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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꼬리표를 평등의 깃발로
"참 많은 사람들에 기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차별은 사람을 밀어내며 기댈 수 없게 만듭니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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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사람들에 기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차별은 사람을 밀어내며 기댈 수 없게 만듭니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민주광장에서 몇 명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서서라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모인 이유는, 함께 기대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난 8월 25일 광주 금남로 5.18 민주광장 한 가운데, 서울 국회 앞에서 출발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전국순회 평등버스'가 도착했을 때 광장에 울려 퍼진 목소리를 떠올린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수도권의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집과 사무실만 오가는 요즘, 나 역시 평등버스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과의 기억에 기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평등을 열망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다짐, 그리고 차별금지법을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그 힘으로 평등을 유예시키고 있는 국회의 담장을 넘겠다는 다짐, 8월 17일부터 서울 국회 앞에서 출발해 2주 동안 26개 도시를 순회하며 2000킬로미터를 달린 평등버스는 그런 다짐을 영역과 지역을 가로질러 '우리 모두의 약속'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국순회의 여독을 채 풀기도 전,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교계 일부의 우려'를 감안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논의해나가자며 다짐도 약속도 회피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혐오와 회피가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공론장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 '평등의 수난사'가 우리를 덮친다. 그럴 때일수록 차별과 불평등을 지나쳐버리지 않고 변화시키고자 해왔던 시간을 떠올리는 힘이 필요하다.
차별의 함께 맞서는 지역 네트워크
평등버스가 지나온 많은 지역들은 한국사회에서 반차별에 맞서온 경험들이 어이진 '평등 정류장'이다. 그 기반에는 각 지역에서 벌어진 인권 관련 조례나 퀴어문화축제에서 벌어지는 혐오 대응 활동의 시간들이 쌓여 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제정된 광주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사유 중 '성적 지향'을 삭제하려는 집단의 움직임이 가시화된 2016년, 광주에서는 '광주혐오문화대응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지역 내 혐오문화 대응과 퀴어문화축제 지원,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지속해왔다. 광주뿐만 아니라 대구, 부산, 울산, 전북, 충남, 충북, 수원·경기, 인천 등 지역 차별금지법제정연대나 반차별 운동 단위들이 만들어지고 활동해온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반차별 운동의 주체가 지역 내에서 활발하게 구성되어 온 흐름이다. 이러한 지역 반차별 운동들이 연결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각 지역에서 평등과 인권을 가로막는 세력이 '동성애 반대'를 주장하는 보수개신교 세력과 동일해서만은 아니다. 2017년 촛불 이후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소수자의 이름으로 다시 쓰겠다고 선언하며 재출범한 것과 마찬가지로,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은 '소수자 운동'만의 과제라는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권리와 존엄이 삭제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평등과 인권의 가치가 지켜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등 소수자 집단의 권리는 삭제되어도 괜찮은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기도 하다. '소수자'로 호명되는 당사자 운동에 힘을 보태는 연대를 넘어, 소수자를 배제하는 차별적인 구조에 함께 맞서 싸우겠다는 연대의 확장은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또한 평등버스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함께 요구하면서 반차별 운동의 기틀을 26개 도시로 더욱 넓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2018년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와 평등행진, 지역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네트워크로 만나지 못했던 강원과 여수 지역과의 만남, 지역 내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이제 막 구성되기 시작한 대전과 제주까지. 평등버스를 기점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연대는 지역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만난 지역 반차별 활동을 거점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이어나갈 힘을 만들 수 있었다.
권리를 외칠 수 있는 근거
울산은 2017년 우신고의 학생인권침해 고발로부터 시작된 '학생인권조례안'부터 2018년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진흥 조례안'과 '학교민주시민교육 진흥 조례안', 그리고 '청소년의회 구성 및 운영 조례안'까지 모두 4개의 청소년 인권 조례들이 가로막히고 유예되어 온 지역이다. 8월 20일 울산에 평등버스가 도착한 날, 간담회에는 20여개가 넘는 단체들이 모여 평등버스 기획단마저 깜짝 놀라게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사회적 의제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지금, 울산 지역 활동가들은 2020년 하반기에 다시 조례 제정 운동을 해나가려 준비하고 있다.
