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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사역과 자유민의 반응 6:8~10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이 고소당함 6:11~15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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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자유민 중 어떤 이들이 그와 논쟁합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내지 못하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증언합니다. 이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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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사역과 자유민의 반응 6:8~10
초대교회의 일곱 일꾼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특히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합니다. 기적은 선지자의 표식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는 ‘사도들’이 기사와 표적을 행했는데(5:12~16), 이제 사도가 아닌 사람도 기사와 표적을 행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편화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사역에 대해 적대적인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자유민들’이 스데반과 논쟁합니다. 그들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포로 또는 종이었다가 자유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지혜로 말하는 스데반을 논쟁으로 당해 내지 못합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힘 있게 전하는 생명의 말씀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스데반의 권능 있는 사역을 보고 자유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이들에 맞서는 힘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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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고소당함 6:11~15
자유민들은 사람들을 매수해 스데반에게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해 스데반을 공회에 끌고 갑니다. 공회는 유대 사회의 최고 법정으로, 그들 가운데 일어나는 각종 사안을 판결했습니다. 자유민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고 증언하게 합니다(13절). 이는 ‘모세(율법)와 하나님(성전)’을 모독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11절). 공회원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위기에서도 그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스데반과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그의 사역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 더 깊은 묵상
자유민들이 스데반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는 어떻게 드러나나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살기 원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입술에 지혜가, 삶에 능력이 드러나게 하소서. 거짓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영광을 비추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36 환난과 핍박 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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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듣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복을 소유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과 고통이 올 때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얼굴 속에서 그리스도의 기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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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고, 회당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즉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당할 자가 없자, 그들은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거짓으로 증거하여 스데반을 잡아 공회에 넘겨주었습니다.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보았을 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그의 경건에 대한 놀라운 증거입니다(15).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집사의 얼굴이며, 직분자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이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자 교회는 더 큰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사도들의 문제 해결 방식은 단지 실용주의적인 것이나, 임시방편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찾았고, 지혜롭게 해결해갔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영적인 조건에 의해 집사로 세웠습니다.
집사들이 말씀과 기도 사역과 구분되는,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하면서도 스데반의 사역은 집사들이 사도들과 같은 복음전도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직분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직분자는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경험, 직종에 따르지 않습니다. 성령에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직분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 교회의 역량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는 어떠할까요? 직분이 섬기고 헌신하며 충성하는 일이 아니라, 명예직이 되어가고, 고위직이 되어가고, 사고파는 일이 되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직분의 회복에 교회의 존립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연약함으로 교회는 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사도들이 보여주었듯이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살피고 해결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또한 목회의 본질인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주의 종들이 많아지게 하시며,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직분자를 통하여 무너지고 더럽혀진 교회의 직분이 거룩한 직분으로 회복되게 하셔서, 주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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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8,9절 구제 활동을 위해 선출된 스데반의 사역은 단지 구제에만 머물지 않고 강력한 복음증거 사역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그는 본토 유대인에게만 전도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중심이 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문화 가정과 유학생, 외국인 근로자 등 이 땅에 온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봅시다.
10~15절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은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사람들을 매수하고 선동하여 스데반을 모함하고 거짓 증인까지 세웁니다. 그런 무례한 공격 앞에서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로 의연하게 대응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고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의 의연함이고, 당당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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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성령의 권능을 충만하게 하셔서 놀라운 기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세상 집권자들과 대적자들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사도들도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 헬라파 유대인 집사까지 큰 권능을 행하여 많은 백성들이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능력으로는 안 되니 말로라도 스데반을 이기려고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말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탁월한 언변과 지혜를 주셔서 논쟁에서도 넉넉히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자, 집권자들은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매수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스데반은 궁지에 몰렸고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제 영락없이 그들이 법과 권력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니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분노로 붉었고 거짓으로 검고 어두워져 영락없이 패배자의 얼굴이었지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처럼 밝게 빛나니 분명 승리자의 얼굴이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
우리는 주 안에서 세상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그러나 이 빛은 우리 스스로 빛나는 빛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얼굴로부터 비추는 빛입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1:16)
주께서 우리에게 빛 비추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엡5:14)
그러므로 우리가 소리쳐 찬양하며 주의 얼굴 빛 안에서 승리의 걸음으로 다니기 원합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시89:15)
또한 우리 안에 계신 빛을 세상에 비추기 원합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 안에 계신 주의 교훈의 빛을 빛나게 하기 원합니다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2:10)
결국에는 주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의 빛이 해와 같이 빛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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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곳에는 복음의 놀라운 전파와 성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7절) 가장 강력한 성장의 힘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한 개인의 삶이 능력의 삶을 소유하기 위하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속에 넘칠때 가능합니다.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당시에 완고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제사장들을 돌이키게 할 수 있는 힘도 바로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말씀은 심령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묵상하기
내 삶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가?
