뻬앗겼다더라.’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가 초등하교에 다닐 때의 제재소는 내가 늘 고맙게 생각하는 친구 S의 아버지가 소유하였다. 우리 고을 최고의 부자로, 정미소도 운영했다. 내 기억에 그네 집은 하루 종일 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우리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부잣집이었다. 그런데 제재소가 그 친구네 아버지의 소유였다고---. 나도 어렸을 때는 그 친구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이 친구는 워낙 입담이 좋아서 소문도 진짜처럼 들리게 하는 말재주가 있으므로,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았다. 혹시나 아버지가 좌익의 우두머리라서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 고을에 떠도는 말로는 제재소의 원래 주인은 형님네였는데, 형님이 돌아가시자 동생이 위탁받아 운영한다는 말은 있었다. 그 동생이 바로 S의 아버지시다. 내막이 어떠한지를 모르긴 해도 원래부터 소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향 모임에서 또 한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스님으로 출가했으나, 불교대학을 나온 후에는 결혼하여 법사가 되었다. 이 친구가 대구 2군 사령부의 군종 참모로 왔을 때 만났으니, 아마도 20 수년 전이라고 기억한다.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면, 그 날은 벚꽃이 만개한 달밤이었고, 2군 사령부의 군종참모가 거처하는 숙소는 연못을 끼고 있었다. 만개한 벚꽃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창 너머로 보이는 그 정경이 너무 멋 있었어, 지금도 나의 기억에 아름다운 풍경으로 머문다. 그 친구도 대구를 떠나자.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대구의 다른 친구들은 그의 법어를 들으려 법회도 참석하면서 더러 만났다고 하였으나, 나는 무슨 이유였는지 하여간에 만나지 못했다. 제대 후에 고향에서 사찰을 운영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부인이 아파서 절을 두고 떠나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친구도 온다고 하였다.
나는 허리를 다쳐서 집에 머문다는 친구가 마음에 걸렸다. 그의 아버지가 죄익세력의 우두머리였다고? 우리는 좌익이 설치던 시대를 잘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빨갱이 시대, 빨갱이 시대,’ 라면서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곤 하였으나. 내가 기억해둘 만큼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지금은 거의 잊고 지낸다. 고향 가는 차 안에서 친구가 이것저것 전해준 전쟁 전 시대의 이야기들이 새삼 어머니가 하던 말들을 생각나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면 골목길에 빨갱이들이 뛰어가는 발소리가 두두둑 했어. 그런 날은 문고리를 잡고 밤을 새웠어.”
“아침에 사립문을 열러 가면 삐라가 잔뜩 뿌려져 있더라.”
“너네 아버지는 하룻밤도 집에서 자지 못했어, 밤마다 잠을 자러 다른 집으로, 다른 집으로 옮겨 다녔으니까.”
“우리집 앞의 **어른 네 집은 빨갱이들이 불을 질렀어. 불 그림자가 우리집 창문에도 어른거렸어. 얼마나 무섭든지.”
불이 났다는 **어른네의 손녀도 이번 모임에 참석하러 서울서 온다고 하였다. 학교에 다닐 때 얼마나 새침뜨기였는지, 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할머니가 된 지금에사 모임에 참석한다면서 신나는 뉴스나 되는 듯이 전해주었다.
“00아제도 빨갱이 짓 하다가 부산으로 도망가셨잖아. 부산에서 지갯군 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더라. 공연히 쓸데없이 설치다가---. 조용히 농사나 지었으면 밥 굶지는 않았을텐데.”
어머니가 들려준 참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다. 그렇더라도 아득한 옛날 얘길일 뿐이다. 그런데도 지금 왜 그런 생각을 새삼 하는 것일까.
어머니의 말들이 계속하여 떠오른다.
“다음부터는 골목에서 빨갱이들이 우당탕하는 소리만 지르면, 배가 살살 아프면서 하장실에 가고 싶어지더라.”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나도 신경이 바싹 곤두서는 일이 있으면 배가 아프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 모전자전의 유전자 탓인가 보다. 역사도 유전자에 실린 듯이 세월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말할 때는 그냥 어머니의 이야기로만 들었으나, 친구가 하는 말들을 들으니, 그 시대가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로 들린다.
