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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석 선생의 '宇宙 變化의 原理'에 대한 반론
한동석 선생의 ‘宇宙 變化의 原理’라는 책을 읽으면서 감탄스러운 내용도 많았지만 의외로 곳곳에서 반대 의견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반대 의견의 바탕에는 한동석 선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한의사이기도 했었던 한동석 선생에 비해서 저는 일정한 체계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입장에 있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요가나 카발라 혹은 영지주의, 동양의 철학, 서양의 심리학, 신화, 점성학, 심지어 종교적인 경험에 이르기까지 마다할 것이 없지요. 육체라는 제약 속에서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부터도 벗어나서 나를 포함한 전체에 대해서도 살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완전한 우주가 불완전한 소우주에 반영될 수만 있다면 굳이 나로부터 벗어나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주는 완전한 土化작용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해서 완전한 土化작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惡으로 물들어가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한동석 선생의 말은 무엇인가 불편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陽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陰이 자라나고 또한 陰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陽이 자라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는데, 어떻게 선(善)과 악(惡)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반합(正反合)의 원리에 의해서 발전하고 五運의 自化작용과 六氣의 對化작용에 의해서 우주가 운동하고 있는 것처럼, 저도 한동석 선생에게 반대함으로써 토론을 해보고자 합니다. 비록 제가 그의 권위에는 미치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저의 이성적인 반론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순전히 저의 자유로운 주장에 불과하며 여러분에게도 여전히 자유가 남아 있습니다. 마땅한 게시판을 찾지 못하겠어서 고전원리론으로 보고 이곳에 글을 남겨봅니다. 편의상 존댓말은 생략하겠습니다.
한동석 선생은 우주정신이 원래 완전무결하지만 지구가 23.5 도 기울어져 있어서 丑未辰戌의 四正位 운동을 할 수 없고, 인간의 육체가 너무 협착하고 군색해서 陰陽의 分合작용이 제대로 행해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로 인해서 우주 운동에 비하면 인간의 운동 작용의 기본인 土化작용이 훨씬 미약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의 본질은 생명과 정신(精神)인데 그것의 운동 무대인 육체가 너무 좁아서 土化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일견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우주 운동이 규칙적인 가운데 불규칙성이 있고 질서 속에 무질서가 있다고도 말했고 또한 우주의 운동이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의 운동과 같다고도 이야기했는데 인간의 육체가 과연 협소하다는 이유가 그리고 지구의 축이 기울어져 있다는 이유가 불완전한 土化작용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소우주인 인간이 제한적인 그런 여건들 때문에 모순과 대립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유로 인간은 불완전한 정신과 이성으로 제한된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연계는 인과율에 따라서 변화하는 반면에 정신계는 목적율에 의해서 변화한다고 말한 칸트의 주장에 한동석 선생은 동의했다. 공정하고 무목적의 우주와는 달리 정욕과 탐욕이라는 욕심을 상대로 항상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실상은 모두 그러한 인간이라는 생리체에서 일어나는 변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陰陽의 호근(互根)관계로써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생리적인 조건이 불완전해서 결과적으로 精神과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비록 지구가 기울어져 있어서 불균형하게 되었지만 그것 속에 나름의 균형이 있고, 氣立之物이거나 神機之物인 인간이든 상관없이 애초에 불균형하지 않고 완전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지구가 기울어진 것과 인간의 군색한 육체가 불완전한 土化작용의 원인이 될 수가 있을까?
