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언어가 그리는 여행 스케치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나 홀로 여행.. 등등에서 소개하는 그의 여행기는 탁월하다.
그리스의 섬, 와인의 성지 토스카나, 미식가들의 새로운 낙원 포틀랜드,
광활한 자연 속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핀란드와 아이슬란드,
재즈 선율이 가득한 뉴욕의 밤과 근대문학의 흔적을 간직한 일본 구마모토까지,
그의 여행기에는 전 세계의 매혹적인 여행지에 대한 하루키식 리뷰가 담겨있다.
윤성원 역/ 문학사상 / 2004년
1985년부터 2015년까지 하루키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의 섬세한 관찰력으로 여행지의 특성과 문화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어 친절한 여행가이드의 역할도 겸한다.
각각의 여행 목적에 맞는 레스토랑과 클럽을 추천하기도 하고,
장맛비에도 꿋꿋하게 구마모토의 관광 명소를 돌며 착실한 리뷰를 남기기도 했다.
아내 무라카미 요코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포함한 스물다섯 장의 사진들을 곁들여 독자들에게 여행지에
직접 가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달한다.
여행지에서의 하루키
생각컨대, 풍족한 물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행위란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가 아닐까. (...)
가만히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오랫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을 때 느끼는 감정과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 _「찰스 강변의 오솔길」(보스턴1)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너른 대지와, 거의 영원에 가닿을 듯한 정적과,
깊은 바다 내음과, 거칠 것 없는 지표면을 휩쓰는 바람과,
그곳에 흐르는 독특한 시간성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다.
(....) 카메라 렌즈로 도려내버리면,
혹은 과학적인 색채의 조합으로 번역해버리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되리라.
그곳에 있던 마음 같은 것이 거의 사라져버리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오래 제 눈으로 바라보고, 뇌리 깊숙이 새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덧없는 기억의 서랍에 담아 직접 어딘가로 옮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_‘푸른 이끼와 온천이 있는 곳’(아이슬란드)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 나무망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이 이십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을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 ‘노르웨이의 숲’ 집필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삼십대 중반의 작가였다.
일단은 ‘젊은 작가’ 축에 속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젊은 작가’ 같은 기분이 들지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시간이 흘렀고, 당연히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 흐름은 어떻게 해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등대 앞 풀밭에 앉아 주위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나 자신의 마음은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_‘그리운 두 섬에서’(미코노스 섬?스페체스 섬)
그건 그렇고, 세계 어디를 가나 출판사 사람을 만나서 “요즘 경기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아, 장사가 너무 잘 돼서 큰일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어본 예가 없다.
보통 다들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말이죠, 책이 잘 안 팔려서...” 하는 푸념을 쏟아낼 뿐이다.
핀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자력발전이나 지구온난화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닐지언정 해가 갈수록 책이 안 팔리는 현상 또한
세계적인 고민거리인 것 같다.
흠, 책을 안 읽는 우리의 지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_‘시벨리우스와 카우리스매키를 찾아서’(핀란드)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_‘거대한 메콩 강가에서’(라오스 루앙프라방)
메콩강에서의 하루키
뉴욕에 가거나 도쿄에 머물 때는 나 역시 곧잘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마신다. (...)
그런데 보스턴에 있을 때만은 항상 다리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던킨 도너츠 로고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 베어 물고, 신문을 펼쳐 어젯밤의 경기 결과를 확인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곳은 보스턴이고, 던킨 도너츠는 ‘보스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보스턴다운 마음가짐)’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_「야구와 고래와 도넛」(보스턴2)
어디서나 성이 보이는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근사한 일일 것이다.
카프카의 ‘성’처럼 ‘눈에 보이지만 다다를 수 없는’ 곳도 아니고.
참고로 구마모토 시 ‘성 주위에는 성벽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라는 조례가 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야자나무보다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조례와 비슷하다.
앞으로도 ‘성곽도시’의 느긋한 시간성과 분위기를 잃지 않고 지켜나가기를 여행자로서 바라게 된다. _
소세키에서 구마몬까지’(일본 구마모토) <참고 : 인터넷 교보문고>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
프로 여행자 겸 소설가가 이국의 풍경에서 엮어낸 여행 에세이들,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는 즐거움이라면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그의 평소 생활과 인간적인 면모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의 리듬을 잃지 않는 그는 보스턴에서 스타벅스 대신 던킨 도너츠에 가서 모닝커피를 마신다.
핀란드 출판사 직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전 세계적으로 책 판매량이 줄어드는 현실을 걱정하며,
애교 많은 그리스의 길고양이에 푹 빠져 한나절을 보낸다.
하루키 자신을 비롯한 아마추어 러너들의 축제인 보스턴 마라톤,
삼십대 후반의 어느 날 ‘먼 북소리’에 이끌려 떠났던 그리스 미코노스 섬,
재즈 매니아라면 누구나 꿈꾸는 뉴욕의 전설적인 재즈 클럽 ‘빌리지 뱅가드’ 등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장소들이 등장해 반가움을 더한다.
그는 1980년대부터 여행기, 혹은 해외 체류기로 분류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여행의 기록을 담아낸 책들에서 자유롭고도 느긋한 성향의 소설가가 여행자로,
또한 생활인으로 직접 보고 느낀 풍경과 사유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읽다보면 ‘기행문의 고수’로 불리는 프로 여행자인 그만의 감성과 유머가 가득한 여정에 동참해보고 싶어진다.
소설을 비롯한 그의 여행 에세이들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2010년 이후로는 해마다 노벨 문학상의 수상 후보로도 주목받고 있다.
창작 뿐 아니라 레이먼드 카버, 제롬 샐린저와 같은 영어권 작가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