우리 동네에는 으시시한 골목길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으스름만 깔려도, 그길을 지나칠 때는 우다다닥 달음질을 했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나를 따라오는 발자국소리도 더 빨라졌다. 그곳은 젊은 순경이 빨갱이의 총에 맞아 죽은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산 아래 마을도 아닌데, 이처럼 소름을 돋게 하는 이야기들이 어렸을 때의 나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고향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가면서 들었던 이야기에서 친구가 ‘좌익’이라고 한 말이 이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려움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지금은 잊은 체 살고 있지만, 유년의 기억들에 붙어있는 그때의 일들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못하였나 보다. 아니 씻어지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해도 초등학교 시절의 나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달라붙어 있는 사람은 친구 S이다. 그는 나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의 방에 수북히 쌓여있던 문고판 세계 명작들이었다. 그는 나에게 그 책들을 순순히 빌려주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소설은 읽어보았다고 하는 것 중에는 이때 읽었던 문고판 책들도 많다. 더 부끄러운 일은 아예 책을 돌려주지 않은 것도 있었다. 막말로 하면 떼어 먹었다고 해야겠지. 그렇다고 나에게 책을 돌려달라고 독촉한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책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친구는 거의 4-50년 전에, 운영하던 사업들이 모두 부도가 나서 고향에서 야간도주를 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친구이다. 지금은 그를 거의 잊고 지낸다. 더 슬픈 일은 부도가 난 그 친구를 고향친구들이 동정은 커녕 하나같이 욕을 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치욕적인 욕설인 인간성을 들먹이면서, 인간성이 더러운 넘이라는 것이다. 내 기억 속의 그 친구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얼굴이 하얗고, 책을 잘 빌려 준 착한 아이였는데, 왜 인간성을 들먹이는 욕을 얻어먹는지, 도저히 퍼즐이 맞혀지지 않았다.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 일은 또 있었다. 우리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를 인간성을 들먹이며 욕하는 일은 청년기를 지날 때인 나중의 일이었다. 전후 사정을 들어보면 욕 얻어먹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보다 훨신 이전이었다. 하여간에 나로서는 초등학교 때의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기억의 내용들이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 갔다. 퍼즐을 아무리 맞물리게 하려 해도 물림의 이빨이 맞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전쟁 중에 입학하였으므로 늦게 취학하여 나이가 우리보다 서 너 살이 많은 반 아이들도 있었다. 반 아이들 중에 S 친구의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또는 약간 비틀어서 모욕적으로 부르면서 S를 놀렸다. 왜 아들을 놀리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일까.
이때 S의 아버지는 학교에, 또는 우리 고을의 복지를 위해서도 많은 돈을 기부하고, 희사하였다.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우리 고을의 숙원사업인 중학교도 건립하였다. 우리 초등학교에도 많은 설비를 해주었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친구의 아버지가 연설하는 일도 있었다, 아마도 학교에 많은 돈을 희사하여 감사장을 받는 행사장이었지 않았나 싶다. 우리 고을의 어느 분이 낸 책자에는 고을에서 영웅처럼 나타난 인물로 치켜세우면서 용비어천가를 쓴 글을 읽은 일도 있다. 내 생각에 그 글은 그분의 행적을 사실로 다루었지, 과장하거나, 억지로 추켜세우는 글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S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이런 말들이 우리의 교실 안에서 떠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 어른의 세계를 판단할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무슨 판단력을 가졌다고 어른들을 욕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XX는(S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술만 먹으면 ------, 어른들이 S의 아버지의 흉을 보느라 쑥덕거리던 말을 들은 기억은 있다.
열차는 고향 역에 우리를 내려주고 산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초등학교 적의 친구들은 식사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느라 왁자지껄했다. 식사가 끝나면 해마다 치루는 행사가 있다나. 노래방에서 흘러간 옛노래 부르기 시간이라고 하였다. 나는 노래라면 질색이다. 기회만 있으면 슬슬 꽁무니를 뻰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니 어슬렁거리면서 뒤따라 갔다.