우주와 인간은 감리운동(坎離運動)에서 일어나는 精과 神을 자기 내부에 받아들여서 土를 自化하는 신기(神機)를 이루어서 精神을 생성할 수 있지만 금수초목과 같은 기립지물(氣立之物)은 율려(律呂)의 量이 너무 작기 때문에 自存활동 즉, 自己土를 생산할 수가 없고 外氣의 작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精神이 없다고 말했다. 과연 율려의 量이 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만약 量이 그 기준이 된다면, 우주에 비해서 혹은 은하계에 비해서, 지구에 비해서 인간은 거의 0.00000000001 에도 미칠 수 없는 量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우주와 대우주라는 가정 하에서 상응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量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속에 상응하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카발라의 가장 기초적 전제이다. 다이온 포춘도 모든 세피로트가 신성하다고 이야기했고 심지어 가장 밀도가 높고 낮은 차원의 말쿠트가 찬란히 빛나는 궁전이라고 불린다. 사해를 제외한 어느 바다에서 바닷물을 맛봐도 3.5%의 염도만큼 짜다. 그런데 어떻게 氣立之物인 식물과 돌들, 이 어머니인 지구가 의식이 없고 土化작용을 할 수 없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우주 간의 萬物은 五行氣 중에서 하나의 기운을 대표적으로 타고 나는데, 인간은 그 중에서도 土氣를 주체로 태어났고, 土라는 것은 분산된 陽을 통일해서 精神을 만드는 중매자이기 때문에, 土를 주체로 태어나지 못한 氣立之物은 자기의 精神을 만들 수 없고 外氣에 생명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기 저항력이자 생성력인 運을 가지지 못한 氣立之物은 六氣에 의해서 생사가 좌우된다. 土의 작용은 소우주의 자율운동인 運을 조절하여서 생명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주와 인간, 物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고로 우주나 사람처럼 자율적인 土를 머리로 하고 動하는 것만이 運인 바의 생명력과 精神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굳이 구분하자면 유물론적인 정신관이다.
精神과 육체를 互根관계로 하나로 묶고 시작하는 그 전제에는 태생적인 문제가 있다. 인간의 정신이 몸에게 종속되고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가정은, 精神 이외의 인식 주체에 대한 가정을 무시하게 만든다. 실제로 인간의 육체나 뇌, 마음과는 별개의 어떤 인식 주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精神의 정의는 육체로부터 혹은 육체에 의해서 파생된 무엇이다. 즉, 지구 위의 모든 생물체는 지구(土)라고 하는 근거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동석 선생이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다양한 문화권에서 귀신(鬼神), 영(Spirit), 혼(Soul), 영혼(Psyche), 자아(Self), 바(Ba)라고 하는 육체와는 별개의 관념들이 존재해왔다. 이집트인은 인간의 영혼이 카(ka), 아크(akh), 바(ba)로 구성되어있다고 믿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ba)는 ‘새’의 상형문자로 표현되었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영혼을 새로 표현되어왔다. 비록 인간의 영혼(정신)이 육체와 지구적인 영향들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이 하나로 묶여 있거나 양면인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한동석 선생의 精神과 靈魂의 관념은 다르다. 이것은 특히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시키는 작업이 당연시하는 요가나 카발라에서 더욱 보편적인 관념이다. 아마도 아스트랄 투사나 차크라 명상 혹은 자각몽이 좀 더 와 닿을 것이다. 굳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려고 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 속박시켜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것은 비록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지만 점점 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자신의 선택일 뿐인데, 그것이 외부적 요건 때문이라 치부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뉴에이지에서는 이 지구가 감옥 행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달이 지구에 비해서 너무 거대한 위성이어서, 달이 부정성과 불균형한 영향력을 끊임없이 지구에 주어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본적인 토대는 바로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인간 외부의 영향력에서 초래된다는 것인데 사실상 한동석 선생의 불완전한 토화작용이 인간의 정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주장과 같은 관점에 있다.
