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생에게 인문학을 공부하라고 하면 취업 후에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선 취업 후 진학'을 우리 사회의 기본으로 바꿔가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을 책임진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발언이다.
이 얘기를 접하면서 `대한민국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인문학은 과연 뭘까?', `인문학은 어떤 학문이길래 취업을 한 후에나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라고 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전적으로 인문학은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인간 삶을 대상으로 인간다운 삶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학문인 것이다.
몇 년 전 국제 금융 통화 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가 혼돈 상태에 빠졌을 때가 있었다. 이때, 뉴욕의 월스트리트나 영국의 롬바드 거리에서 세계 통화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을 길러낸 아이비리그대학 교수들은 자신들이 잘못 가르쳤음을 반성했고, 그 잘못의 근원을 `인문학'의 부재에서 찾았다. 대학이 실용적인 학문을 강화하고, 제대로 된 인재 양성에 소홀하였음을 고백하면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 강좌를 늘리기로 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학에서 인문학은 찬밥 신세다. 더불어 살기보다는 경쟁을 배우는 공간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은 고사 직전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이 상아탑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노숙인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열고 있는 성프란시스대학은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대학과는 사뭇 다르다. 서울시의 위탁을 받아 성공회가 운영하는 곳으로 2005년 개교, 올해 10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혜택은 없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종이 졸업장이 전부다. 그럼에도 노숙인을 비롯한 일반인이 이 대학을 찾는다. 그 이유는 인문학 강좌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자활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성프란시스대학의 모델은 1995년 미국에서 얼 쇼리스가 만든 클레멘테 코스다. 그가 재소자를 대상으로 강의하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여자 재소자가 `가난하고 힘없는 아이들에게도 시내 중심가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 삶'에 대해 가르치면 그들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만들어진, 인문학을 배울 수 있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인문학을 배우게 된 사람들은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자신들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던 조건들에 대해 주먹이나 욕이 아니라 다르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운다. 인문학이 상아탑을 벗어나 거리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이 아닌 거리에서 사회적 소수자와 기업체 CEO와 임직원, 주부, 공직자, 국군장병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는 것을 보며 인문학이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이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이 직면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오히려 거리의 인문학을 활성화시켰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인 토대를 마련해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편견이나 관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차이와 다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임을 말하고 싶어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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