법사 친구가 내 손을 끌면서 찻집에서 이야기를 좀 더 나누자고, 노래방에는 조금 천천히 들어가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래 맞다, 이 친구도 노래방하고는 거리가 먼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두어 명의 친구도 우리와 함께 찻집으로 갔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초등학교 적의 친구 이야기 이다, 더욱이 동기 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친구가 궁금하니 화제에 오른다. 그 중에 한 명은 ------, 아버지가 다리 아래에서 좌익분자들과 섞여 총살 당했다든데---, 나는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정보를 꺼내어서 물어 보았다. ‘그 친구는 사정이 좀 달라.’ 그 친구의 아버지는 정신병 환자였는데, 칼로 아버지를 난도질 하여. 그때는 경찰에서 적색분자의 검거를 할당지우면, 지서에서는 머리수를 채우려고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정신병자들을 잡아가서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잖아. 그 친구의 아버지도 그랬다고 들었어.
법사 친구가 말했다. 그때는 이쪽저쪽 따지기 전에 억울한 죽음도 많았을거야. 우리 아버지는 불자라고 좌익의 손에 돌아가졌잖아. 저네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목숨을 뻬았었잖아. 그래, 그때는 그랬다. 억울해도 하소할 곳도 없었고-------.
법사 친구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S 이야기를 꺼냈다.
“이 친구가 고향을 도망치듯이 뛰쳐나온 뒤에도 서울에서 나를 더러 만났어. 내 직업이 마음이 아픈 사람을 만나주는 일이잖아.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자기의 마음이 괴롤다는 것이 아니겠어. 나중에는 만나자는 연락도 하지 않더라마는, 고향에서는 욕을 많이 얻어먹었지만,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정이 가는 부분도 있더라. 이 친구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인간적인 아픔이 있었구나 싶더라.”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이 친구가 이곳에서 사라질 때, 아버지도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셨거든, 이곳 사람은 그 어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도 몰랐거든, 미국의 딸네 집으로 갔느니 하면서 말들이 많았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면서, 고향이라고 이곳에 장지를 잡았더라. 그때서야 한국에 계신 줄을 알았다고 하더라. 아들이 부도내고 도망갔는데, 어른까지 왜 꼬리를 감춘거지.”
범사 친구가 말했다.
“장지에 이곳 고향 사람은 한 사람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들었다. 인심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겠어. 아버지도 아들과 함게 자취를 감춘 이유가 아니겠어.”
“어른께서 인심을 잃었다고?”
나는 우리 고을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조금은 이외였다.
“S가 고향을 등진 것은 아버지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라.”
법사 친구는 내가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는 아리송한 말을 했다. 나는 S를 절대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때 빌린 책을 모두 돌려주지 못해 내가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친구가 아닌가. 전에 쓴 내 수필에서 어릴 때 그 친구를 통해 읽었던 수많은 책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여러번이나 말하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와 내가 걸어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지 않을 뿐, 아니 만나지지 않을 뿐 그 친구가 나빠서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같이 차를 마시던 친구가 입을 뗐다.
“자기로서는 그런 사연이 있겠지만, 고향 친구들에게는 욕을 엄청 얻어먹었다. 내 생각에도 욕 얻어먹을 짓을 했다고 생각해.”
“어쨌는데?”
“초등학교 동기들이 무슨 행사를 하면서 동기들에게 경비를 걷우러 다녔어. S, 이 친구는 우리 고을에서 갑부 중의 갑부니까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갔었는데, 칼로 무자르듯이 싹 거절하더라잖아. 그것도 내가 너희들과 무슨 인연이 있는데, 동기라는 핑계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더래.”
“좀 심하다. 동기들과는 미움이 쌓여 있더라도, 고향에서 사업을 하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거잖아.”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서 아버지를 들먹이며 S를 놀려대던 일들이 떠올랐다. 한 번은 질질 울면서 집으로 갔고, 누나가 손을 잡고 학교로 데리고 온 일도 생각났다.