2.은혜와 권능의 사람
새롭게 선출된 일곱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은 말씀의 지혜가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10절)
오늘 스데반은 자신을 어렵게 하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항상 스데반과 같이 말씀의 권능과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말씀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3.눈 먼 사람들
스데반의 말을 듣고 잘못된 계략을 꾸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1절)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죄인으로 몰아서 그를 재판정에 세우게 됩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게 방해 합니다. 사단의 노예가 된 그들은 스데반을 미워하게 되고 그 미움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믿음으로 바로 행할 때에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미움으로 죄를 지은 이들과 같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겸손함을 가지고 사는가?
(예화) 범죄를 영속화시키는 시기심
우리는 시기심의 충동에 의해 그의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서 시기심을 발견한다.
우리는 또한 시기심으로 인해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해 동안 음모를 꾸민 사울의 음울한 복수의 정신 속에서도 시기심을 발견한다.
우리는 또한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살인을 한 이스라엘의 왕에게서도 시기심을 발견한다. 그렇다. 시기심은 지옥에서 계획되었거나 지상에서 행해진 가장 악랄한 범죄를 영속화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태양도 보기를 거절하고, 자연도 바위를 쪼갬으로써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했다.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서 기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시기심으로 인해 우리 주님을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J.A. 제임스]
자신들의 지식이 스데반에 영성에 의해 압도 당하자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그를 음해하고 종교 권세자들에게 체포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온갖 거짓으로 그를 몰아세우고 마치 자신들의 실존과 율법을 망가뜨리려는 위협적 존재로 매도하려 했지만 스데반의 얼굴은 성령 충만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말씀의 힘과 성령의 권능은 세상의 권력과 죄악이 삼킬 수 없었고 그가 누리는 생명과 평강은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비침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쉽게 넘어지고 세상의 위협에 두려워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자녀에게 허락된 온전한 영적 상속을 날마다 받고 누리며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참 증인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지체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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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에 내부적인 문제가 있을 때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구제하는 일을 하게하고, 사도들은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전하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되어 제자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곱 집사 가운데 스데반에 관한 말씀입니다.
행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행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셨다고 합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을 사도들도 그대로 행했습니다.
행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여기서 보면 사도들을 통해서도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스데반을 통해서도 큰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테반은 늦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또 스데반은 사도도 아닙니다. 또 구제하는 일을 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테반을 통해서도 사도들과 같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신앙에 있어서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얼마나 오래 예수를 믿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볼 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행했고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행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사도들의 설교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행7장에 보면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그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행전을 볼 때마다 가장 성령 충만한 사람이 스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처럼 하루에 수천 명을 믿게 하지는 않았지만,
말씀과 인격에 있어서 스데반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얼마나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하고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나는 교회에서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이 자리만이라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데반이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지만, 스데반과 논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여기서 보시면 자유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로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가 황제로부터 자유를 얻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이 좋은 것은 토론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구약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과 같이 스데반도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짧은 성경지식으로 말하지만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능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인간적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유대인들이 사람을 돈으로 매수합니다. 거짓 증인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할 일도 없고, 또 하나님을 모독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을 합니다.
또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또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잡아와서 산헤드린 공의회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거룩한 곳은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거짓증인들은 스데반이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한 율법적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입니까? 거짓말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당시의 유대인들도 건물로서의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요2:20).
그런데 요2장 21절에 보면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모든 말은 다 거짓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율법을 무시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거짓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 이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이려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결국 성전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건물로서의 성전에만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스데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주의적으로 만든 하나님입니다. 형식의 틀 속에서 갇혀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행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성전)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고 합니다.
이렇게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거짓 증인들과 스데반과의 치열한 논쟁이 있는 가운데서
스데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기서 보시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고 합니다.