물론 각 지역의 학생인권조례가 청소년들의 권리를 자동으로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절로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_차별금지법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와 함께 평등버스에 자신의 사연을 보내준 서울 거주 청소년의 이야기는 왜 우리가 법과 제도를 통해 평등을 요구하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저희가 학교에 요구하고, 싸울 수 있었던 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힘이 정말 컸던 것 같아요. 제도적으로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장치가 있으니까요. 제도가 우리를 미약하게나마 보호해 준다는 감각을 그때 처음 느껴보았어요. 만약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그때의 저희가 더 강하게 보호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차별금지법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법 조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강력한 힘이자 방패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위 사연처럼 학생인권조례는 교내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기독교 동아리의 캠페인은 허가하면서 청소년 인권을 말하는 인권동아리의 캠페인은 금지시킨 학교를 상대로 '조목조목' 맞서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제시해준다. 그 근거를 통해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학생인권조례는 성소수자 학생이 자기 스스로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성소수자 학생이 학교 내 성소수자 차별을 문제제기하고 맞서 싸우려고 할 때 자신을 드러내고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준다. 나아가 차별과 배제의 경험은 결코 익숙해져서도, 당연해져서도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권리'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게 한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삶의 공간, 그래서 권리가 필요한 공간은 비단 학교라는 교육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용과 재화·용역 서비스, 행정 서비스 등 차별금지법이 규율하는 공적 영역은 바로 이러한 권리가 부정당하지 않아야 할 공간을 더 넓게 제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권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통해서 모이고 조직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관계
"저는 서울이 아닌 비수도권 지역 출신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동시에 저는 성소수자이고, HIV 감염인 당사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경멸스러운 존재로 그려지는 저는 오랜 시간동안 차별을 받아 왔습니다. 혐오와 차별을 받기도 전에 스스로 위축되어 있습니다. 저 스스로 저를 숨기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목소리를 저는 내고 싶습니다. 제가 잘못된 존재, 부정당하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국을 순회한 평등버스가 다시 서울 국회 앞에 도착한 날, 기자회견에서 기획단 한 명은 커밍아웃을 했다. 부산에서 다시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은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 찾아간 무지개버스를 기억하며 2020년 평등버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호모새끼를 욕으로 쓰던 '군필남성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주신 분들"이라는 환영의 말은 커밍아웃한 그에게 또 다른 용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등버스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꼬리표'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평택에서 만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는 일상 호칭에서도 차별의 구조를 본다. '누구누구씨'라고 불리는 정규직과 다르게 '야'라고 불리는 사람은 비정규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산다. 수원에 사는 취업준비생은 알바를 구하기만 해도 가방에 달려 있는 무지개 뱃지를 떼는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취직을 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퀴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불이익을 받을까 두렵기도 하다. 창원에 사는 성소수자는 유치원 교사가 꿈이지만 성소수자가 '아이를 해치는 성범죄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꿈조차 쉽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는 그 존재 자체로 낙인이 된다. 거제도에 사는 여성은 '무거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채용 성차별과 모욕을 경험했고, 여수에 사는 40대 비혼 여성은 "언제 결혼 하냐, 그러다 아이도 못 낳는다, 재취업하기에 나이가 많다"는 말에 둘러싸인 채로 살아왔다. 나이나 외모로 인해 '여자답지 못한 여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가 자신에게 붙여준 꼬리표를 통해 왜 '자신'에게 차별금지법이 필요한지를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특정한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차별의 구조를 말하기도 한다. '야'로 분류되는 비정규직 내부에도 내국인과 외국인, 남성과 여성 노동자를 가르는 위계와 차별이 있고, 노동시장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차별을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서로의 권리와 존엄을 지켜줄 수 있는 동료로 옆에 서고자 다짐하기도 한다. 여수에 사는 40대 비혼 여성은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회재 의원에게 투표했다. 하지만 김회재 의원이 성소수자 혐오를 선동해온 보수기독교 집단과 함께 차별금지법 반대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의원이 자신을 대변해 줄 거라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표한 사람들의 요구를 저버리지 말라고 나서주었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중요한 반차별 운동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당한 사람들이 있을 때 이러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말하고 존엄을 선언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반차별 운동의 관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 왔기 때문이다. 평등버스는 '법적 권리를 보장받고 이를 확대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수는 있지만, '법적 권리에만 만족하는 것'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될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반차별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운동의 조직과 연대가 계속 이어질 때,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정류장도 통과할 수 있다.