“그 뿐만이 아니고, 사업을 키우면서 경주에서 제일 큰 제제소를 인수하여 옮겨 갔어. 동기회의 다른 집행부가 멋도 모르고 또 찾아갔더라나. 이때도 땡전 한 푼 찬조하지 않고, 찾아오지 말랬는데 왜 왔느냐며 창피를 주더라지 않아. 그래서 이 친구는 고향에서 ------”
나는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였다. 어쩌면 내가 변명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변명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것만이면 다행이게, 염장을 지를 일이 또 있어. 들려오는 말로는 경주의 권력자 가족을 자기가 모든 경비를 부담하여 휴가를 보내주었더라고 자랑하더라는 말도 들려오니까. 사업상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동기회 행사에 땡전 한 푼 내놓지 않으면서 그걸 고향 친구 앞에서 자랑이라고 늘어놓을 일이야. 우리 사이에는 ‘죽일 *, 살릴 * 하면서 분노의 욕말들이 들끓었어. 그리고는 멀어진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법사 친구가 거들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심사가 이해도 가지만, 이런 처신은 정말 잘못이라고 했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니까, 나중에는 나까지도 피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른이 우리 고을에서 얼마나 존경받은 분인데, 친구는 왜 그런 억하 심정이 생겼을까.”
“아니야, 그 어른께서 우리 쪽에만 돈을 많이 희사한게 아니고, 저쪽 진영에도 뒷 돈을 대었다고 하더라. 말하자면 양다리를 걸친거지.”
“그 시대에 ------.”
“화살을 피하려고 한 짓인데. 자기가 살아나려고 꼼수를 부린 짓이 아니었겠어.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인심을 얻을 수는 없잖아. 아버지께서는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한쪽만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거지.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겠지. 그렇게 해서인지 부자가 되어서 떵떵거리면 살았지만, 어디선가에는 욕하는 사람도 있었을거야.
“우익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이 아니고,”
“중심 역할을 했지. 그러니 많은 이득도 챙기고, 우리 고을의 최고 갑부가 된거지. 그러나 또다른 이야기도 있었다는거야. 그래서 이를 북북 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거지.”
“그랬었구나. 사람사는 일이란 복잡하구나.”
“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린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그 친구 아버지를 들먹이면 놀렸었겠어. 놀리는 아이는 자기집에서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욕설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무이 아니겠어.”
법사 친구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이제야 희미하나마 퍼즐의 한 조각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하여 법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지난 날을 뒤돌아 보았다. 그가 나를 가깝게 대해주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많은 책을 빌렸고, 그도 주저없이 책을 빌려주어서 아주 고마운 친구로, 더 나아가서 나와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구의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고서는 그와 나 사이가 멀어진 듯하다. 방학이 되어도 친구라며 만난 일이 거의 없었다. 만나지를 않으니까 책을 빌려보는 일도 없었다. 우리는 그가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할 실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도 이렇쿵저렇쿵 말들이 많았다. 의심하는 만큼이나, 그는 우리와 멀어졌고, 이것도 그가 고향을 외면하는대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고향 친구들과 그 친구와의 관계였다. 나는 의심보다는 이제는 가까운 친구 사이가 아니구나 라며 섭섭하게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느낀 것이 전부였지 상말을 할 만큼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는 간혹 마주치더라도 그냥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를 나쁘다고 원망해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내가 그에게 책을 빌리려고 고분고분해야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워할 일도, 그렇다고 고마워할 일도 없다 보니 그냥 무덤덤한 사이가 되었으리라.
내가 결혼하고 어머니를 뵈오려 고향에 들린 길에서 S를 만났다. 고향에 내려와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제재소를 맡아 운영한다고 하였다. 아내와 걸어가던 길이라서 악수를 하고서는 잠시 인사말을 나눈 것이 전부였다. 이 친구가 고향에 와 있구나 라고,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곧 고향의 친구들이 그에게 욕설을 퍼붓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초등학교 적의 친구가 누구일까. 뚜렷이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그만큼 나는 친구 사귀기에는 잼병이었다. 그래서 나의 어린시절은 동화와 만화책에 파묻혀서 지냈고, 내게 책을 빌려주었던 S를 많이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S와는 마을 친구들처럼 어울려서 뒹굴고 놀았던 기억은 거의 없다.