여기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은 그 얼굴이 어떠하다는 것입니까?
단순히 천사와 같이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와 같이 이 세상에 그 어떤 어려움도 없이 편안한 굴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곳에 거짓말로 스데반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보았을 때 스
데반의 얼굴은 절대 편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스데반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스데반을 죽이려는 자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스데반과 같은 천사의 얼굴이겠습니까?
거짓이 난무하는 이 세상 가운데서 오직 진리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하는 것은 스데반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과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자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스데반은 정말 보좌에 계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스데반과는 반대로 모두 스테반을 죽이려는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인격적으로 만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이 스데반과 같이 천사의 얼굴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은 진리를 말하되 동시에 사랑이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선포하지만 사랑이 있습니다.이것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이런 천사의 얼굴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스데반이 성령과 지혜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함으로 천사와 같은 얼굴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천사의 얼굴처럼 보이는 스데반.
사람들은 돈이 있고 여유가 있고 하는 일이 잘 되고 자녀들이 잘 성장하고 아프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얼굴이 밝고 편안하고 웃음이 가득하지만 오늘 스데반처럼 모함을 당하여 재판을 당하게 되면 얼굴이 일그러지고 찡그려진다.
하지만 스데반은 평탄할 때도 그리고 모함을 받을 때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함하였기 때문이다.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항상 천사의 얼굴처럼 빛날 수 있었다.
나의 표정은 어떠한가?
상황에 따라 바뀌는가 아니면 늘 주님을 신뢰함으로,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한결같은가?
환경에 의해 얼굴이 어두워지거나 밝아지면 안 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인해 언제나 얼굴에서 밝은 빛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변 여건이 어떠함에 상관없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그런 사람, 언제나 마음 안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모함하거나 오해해서 실제와 다르게 나를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변명할 것을 찾아 헤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할 말을 넣어주시기를 기다리며 초조해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얼굴에 여유가 넘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 채워야 한다.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가득 찬 사람은 세상이 어떠할지라도 마음에 평강이 있다. 얼굴에 어둠이 없다.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 채우기 위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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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6:8-10)
스데반이란 이름의 뜻은 ‘면류관’입니다. 부모가 이런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그 자녀가 세상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데반은 주님 안에서 최고의 사람입니다.
성경은 스데반을 일곱 집사 중 첫 번째로 소개하며, 두 장이나 할애해 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6~7장).
예수님의 열두 사도라 해도 사도행전이 기록을 아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놀라운 점입니다.
물론 성경이 중점을 두는 것은 스데반의 성공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과 믿음이 충만하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5, 8, 10절; 7:55).
주님을 의지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복음에 대한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준비된 주님의 일꾼입니다.
스데반처럼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든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 묵상 질문: 집사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 적용 질문: 스데반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간구하고
구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천사의 얼굴을 한 스데반(6:11-15)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본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스데반과 논쟁하던 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스데반과 ‘더불어’ 대화했지만, 궁색한 처지에 몰리자 돌변합니다.
사람들을 매수해 스데반이 신성 모독을 했다고 증언하게 하는가 하면, 스데반을 공회에 잡아들이고
거짓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고발한 명목은 그가 성전을 헐고 율법을 고치겠다 한
예수의 말을 전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았던 거짓 증언입니다(막 14:58).
예수님처럼 진리를 위해 죽음의 자리에 던져진 스데반, 자신을 핍박하고 해치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인 그는 팔복의 주인공입니다 (마 5:10~12).
- 묵상 질문: 억울한 고발과 위협을 당하는 중에도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그리스도인으로서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사람들의 거짓 증언으로 공회에 세워진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같았듯이, 저도 저를 핍박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일 수 있기 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제 면류관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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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이 무엇인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스데반이라는 인물의 감화력이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늘 나쁜 일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세상의 이치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마귀는 좋은 일을 눈뜨고 보지 못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는 일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좋은 일만 계획하시고 넘치도록 복을 내려 주십니다. 선하신 성품을 가지셨기에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고 그의 모든 피조물들도 그렇습니다.
