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정조 열풍
몇년 전부터 책을 통해 많이 다루어졌던 정조시대의 이야기가
올해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TV를 통해서까지 이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열풍이다.
왜 정조인가?
정조는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지도자 중에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의문의 죽음과 함께 그의 개혁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 그가 왜 TV나 책을 통해서 이야기되고 있는가?
그것도 왜 지금인가?
개인적인 생각인데,
작가나 연출자들이 정조의 개혁정신이 현정권의 개혁정신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해서가 아닌가 싶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현정권의 임기가 끝나면
지금으로봐서 다음 정권은 보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정조가 죽음과 동시에 개혁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현정권이 추진하던 개혁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책이나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든다.
정조시대의 시대적 상황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내가 지난 여름에는
정조시대 이야기를 다룬 <한성별곡>이란 드라마를 보았고,
최근에는 <이산>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다.
특히 <한성별곡> 같은 경우 대한민국 대표 수구정당이
방송국의 항의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었다고 한다.
1. 원행
작년에 <원행>이란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은 정조의 을묘원행 동안 정조의 반대파들이 역모를 꾸몄지만,
정약용 등의 활약으로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설정한 이야기였다.
그때 정조의 을묘원행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 책 <이산 정조대왕>은 그 정조의 을묘년에 있었던 8일간의 원행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자신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겼고,
그 이름도 현륭원이라고 하였는데,
정조는 해마다 그 현륭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중에 1795년 을묘년 원행은 다른 때의 원행과는 규모와 의미가 달랐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도 화성에서 같이 진행하였고,
그 8일간의 기록을 세세히 적어서 <원행을묘정리의궤>란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화성에서 별시를 수행하고, 수원지역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경로잔치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들었던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술 시범을 노론들 앞에서 보여주었다.
이 장용영의 무술 시범을 본 노론들이 오금을 절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성.
화성은 자립형으로 만든 신도시이다.
알다시피 정약용이 설계를 하였고,
정조의 최측근이 모든 일을 담당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현륭원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천하를 아우르는 군주로 거듭하기 위한 신도시 건설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화성으로 천도를 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1795년.
정조가 죽기 5년 전이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의 세력을 누르고,
자신이 꿈꾸던 나라를 이루여고 했지만,
그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그 꿈이 무너지게 되었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아직도 독살설이냐,
종기에 의한 병사에 의한 것이냐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가 죽자마자 그의 모든 개혁계획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은 도루묵이 되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도루묵.
18세기 르네상스는 불꽃처럼 피었다가 꺼지고 말았다.
오늘날 피고 있는 불꽃이 영원하길 바랄 뿐이다.
2. 꿈을 꿈꾸며...
영조가 비록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데 일조를 하였지만,
이는 노론에게 속은 것이요, 본마음은 아니었다.
뒤늦게 후회해봐야 죽은 아들을 살릴 수가 없었다.
영조는 아들이 죽은 후,
심히 슬퍼하며, 시호를 슬픔에 잠긴다라는 뜻의 '사도'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을 보호하는데 힘썼다.
노론의 숱한 공격에도 정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영조의 보호도 큰 몫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24살의 정조.
그리고 던진 한마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은 노론에게 비수가 되었지만,
정조도 그리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자신을 왕취급 안하는 노론이 주위에 가득하였다.
정조는 우선 아버지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홍인한, 정후겸, 김귀정를 제거하였다.
이 중 김귀정은 자신의 새할머니 정순왕후의 오빠였다.
가뜩이나 정조를 싫어했던 정순왕후는 자신의 오빠가 죽게 되자
정조에 대한 복수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기 시작했다.
후에 정조의 아들과 의빈 성씨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정순왕후의 음모라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였다.
정조는 노론에 대항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선대 왕들의 글을 모아 보관하겠다는 취지로 생긴 규장각.
규장각의 검시관들은 정조가 직접 뽑았고,
그들은 정조의 백그라운드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벼슬에 오른 자들을 다시 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도를 도입하였고,
이는 직접 왕이 신하를 가리치는 것으로,
이 초계문신제도를 통해서도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3. 개혁의 칼
정조가 노론과 치고박고 싸우는 것으로 끝났다면
오늘날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정조는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고,
나라의 기틀을 새로 짜는 개혁을 전방면에 걸쳐 실시하였다.