매일 어울려서 들녘으로 산으로 쏘다녔던 친구는 우리 마을에서 골목을 끼고 옹기종기 살았던 동네 친구이다. 그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만나지 않고 살고 있으니 어린시절 이후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 고을의 이름만 들어도 나는 가슴 속이 짠해진다. 초등학교 친구는 얼굴로서가 아니고 고향의 고을 이름이, 학교의 이름이 나를 불러내서 그들과 묶어주었다. S도 고향 친구를 멀리 한다더라도 우리 고을의 이름을 들으면 그리움의 문이 열리고 분명 향수는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리라 싶다.
그러나 법사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는 고향이라서 애정을 느낀 일은 한 번도 없었고, 어떻게 하면 고향을 떠날까 하는 생각만 하였다고 하더라 했다. 초등학교 때 겪었던 하나하나의 기억들이 모두 아픈 트라우마로 자기를 괴롭혔다고 하더란다.
법사 친구는 S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사업이 엄청 잘 되었다더라. 그래서 경주에서 제일 큰 제재소를 인수하여, 사무실을 경주로 옮겼고. 고향 마을에서 제재소를 운영할 때와, 경주 시내로 나와서 운영할 때는 경영 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 로비도 해야 하고, 권력층에 줄을 대야하고------, 그때는 그랬잖아.”
그 친구의 말이라면서 법사 친구가 전해주었다. 사실은 이때가 S의 입장에서는 최성기 였다. 죄고의 시절을 구가하다 보니 자기가 살아온 방식에 무한한 신뢰를 가졌다는 법사 친구의 말이지만, 이건 사실일 것이다. 그때는 사회가 얼마나 혼탁하였는가. 바로 이때. 고향의 학교 동기회는 행사를 앞두고 이 친구에게 찬조를 얻으려 찾아갔고, 찬조는 커녕 문전박대만 받고 쫓겨났다고 한다. 고향 친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욕하는 일도 나무랄 수 없으리라. 이런 일들이 소문이 되어서 내 귀에 까지 흘러왔다. 나도 모르게 S를 욕하는 고향 친구의 편에 기울어져 있었다. S가 몰랐던 사실 하나는,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면 아버지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과거사도 들먹여진다는 사실이다.
법사 친구는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 친구를 나쁘게 평가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 친구의 사정을 알고 나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많지만, 근본적으논 본인의 잘못이 많은거야. 라고 했다.
고향 친구들에 대한 악 감정으로 문전박대를 한 것은 이해해줄 수 있다 하더라도, 왜 바람을 피워서 요조숙녀같은 부인을 멀리하고, 마침내는 헤어지는거야. 이게 더 큰 나쁜 일이야, 지금 부인이 세 번 째야. 라며 법사 친구가 흥분해서 말했다. 돈을 믿고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도덕적 평가이지만 사생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도(修道)를 중시하는 법사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훨씬 더 나쁜 짓이라고 하였다. 세 번 째 부인이라는 말은 나는 처음 듣는 사실이다. 내가 생각한 어릴 때의 그가 아니었나 보다. 법사 친구가 보기에는 돈이라는 사이비 종교에 사로잡혀서 도덕을 개무시하는 이단자가 되어 있었나 보다.
“이곳에서 전성기를 구가할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는데, 왜 쓸데없이 낯선 곳에 가서 무리하게 투자하여 망했는데?”
이건 내가 늘 궁금하게 생각하던 일이었다. 고향에서 번창하던 사업체만 살뜰히 꾸렸다면 등 따습고, 배 부를텐데, 하는 것이------. 여기에는 세상을 소극적으로만 살아 온 나의 눈이 새상을 바라보는 소극적 시각이기도 할 것이다.
법사 친구가 그를 자주 만나 인간사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개인의 세세한 삶의 내막까지야 알 수 있을까? 그러나 법사 친구는 그의 말을 전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최고의 소망은 이곳 고향을 떠나는 것이라고 하더라. 자기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도망가는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곳의 재산을 새 사업에 몽땅 쏟아부었다고 하더라. 그의 말대로라면 무리하게 투자를 하였으리라고 추측이 되거던. 그렇지만 그때는 젊었고, 또 사업이 한참 잘 되던 때라서, 실패의 두려움이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더라.”