精神에 대한 한동석 선생의 근본적인 인식은, 精神이 물질과 전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물질의 변화 과정 중에서 파생된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마치 우주를 본체와 작용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로 묶여 있듯이, 精神과 물질을 하나로 보고 묶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精神이 물질 그 자체와도 같고 그 둘은 불가분의 호근(互根)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물질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물질에서 정신의 기원을 유도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精神論에서 精은 陰에서 生하는 것이고 神은 陽에서 生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坎의 통일작용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精이고 離의 분열작용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神이라고 정의했다. 그런 이유로 인간 정신을 坎精離神, 月精日神, 水精火神이라고 했다. 이렇게 日月이 發한 精과 神이 土를 발생시키고 土가 통일을 매개함으로써 합덕(自化)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의 精神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情神이 자동적이며 규칙적인 운동체에서 일어나는 영원성의 요인이라고 했다. 한동석 선생은 여기에서의 精神을 나(自我)라고도 말했지만, 이 인식의 주체이며 자동적인 주체로서의 무엇에 대한 정의가 빠져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자아(self)라는 개념과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지성체(Intelligence) 혹은 지성(Nous)이란 관념이 영혼을 초월한 인식의 주체를 정의하고 있으며, 요가에서도 감각과 지성을 초월한 순수 의식인 푸루샤의 관념이 존재한다. 물질의 변화 과정이 정신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은, 마치 전기가 흘러서 전자기장이 형성되는 것과 같지만 그것이 고유한 의식을 갖는 것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자아(Ego)라는 것이 精과 神이 일체를 이룬 무엇이 아니라 그 육체와 분리될 수 있다는 가정은 한동석 선생의 모든 정신론을 뒤집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죄악은 그의 선택일 뿐이고 그것이 우주와 인간의 土化작용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게 된다.
만약 인간 뿐 아니라 지구 위의 산들과 바다 그리고 한 송이 꽃과 나무와 돌들 그리고 지구를 비롯한 행성과 별들, 은하, 우주가 고유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土化작용과 무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물질과 精神이 互根 관계에 있고 土化작용의 산물일 뿐이고 그 土化작용도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이 최초의 善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가정은, 애초부터 이 지구와 우주에 그리고 그것 안에 존재하는 미물들 속에 자유 의지를 가진 의식이 없다는 가정을 시작부터 논외로 만드는 것과 같다. 어쩌면 논증이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기 위함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가장 중요한 의식의 주체를 무시한 채로 변화의 과정에만 몰두하게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자동성(자유의지)과 죄에 대한 문제는 미제로 남았다. 사(史)는 모르겠지만 무(巫)라면 산과 강과 바다, 지구, 별들의 혹은 한 포기 풀과 한 줄기 바람에도 혼(魂)이 담겨 있으며 그 향을 맡을 수 있다. 물론 그들에게 약간의 제약은 있지만 자유 의지가 있다. 土化작용은 단순히 일반적인 사람들의 감각에서 느낄 수 있는 무엇에 대한 설명에 필요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각과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동석 선생은 인과율이 '시간적인 계승(繼承)의 일반적인 필연성'이라고 말했고 목적율을 '시간적인 계승의 이율적인 우연성'이라고 말했다. 그 둘은 별개가 아닌 전일(全一) 개념으로 보았는데, 자연계는 인과율에 의해서 움직이는 반면에, 인간들은 목적율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인간 또한 인과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창조는 無極에서 太極을 거쳐서 陰陽 작용이 일어남으로써 현실계의 모순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無極은 形이 아니라 象으로, 이 象이란 것은 청탁(淸濁)이 化合한 비청비탁(非淸非濁)의 중성적 존재였고, 그것이 시간적인 계(繼)의 작용에서 승(承)의 작용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일반적인 작용이 그의 필연성에 의해서 형체를 이룰 수 있는 원질(素質)을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象에서 有가 창조된다. 그러나 象을 연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먼저 數와 卦의 象을 관찰하는 법을 공부해야 하는데, 數란 계산을 위해서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낸 무엇이 아니라 數 자체가 진리이며 철학이다. 