정치, 신분제, 사법제, 경제 분야, 군사 분야 그야말로
평생 일만 하다가 삶을 마무리한 왕이었다.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설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정조의 과로가 종기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정도로 악화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백성들의 불만을 직접 듣고 해결해주는 상언과 격쟁이라는 제도를 충실히 지켰다.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신문고제도인데,
정조에 들어서는 거의 유명무실해졌고,
상언과 격쟁이란 제도가 있었지만,
너무 사소한 일까지 올라오게 되어 이것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는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 수령들을 믿음으로써 다스렸다.
지방 수령들을 믿었지만, 그들의 비리 또한 엄히 다스리기 위해
암행어사 제도를 확대 실시하였다.
정약용을 비롯한 정조의 측근들이 엄행어사로 큰 활약을 하게 되어
지방수령의 비리를 근절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또한 조선시대 가장 큰 병폐 중에 하나인
서얼에 대한 차별을 금지시켰다.
서얼 출신 또는 서얼의 집안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 있어도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서얼에 대한 대우 개선은 서얼로써 왕위에 오른 영조 때부터 이루어졌지만,
오래된 전통이 쉽게 바뀔 수 없었기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는 한다면 한다.
정조는 규장각 검시관에 서얼을 뽑기 시작하여
점점 그 범위를 확장시켜서 지방 부사에까기 넓혀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해 보답이라도 하듯이
많은 저작과 성과를 내었다.
특히 박지원의 제자로 있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
정조는 또한 노비제도도 없애려고 하였지만, 반대에 부딪혀 이루지 못했고,
시전 상인들의 독과점을 막기 위해 난전을 활성화시켰으며,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게 하도록 사법제도도 정비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친위부대 장용영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런 일관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당파를 떠나 개혁적인 인재 등용에 앞서나갔다.
그런 개혁적인 인재는 규장각의 초계무신제도를 통해 발굴해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했던 채제공이 있었다.
채제공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모두 맡는 삼대독상으로
정조의 개혁정책을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후
홍인한, 정후겸, 김귀정 등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홍국영이 있다.
하지만, 후에 그는 정조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조와 가장 성향이 같다고 하여 리틀 정조라 불리고 있는 정약용이 있다.
그들은 환상의 커플이라고 할 정도로 뜻을 같이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함께 정약용 역시 유배를 가서 그들의 뜻은 같이 꺽이고 말았다.
...
암튼 정조의 개혁정책이 하나씩 시행되면서
조선의 전성기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조가 마지막으로 가슴에 한이 맺혀있는
아버지의 명예를 복권하기 위해 마지막 점을 찍기 위한 일만 남아 있었다.
선왕인 영조와 약속하기를 정조가 재임 중에는 사도세자의 일을 언급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영조와의 약속을 지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도 회복시키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세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왕이 되고,
정조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화성에서 상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런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꿈이 바로 일어나기 얼마 전에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
정조의 죽음과 함께 그가 꿈꾸던 조선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4. 그가 죽은 후
그가 죽고 세손인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나이 어린 순조 대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정조가 내놓은 모든 개혁안을 물리치고,
다시 옛조선의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은 해체되었고,
화성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고,
정약용을 비롯한 정조의 측근들은 누명을 쓰고 죽거나 유배를 보냈다.
정약용도 천주교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18년 길고 긴 유배생활을 하였다.
...
정조가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외척의 세력을 끌어들였는데,
순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본격적으로 그들이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선은 세도정치의 세상이 되었다.
외척의 강력한 힘은 오랫동안 정권으로 누려왔던
노론 벽파까지 무너뜨릴 정도였다.
결국 정조는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정조가 죽고 난 후 100년도 안되어 조선은 열강의 침입에 힘없이 무너졌다.
아쉽지만, 안타까운 결과이고
이런 일들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힘써야겠다.
...
참여정부의 개혁 프로젝트인 2030 프로젝트.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조의 죽음으로 사라진 정조의 개혁정책들처럼...
참여정부의 끝과 함께 사라질까 걱정된다.
정조의 죽음으로 함께 다시 과거회귀한 조선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이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랄 뿐이다.
책제목 : 이산 정조대왕
지은이 : 이상각
펴낸곳 : 추수밭
펴낸날 : 2007년 7월 10일
정가 : 13,000
독서기간: 2007.10.24 - 2007.10.27
페이지: 359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