“거참, 이곳 사람들이 무슨 상처를 심하게 주었다고. 떠나려고 해, 나만 하더라도 고마운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사실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
이것이 법사 친구가 한 말이다. 더 이상은 법사 친구도 모를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사업체를 인수하였다면서, 우리 고을에서 신흥 제벌이 태어난다는 말도 있었다, 한다.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돈으로 덮으려는, 더 나아가서 복수의 마음으로 무리하게 투자한 것이 아닐까? 그의 사업이 왜 기울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부도를 막으려 동분서주한다는 소식이 이곳 대구까지 들려왔다. 그 친구는 고향 마을의 장터에서 작은 가게나 하는 친구가 아니고 우리 고장 출신 사람 모두에게 관심이 쏠릴 만큼 유명 사업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문대로라면 은행 빚이 쌓이자 그가 그렇게 싫어한다고 한 우리 고을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돈을 꾸었다고 하였다. 막상 어려움이 닥치니 그래도 손 벌릴 곳이 고향사람이더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업이 부도나자 소문도 없이 고향을 떠나버린 것이다. 바람에 실려 오는 풍문으로는 끼니도 어려울만큼 고생살이를 한다고 했다. 그런걸 보면 자기만 살려고 한 몫을 챙겨서 도망간 나쁜 사업주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구의 아버지마저도 고향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신 것이다. 내가 들은 말로는, 그 영감, 아들을 잘못 둔 탓에 늙으신 몸이 고생한다는 정도였다. 이들 가족이 어디에서 산다더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도망가서 잘 산다더라는 소문이 아니고, 무척 고생한다는 내용이어서, 측은한 마음을 자아내었다.
듣기 거북한 말이라면, 동기회에서 찬조를 받으려 갔을 때 푸대접받았다는 이야기쯤이라고 할까. 이렇게 망할 것을, 그때 좀 잘할 일이지, 라는 정도였다.
법사 친구가 덧붙인 말이라면 나중에는 자기도 만나지 않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이란 누구나 마음 속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지기 마련인데, 어느 하나에 너무 매달리는 일은 좋지 않다나. S는 집착하지 않아도 될 일에 너무 매달린 듯하다면서, 하기야 자기의 마음이 그쪽으로 쏠리면 걷잡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스려야지 했다.
마음을------,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내가 어릴 때는 소에게 풀을 뜯기러 자주 산마루에 오르곤 하였다. 우리 고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시골 동네는 조용했고, 집들 사이로 골목길은 구불구불했다. 시골 집의 담장 안에는 나무들이 서 있다. 산 아래 모습은 그림처럼 보일 뿐 사람의 말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 골목길에는 어머니가 문고리를 잡고 밤을 세우도록 한, 우두두둑하는 발자국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렸을 것이다. 내가 마을 동무네 집의 사립문에 붙어서서 **야! 하고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골목길을 따라 울려퍼졌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가라앉은 자리에 침묵만이 무겁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침묵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면서 온갖 세상사 일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덜컹거렸나 보다. 총소리도 났고, 집채가 불길에 휩싸이는 일도 있었던 곳이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갖 증오심이며, 죄책감까지도 골목길을 떠돌아 다녔었나 보다. 그렇더라로 시간은 뻗뻗하던 감정들을 소금물에 담궈 둔 배추잎처럼 숨을 죽여 준다. 산마루에서 바라본 마을은 조용한 그림으로만 보여졌다. 그런데도 아픈 감정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나 보다. 지금은 새삼 그때 일을 꺼내서 들먹이는 사람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동기와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나 숨 쉬고 있을 뿐이다.