즉, 만물은 본질대로 象이 나타나고 象에는 반드시 그 내용인 바의 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數의 관념에서 五運과 六氣의 운동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數가 象의 내용물이 아니며 體와 用이, 氣와 形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하나를 이루고 있는 무엇인 것도 아니다. 數는 象이 실현되는 과정 중에서 고정된 무엇이 되기 위한 제한이자 조건일 뿐이지 여전히 핵심적 의미인 象은 별개로 존재한다. 만약 사물 자체의 象으로부터 만물의 본질(의미)을 찾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數를 象의 내용(의미)이란 관점에서 象을 찾으면 數라는 미로 속에 갇히게 될 수도 있다. 數는 시공간에 매이게 되는 순간 주어지는 일종의 필연적인 제약이자 조건일 뿐이다. 물론 그 속에도 象이 투영되긴 하겠지만 그 외에도 象이 투영되어 있는 수많은 도구들을 놓치거나 경시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도구들이 수보다 훨씬 유동적이고 자유롭다. 그래서 다면적이고 변동적인 의미를 도외시하고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들에 길들여질 것이다. 우주는 무엇이든 한 가지 수단과 방향만을 준비해두지 않았다. 만약 진리가 있다면 아마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인과율과 목적율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시간(數)이라는 제약 안에서 그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첫댓글 현존하는 우주변화의 원리는 제가 아는 정보상 진정한 한동석 선생의 완전한 저작이 아니고 제자에 의해서 일부가 변형되어 출판되었고(현재 생존해 있고 서울 모처에서 고령의 나이에도 한의원 운영중) 이후 행림서원을 거쳐 증산교로 판권이 넘어가면서 일부 내용상 보이지 않게 첨삭이 가해졌읍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전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제가 편견이 있어서 주저했다고 말했었습니다
책 내용 상에 있어서도 精과 神에 대해서
비록 미묘하지만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구요
재미있는 것은 서양 철학은 자아에 대한 탐구가
우주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는 반면에
동양 철학은 자아를 허상으로 여기는지
우주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자아(Ego)가 허상이라 해도
우주와 너와 나, 우리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그 주체에 대한 인식이 책에 없다는 것이
저는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 인식이 모든 것의 시작인데 말이지요
한동석 선생이 붙힌 책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그 정도 포부는 있어야지요
@周易人 서양철학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Ego)로부터 시작해서 우주로 인식을 넓혀가기 때문에 '나란 무엇인가'라는 명제가 늘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동석 선생은 나라는 주제나 영적 체험에 의해서 혹은 이성적으로 추론되거나 종교적으로 가정할 수 있을 법한 신비주의적인 전제나 개념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靈과 魂이라는 개념에 대한 묘사 없이, 그저 精과 氣와 神만 설명하면서 그것도 겨우 土化작용의 부산물이라고 규정합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누가 '이 바보야'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입과 혀, 성대, 호흡 그리고 '이 바보야' 라는 단어와 소리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 것과 같지요. 그것은 그 말의 주체를 빠트린 것이지요
네 알고 계시다니 다행한 것이지요
너무 字句 해석에만 억매여 죽을듯이 싸우는 것을 보면 안 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리섞었던 젊은 날의 저를 보는 것같은 착각도 들곤해서 댓글을 달지 않는 원칙을 세웠습니다만 주역인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에 주제넘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이해한 내용을 간결하게 기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웹툰 이나 만화가 재미있고 인기가 있는것이
이유가 있는것같습니다
이 글은 책의 내용을 요약한 글이 아닙니다
보기에 중언 부언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있어야만 비판의 근거가 됩니다
이미 앞전에 주요 부분들은 글로 썼었고
지금의 글은 두 번째 읽으면서
기존에 쌓여있던 반발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간결한 것을 왜 원하시는지는 제가 모르겠으나
제가 쓴 글과 주장이 복잡하다고 느끼면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저는 간결함보다 정확성과 근거를 중시해서
기존의 한동석 선생의 책 내용도 적었습니다
이 글들이 복잡하다면 한동석 선생의 책을
읽기는 거의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만...