다만 자유의지를 가진 마귀와 인간만이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을 거부하고 악을 만들어내기 바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무슨 좋은 일을 계획하시기에 마귀들이 저렇게 훼방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점을 가지십시오. 곧 머지않아 감사할 일이 생기겠구나 라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9절에서 자유민(리버디노)은 ‘해방된 사람’, ‘자유롭게 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후 로마에서 종살이하다 주인들에 의해 해방된 유대인들 내지는 황제 디베료(티베리우스)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로마에서 자유를 얻어 쫓겨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안에만 많은 회당이 있었는데, 아마도 스데반이 리버디노 회당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이 스데반의 가르침을 두고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리버디노 사람들은 회복된 신분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더욱 전통에 충실하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양반 직첩을 산 사람들이 더욱 양반 행세를 하려는 심리와 같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부유한 평민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들 부유한 평민들은 양반 직첩을 돈으로 삼으로써 신분상의 향상을 꾀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정부 역시 이런 평민들의 돈을 노리고 납속책과 공명첩을 남발해 양반의 수효를 증가시켰습니다(숙종실록 - "흉년이 들었으므로 진휼을 위하여 가선, 통정, 동지, 첨지 ……첨사, 만호 등 공명첩 2만 장을 팔도에 나누어 팔게 하였다.")
아무튼 돈을 주고 산 양반 직첩과 같은 사명감으로는 스데반의 지혜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이 스데반의 인품과 가르침에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들은 더 큰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패배를 상기시키는 스데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어둠은 늘 빛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요한은 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를 맞아들이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는 부자 청년 못지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세러 장으로서 나름 지위도 있었던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빛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냐는 것입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은 스데반을 모함하기로 작정하고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 약팀이 쓰는 방법이 바로 반칙입니다. 악은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악은 선에 대해서 반칙하는 것을 다반사로 여깁니다.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이길 수 없자 반칙을 썼습니다. 즉 거짓으로 모함하여 십자가에 다는 것까지 성공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반칙의 결과 어떠한 처벌이 주어지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면서도 무시했던 것입니다(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악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굴복하고 싶어도 굴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즉 영혼의 깊숙한 곳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자신의 자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아를 폐위시키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쉴 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행6:13-14)
그러므로 리버디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부류들과 똑같이 거짓을 만들어서 모함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저들이 뒤늦게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였더라면, 결코 스데반을 모함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할 뿐 아니라 복음에 직접 대면하게 되면 스데반에게 했듯이 돌로 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은 그런 살기등등한 상황을 스데반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얼굴은 얼(정신)의 꼴입니다. 즉 내면이 얼굴에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은 죽음 앞에서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평안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도 은사입니다. 순교를 용기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우리의 영이 성령에 사로잡힐 때 외부의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처한 상황이 순교의 상황은 아닐지라도 사실은 죽고 싶을 정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인생을 살아왔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 부럽기도 하고 평안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닮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럴 때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자신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땅을 떠날 때 참으로 예수를 닮았다는 소리 한 번 듣고 떠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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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교회 내에 헬라 파, 히브리파 하는 구분이 있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헬라 파 유대인( JEllhnistw'n)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그리스나 로마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헬라어를 익혀 사용하던 유대인들로서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왔다가 개종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헬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분은 의외로 깊은 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 JEbraivou")이란 팔레스타인 출생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이 히브리 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란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세계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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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짐으로 배타적 선민사상이 의식 속에 남아있는 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족의 언어였습니다. 성경에는 아람어의 표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예로 "달리다굼"이나 "마라나타" 또는 "에바다"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표기들입니다.