고향 마을을 휘저었던 사건들도 세월에 묻혀 잊혀져 갔다. 그리고 S가 저지른 사건도 수 십 년이 흘렀다. 이제는 S가 고향을 온통 들썩이게 하였던 부도 사건들도 잊혀졌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때 주역의 역할을 하신 많은 분이 고인이 되었다. 우리의 기억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의 고향 마을에서는 잊어버린 과거사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S네 가족사도 세월에 떠내려 가버려서 흐릿한데도,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후대들이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기억이란 피해를 본 사람일수록 더 잘 보존한다지 않는가. 세월이 흐르면 기억이란 사실과 달라질 수 있으며, 얼마든지 과장되어 질 수도 있기 때문에, 거짓 사연인데도 공연히 가슴에 원망을 품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시간 속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소리도 없이 흐르기만 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픔도 슬픔도, 너무 많은 등등의 것들이 시간에 얹혀 흐르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나 보다. 지워졌으면 좋으련만, 지워지지 않으니------, 인간들의 세상 사는 일이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면서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가 보다. 과거는 오늘을 만드는 원인이 되고, 오늘은 또 먼 훗날에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되고 ------, 친구 S의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런 것을 인연의 끈이라 하는가란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동기로 대구에서 함께 살고 있는 평생지기 친구 Y가 전화했다. 고향일을 많이 맡아서 함으로 고향통으로 통하는 친구이다.
“S 소식을 들었데이. 거의 40년 만이네.”
“어디서 살고 있어.”
“서울은 아니고, 서울 부근인 것 같더라.”
“잘 살고 있고?”
“그게---, 얼마 전에 어른이 돌아가서서 장지를 고향 땅에 잡았더래. 그때서야 고향사람들이 그 어른이 한국에서 사신 줄을 알았다고 하더라. 고향 사람들이 장지에는 아무도 찾아가지는 않았다더라. 상주들도 쉬쉬 하면서 치룬 장례였고.”
“어렵게 살았구나.”
“몸도 성치 않다고 하더라.”
“------”
고향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는 줄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미움도, 고마움도 이제는 빛이 바래버린 역사 속의 한낱 누더기 조각이 되어버렸다는 뜻이 아닐까. 미움이 남아 있었더라면 장지에 찾아가 난리를 쳤을텐데. 그리고 존경하는 인물로 남았더라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냥 멍한 기분이었고, 그에 대해서 무엇이 알고 싶은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친구는 말했다. 서울의 지인을 통하면 전화번호는 알 수 있을거라고 했다.
“그러면, 네가 그 친구의 통장번호를 좀 알아봐라. 네가 금융관계 일을 하니 내 말을 하지 말고 생활비를 조금 보내주자. 내가 부담할게.”
“알았다.”
며칠 뒤에 전화가 왔다. 전화번호를 알아서 통화를 하였는데, 통장번호는 한사코 말하려 하지 않아서, 네 이름을 댔다. 그래도 우리들 중에 너와 제일 친했다 싶어서------. 그래도 통장 번호를 말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러면 내가 어릴 때 너한테 책을 많이 가져다 본 것이 고마워서라고 해봐라. 떼먹기도 했다고 해라. 그 덕에 내가 지금 글도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라.
며칠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그렇게 말했더니 한 1분 쯤 아무 말도 않고 있더니, 그렇다면, 하고 통장번호를 말해주더라.”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이번의 고향의 초등학교 동기회에서 만난 법사 친구는 S가 거동이 불편하여 휠 체어에 의지한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S의 불행을 두고 인간이란 자기의 마음이 자기를 다스려야 하는건데------, 불행한 삶의 고리를 자기가 끊어야 하는건데,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시간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역사를 만들면서 흐른다. 역사는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먼 훗날까지도 인간사에 이런저런 간섭을 한다. 사람에 따라 그 간섭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다를지라도. 자기의 마음도 어쩌지 못할 만큼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수도 있다. 나는 비록 퍼즐이 맞아지지 않더라도, 억지로 맞추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 퍼즐이 이제야 맞아지면서 세상사란 어떤 것인지를 흐릿하게나마 말해준다.
친구 S를 생각하면서 느낀 것은, 인간사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이리저리 묶여있다는 것이다. 끊고 싶어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 인연의 끈이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아득히 먼 날의 일들이 인연의 끈이 되어 나의 주변에서 흔적을 만들고 있듯이, S도 지금 우리에게 흔적을 남겨주어 그가 살아온 삶의 퍼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인연의 끈이 나를 옥죄오면,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내 마음이다. 나는 뒷날에 인연의 끈이 어떤 매듭을 지을지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