웹툰이야 소일거리로 보기야 좋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은 재미를 위한 글이 아닙니다
현재 사정방에 있는 자오묘유는 지장간의 강도라고 할까요, 힘이라고 할까요 이게 30[화는 20]이고 진술축미는 18이죠. 그러니 토화 작용이 부족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한동석선생은 불합리 등등으로표현했고 만약 지축이 정립되면 동양학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는 이 정도로 지축의 경사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사리 제가 생각하는 토화작용은 인간을 안정화하고 보듬고 회복시키는 것인데 '왜 그 토화작용이 부족하거나 인간의 정신을 악하게 물들인다고 하는가'가 제 반론의 요지입니다.즉, 인간이 神機之物인데도 토화작용이 불완전하다는 주장 자체에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인간의 육체는 그 수명이나 토화작용이 그 자체로 충분하지는 않을까요. 인간의 수명보다 짧은 수명이든 더 장수하는 생명체(예를 들어 거북이)이든 상관없이 즉, 수명이 그것의 완전함(是非)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키가 크고 작고가 선악의 기준이 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즉, 인간의 그릇이 작아서 토화작용이 불완전하다는 가정이 모순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나요?
제목을 일부분이라고 하셔요
제목만 보면 전체라고 오해합니다
제가 글 제목을 붙이기를
한동석 선생의 책에 대한 반론이라고 했지요
말씀하시는 요지를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일부분이든 전체든 간에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시면 되지
제 글에 무슨 어거지를 부리십니까?
저는 반대하는 것에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는 행동은
반대가 아니라 어거지에 가깝습니다
적당히 하셔야지 보기에 흉합니다
지축이 정립되면 자연의 변화는 음양오행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지축의 경사로 인한 오운육기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그만큼 영향이 큰 것이고 복잡하게 보이지만 한 페이지에 불과한 주역의 하도낙서를 이해하면 음양오행, 오운육기, 체와용, 생수 성수, 음은 음방에서 순행/ 양방에서 역행하고 양은 양방에서 순행, 음방에서 역행한다는 내용 모두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혹시 지축이 기울어진 것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며 기울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지구에 생명체가 만발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불균형 속에서도 균형이 있게 된 것은 아닐까요? 즉, 모든 것이 보기 좋게 똑바로 서있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축이 기울어져 있는 덕분에 오히려 불균형 속에 균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지축이 기울어져서 이 모든 문제와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아서요. 특히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서 결과적으로 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자신의 선택인 죄가 이겨내야 하는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썩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누군가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즉, 기본 전제로 삼고 있는 그 명제를 왜 의심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축이 기울어진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이며 인간이 분명히 스스로 토화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해놓고 왜 인간의 육체가 협소해서 그 토화작용이 우주와 같이 제대로 행해질 수 없어서 인간의 모든 부조리가 생겨났다고 하는 말에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즉, 저는 우주의 토화작용과 神機之物인 인간과 氣立之物의 토화작용이 서로 다르다는 그 가정에도 반대하고 싶습니다. 지축이 기울어져있다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인지도 의심이 듭니다.
저의 의견은 제 자신이 만든게 아니고 주역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에 쓴 것입니다. 그 내용은 1-10까지의 상수를 통해 증명해 놓았습니다. 짐작으로 쓴게 아니고 수치화 해 놓았기 때문에 틀릴수가 없습니다. 만약 상수가 틀리다면 주역, 명리학, 한의학 모두 다 틀리게 됩니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모든게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지축의 영향으로 삼천양지가 등장하고, 주역의 낙서와 오운육기가 등장했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아시면 의문은 사라지게 될 겁니다.
말씀하시는 그것을 제가 원글의 가장 아랫부분인 數 개념에 말했습니다
뒷부분을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제가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말해 준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부분을
같이 한번 의심해보고 따져보자는 취지입니다
동지 세수설도 사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되짚어 보는 의미가 크지요
저는 수(數)의 개념이 우주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집착함으로써
그 이외의 다른 가능성과 다른 관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취지를 말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은 정론으로 이미 자리잡아서
누구도 의심 없이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이지요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신이라고 믿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