서로를 알아보는 자부심으로
만약 평등버스가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왜 차별금지법이 필요한지를 말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자격을 요구하며 차등적인 지위를 배분하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누구도 평등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권리를 배제당한 사람들과 함께 차별적인 구조를 바꾸어가고 싶은 사람들 또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우리가 가진 꼬리표가 스스로의 탓이나 책임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서로의 존엄을 지키며 함께 싸울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평등버스는 바로 이렇게 서로를 지켜주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차별금지법을 성소수자에 대한 특권과 특혜로 호도하는 반대 집단, 차별금지법을 성소수자와 보수개신교의 대립 혹은 갈등으로 보도하는 언론, 차별금지법이 '성적 지향'을 포함하고 있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국회를 넘어설 것이다.
2주 내내 평등버스에 함께 했던 동료의 말처럼, 우리가 '권리'를 모두의 이름으로 다시 쓸 때 성소수자라서, 장애인이라서, 빈곤해서, 이주민이라서, 청소년이라서, 비정규직이라서 우리를 차별했던 꼬리표는 반대로 서로를 알아보는 자부심이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의 꼬리표를 평등의 깃발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주고, 우리는 동료시민으로서 서로에게 기대며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평등을 향한 저항과 싸움을 혼자가 아닌 결집된 힘으로서 이루어나갈 수 있다. 평등버스의 경험이 2020년 하반기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비춰준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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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와인드≫ 지극히 상냥한 불편함
[씨네리와인드|한유리 리뷰어]동양인 여성인 나는 분명한 캐릭터가 있다. 난 영화를 좋아하고 사교적이며 운동은 싫어한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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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여성인 나는 분명한 캐릭터가 있다. 난 영화를 좋아하고 사교적이며 운동은 싫어한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 속 대다수의 동양인 여성 캐릭터들은 화려한 중국무술의 대가이거나 공부만 하는 모범생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평범한 동양인 여자 캐릭터는 영화에 나올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그들의 카테고리 안에는 ‘평범한 동양인 여자’가 없는 것일까? 인종과 젠더문제는 할리우드의 영화 속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들을 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Political Correctness] 줄여서 [PC]로 불리며 번역하면 [정치적 올바름]으로 해석된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본래 차별적인 언어적 표현이나 관습을 지향하자는 운동, 또는 신념을 말하며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영화계에서는 인종이나 젠더, 장애 등에 차별 없이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통한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크게 대두되진 않았지만 할리우드에선 인종차별이나 젠더불균형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는 배우나 감독들의 운동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 '셀마' 텍스트 스틸 © 찬란 |
대표적인 예시로 2015년 흑인 투쟁을 다룬 영화인 <셀마(2014)>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고 오스카 시상식 후보의 대부분을 백인이 차지한 것을 비판하여 #OscarsSoWhite 운동이 벌어지며 흑인 배우들이 보이콧을 선언한 사례가 있다. (실제 2012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아카데미 시상식의 투표권을 가진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94%가 백인, 77%가 남성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평균 연령은 62세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발표했었다.)하지만 2016년에도 아카데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OscarsSoWhite 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우리나라의 배우와 감독을 비롯한 다인종의 아카데미 회원을 추가하였으며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흑인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문라이트(2017)>에게 수여하는 변화를 주었다. 이후 아카데미 시상식 사상 최초로 한국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는 등 인종 차별문제에 대응하는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인종에 대한 변화가 비교적 혁신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비해 젠더불균형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성 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사례는 2010년에 영화 <허트로커(2008)>의 ‘캐스린 비글로’감독 뿐이며 총 92회에 달하는 아카데미 시상식 중 여성 감독들은 5차례 밖에 로미네이트 되지 못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84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옌틀(1983)>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이후 여성감독이 수상한 사례는 전무하다. 이에 미국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여성감독의 이름이 적힌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섰으며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201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자리의 모든 여성들을 기립시키며 할리우드에서의 여성의 파워를 보여준 일이 있다.