또 헬라어를 쓰고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그들은 그리스나 로마 등지에서 살았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이방적인 사고방식이나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인한 원망과 시비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그룹들이 교회 안에 함께 있었고 이들이 온전하게 하나 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단순한 행정적인 착오를 뭘로 비화합니까? 왜 우리는 차별대우하느냐는 생각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이 생겼습니다. 그 모진 박해를 이기고 날마다 성장하던 교회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때는 교회의 순결을 위협하는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잘 이겨나갔던 교회입니다. 그러자 사탄은 이제 교회 안에 이렇게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해체시키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이나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성전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 들여 졌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성전 덕택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유지와 드려지는 예배를 위해서 세계각처의 흩어진 유대인들로부터 막대한 헌금이 제공되고 있었으며 또 매 절기 때마다 성전 순례자들이 많은 헌금을 바치며 많은 돈을 이 도시에서 소비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은 그 도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입원(收入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공격은 곧 가장 직접적인 저들의 생활권의 침해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스데반을 소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스데반 집사가 하고 있고 자신들은 그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신한 논쟁에서 중상모략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중인을 세우고 모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권력을 남용해서 폭력을 가합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잡아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미 사도들에 대해서 충분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충동질할 필요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신학에서 출발한 이 변론은 결국 폭력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변론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는 지금 스데반 집사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증거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익한 변론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생활에서 이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스데반 집사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의 정당한 변론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모함과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자신을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자신이 본 시각에서 볼 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말하지 않고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까 천사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들이 그의 얼굴을 본 결과 그 모함과 불법의 와중 속에서 스데반은 놀라운 평안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깃들어서 천사의 얼굴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격상 얼굴로 말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표정에서 말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게 스데반 집사의 이런 내적 평안은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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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 스데반과 논쟁한 사람들의 출신성분입니다. 이는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와 아시아 등지에서 온 유대인들로 구성된 이른 바 ‘자유인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주변의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살다가 자유를 얻어 돌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스데반과 논쟁한 것은 스데반도 핼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논쟁제목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논쟁에서 스데반을 도무지 꺾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매우 용의주도하게 스데반을 공격합니다. 본토 유대인들에게 매우 민감한 부분인 성전을 빌미로 잡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은 본토 거주민의 생업과 직,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해서 세계각처의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막대한 헌금이 들어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 절기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많은 돈을 그곳에서 소비했음은 물론입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으니, 성전에 대한 공격은 곧 그들의 생계의 침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즉각 공회가 소집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유죄판결을 받을 위기에 처해집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을 뿐입니다. 또한 성령의 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이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일들로 인하여 일생일대의 큰 위험에 처해집니다. 거짓 증인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증인이 무서운 것은 스데반 같이 선량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거짓 증인으로 무고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결국 신약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길로 간 것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산헤드린 공회의에 참여한 모든 자들의 시선이 스데반에게 쏠리는데, 그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말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원고와 거짓 증인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이 표현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상징적인 묘사라고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공회원들이 피고 스데반을 천사처럼 볼 수 없기 때문이고, 설령 그렇게 보았더라도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변화산에서 예수님도 용모가 변화되고 그 입고 있던 옷도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본다면 반드시 상징적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외모로도 영광스러운 광채가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광이 외적으로 반영된 것이지요. 따라서 얼굴이 천사처럼 변화한 것이 아니라, 그 얼굴에 주님의 임재가 드러났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곧 성령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변론을 마치고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하나님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보았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령 충만했다는 선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비록 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영혼이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것의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은 다니엘의 3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포로인지라 바벨론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왕의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니,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들어갈 위기에 처해집니다. 평소 그 인물됨이 아까워 왕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건만 그들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내시겠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초월하는 신앙입니다. 도무지 세상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근심이 마음에 가득 차 있으면 그런 답변을 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생업도, 사역도 성령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사역자 중에 대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사역을 두려운 마음으로 합니다. 곧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까봐서입니다. 그가 그랬다면 우리는 더욱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살면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복음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의 증거자로써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본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도도 성령으로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알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나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 포함되는 이기적인 면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해야 하니,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온전한 기도응답의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에 100%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스데반의 얼굴은 세상에 알려 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 얼굴을 압니다. 천사의 얼굴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얼굴이지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얼굴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 얼굴을 알 수 있으니, 영적인 안목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외부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며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제어하기를 원합니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염려, 걱정, 근심 같은 것들입니다. 결단코 그런 것들이 우리의 얼굴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감정을 타고 들어오는 좋지 않은 감정들도 배척합니다. 늘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하나님의 사람들의 얼굴이어야 합니다. 얼굴에 스스로 책임지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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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오직 성령 충만함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으신 뜻과 주시고자 하는
그 큰 사랑을 알고 누리는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뒤로 물러가는 연약한 자에서 독수리 날개 치듯 하늘로
오르는 믿음의 자녀, 성령의 사람으로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살기 원합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입술에 지혜가, 삶에 능력이 드러나게 하소서. 거짓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영광을 비추게 하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자연재해로 인하여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라파,
그 치유의 손길을 베푸시고 여호와 샬롬, 그 승리의 깃발을 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함으로 주신 사명 넉넉히 감당하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