위에서 사례로 든 미국을 대표하는 시상식인 아카데미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의 인종차별과 젠더 불균형의 문제는 시상식 운영의 문제로 볼 수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 영화 산업 자체의 문제로 바라볼 수도 있다. 실제로 원작의 동양인 캐릭터를 영화로 제작할 때 백인으로 캐스팅하는 ‘화이트 워싱’ 사례도 빈번하며 유색인종을 가진 배우들이 그렇지 않은 배우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임금을 받는다는 고발도 이어졌다. 또한 여성배우들이 남성배우들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은 물론 할리우드의 대다수의 영화들이 남성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받는 배역과 분량 또한 현저히 적고 여성감독이 연출을 맡을 기회도 많지 않다, 즉, 배우나 감독들의 역량 부족이 아닌 영화를 만들고 출연할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Political Correctness]를 실천하기위해 영화제작자들은 수많은 고민 끝에 새로운 형태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에 다인종의 배우를 출연시키고 여성주연의 영화들을 제작하며 영화 내의 소수자의 비율을 늘리는 형태로 [Political Correctness]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하다.
분명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여러 불평등은 존재했고 이를 해소시키는 방안으로 등장한 영화에게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 것일까?
<토이스토리(2019)>, <겨울왕국(2019)>, <알라딘(2019)> 등의 큰 성공으로 젠더와 인종차별 문제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사 [월트 디즈니]가 2019년 <인어공주>의 실사의 주인공으로 흑인 가수인 ‘할리베일리’를 캐스팅한 것에 많은 팬들은 분노했다. 그 분노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흑인을 영화에 캐스팅했다는 이유에서 온 분노였을까? 이런 분노에 디즈니는 "'인어공주'의 원작자는 덴마크인이다. '애리얼'은 인어다. 애리얼은 전 세계 바닷 속 왕국에 살고, 어디에서든 합법적으로 수영할 수 있다", "덴마크인이 흑인일 수 있기 때문에, 덴마크 인어들도 흑인일 수 있다." 라고 대변했다. 이는 자신들의 캐스팅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문제로 인해 불만을 제기한다고 생각하는 디즈니에 시각에서 비롯된 답변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 '닥터 스트레인지'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화이트워싱’은 원작의 인종과는 상관없이 백인을 캐스팅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는 많은 영화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일이었고 더 과거엔 아예 동양인의 역할을 외국 배우가 분장하여 연기하는 등 현대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었다. 이런 일들은 지나친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적인 작품 제작, 그리고 원작 캐릭터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비난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캐스팅 사례는 이 사례가 반대로 이루어졌다. 이를 ‘화이트워싱’의 반댓말 ‘블랙워싱’이라고 부르며 이 사례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과연 <인어공주>의 캐스팅에서 일어난 팬들의 분노를 단순히 인종차별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원작 캐릭터에 대한 이해 부족과 PC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지워버릴 수 없다.
여성 서사를 다룬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국내외에 여성들의 인권을 강조하는 훌륭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고 있지만 그에 반대되는 핑크 워싱 영화들도 상당하다. 이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지만 페미니즘을 강조한 마케팅으로 여성 관객들을 사로잡아 이익을 취하는 태도를 말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스트 버스터즈(2016)>가 있다. 과거 4명의 남성 캐릭터 주연이었던 영화를 여성 캐릭터로 교체하고 페미니즘을 내세워 마케팅한 이 영화는 남성을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획일화된 시각으로 다뤘으며 주연이 되는 여성 캐릭터들 또한 몰개성이며 지난 시즌의 캐릭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입체적이고 강인하며 유머를 갖춘 여성 영화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영화의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1990년에 제작한 전작보다 떨어진다는 혹평을 받았으며 오는 2021년 주인공들의 성별을 다양화한 영화가 제작됨에 따라 이 영화는 페미니즘의 잘못된 활용으로 남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남성 주연인 영화를 여성 주연인 영화로 제작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에 따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없이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페미니즘을 활용한다면 관객에 입장에선 이런 영화들을 상업적으로 오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그로 인해 좋은 영화들이 빛을 못 보게 될 것이기에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제작에 엄청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사업이다. 과거 ‘화이트워싱’ 사태에 있어서 영화 제작자들은 ‘투자를 받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답했다. 그렇다. 인지도가 높은 배우를 캐스팅한다면 영화의 흥행은 조금 더 쉬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최근의 과도한 [Political Correctness]사례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PC는 이제 돈이 된다. 마블의 <블랙팬서(2018)>가 그랬고 <캡틴마블(2019)>이 그랬듯이 엄청난 완성도와 스토리로 만들지 않더라도 PC함이 녹아져있는 작품들은 높은 평가를 받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과거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면 코어 팬들로 인해서 흥행을 했던 것처럼 이제는 [Political Correctness]가 이슈가 되고 돈이 되는 것이다.
PC한 색깔이 들어가는 작품의 자체가 문제가 되거나 감독이나 배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Political Correctness]에 동조하게 되는 현상을 이용한 과도한 전시적인 사용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게 진심으로 소수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의 사용 인지,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돈과 이슈몰이를 위한 쇼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타인들보다 도덕적 우월함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마케팅인지, 소비자로서 우리는 제대로 파악하고 영화를 소비해야한다.
[Political Correctness]는 예의와 매너를 기반으로 한다. 좋은 예시로 감독의 첫 작품을 여성을 성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처녀작’이라고 불렀으나 ‘첫 작품’으로 고쳐 사용하게 된 것, 과거 이주민들에 의해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비하적인 호칭을 얻게 된 원주민들의 호칭을 각 부족에 맞게 고치는 것은 PC의 아주 건강한 사례이다. 이처럼 소수자를 향한 편견어린 표현을 지향하자는 말은 상당히 상냥하게 들린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냥한 [Political Correctness]는 자칫 잘못하면 표현의 자유를 해칠 수도 혹은 역차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영화 속에서의 악역을 떠올려보자. 최근에 본 영화들의 악역은 아마 대부분이 ‘백인 남성’일 것이다. 물론 아닌 영화들도 많겠지만 대다수의 악역이 그렇다. 특히나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영화일수록 그 비율은 더 커진다. 대체 왜일까?
▲ '다크 나이트'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 (주)해리슨앤컴퍼니 |
인류의 역사를 따져봤을 때 편견이나 차별적 시선에서 가장 거리가 멀었던 인물은 백인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악인을 묘사할 때 특정 인종이나 젠더를 차별하지 않으려 가장 불편함이 적은 인물인 백인 남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타 인종에 대한 불쾌감을 줄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종의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악역 캐릭터 설정에 대한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이는 표현의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영화를 소비하는 소비자에 입장에선 새로운 캐릭터를 가진 다양성 있는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길 바라나 인종에 따라서 역할이 제한된다면 영화 캐릭터 표현의 한계도 여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고 차별적인 이야기들에 귀가 기울여 진다면 우리의 시각은 과거보다 조금은 더 진보되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과거의 영화들이 조금은 불편하고 모든 인종의 우의에 백인이 있다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성향들이 거북하며 다양한 젠더의 정체성을 희롱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과거가 부끄럽다면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 더 도덕적으로 성숙해졌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영화는 지금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예술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평등이라면 영화는 그것을 반영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이 불편함은 왜일까? 2020년 5월, 바다건너 대한민국에 까지 날아온 미국의 이슈는 처절한 인종 차별의 현실을 보여준다. 죄 없는 평범한 시민은 경찰에게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분노했으며 그 분노는 또 다른 소수자에게 번지며 참혹한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여성 혐오와 아직까지도 만연한 여성 차별, N번방을 비롯한 여러 범죄에 희생양으로 남아지는 수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도 쉼 없이 들려오고 있으며 검색어에는 매일같이 성범죄 이슈가 오르내려진다.
이것은 현재 영화를 포함한 대중매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현상은 영화 속에서는 [Political Correctness]가 추구되며 사람들에게 우리는 평등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과거와는 다르다고, 우리는 과거에 비해 도덕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다는 반증이다. 영화와 현실의 간극이 크다는 것이다.
분명 영화 속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위치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점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스크린에 내보여지고 있으니 우리는 착각한다. 굉장히 평등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는 잔인한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굉장히 불편하다. 현실은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면서 미디어에 비춰지는 내용들은 과거보다 굉장히 진보된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에 이 간극은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라는 말에 의심을 품게 한다. 인종차별과 젠더 문제가 벌어진 것은 그것에 대한 영화가 제작되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다. 대중 예술은 자꾸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지금 우리가 바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진짜 우리는 평등을 원하고 평등한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다룰 작품과 관객의 성숙한 시각이 진정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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