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정 이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2019년 제정되었다. 기념일 선정을 위해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대상 기념일을 공모하고, 공청회 및 기념일 선정위원회의 심의 과정을 거쳐 1894년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월 11일을 기념일로 최종 선정했으며, 2019년 2월 19일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심의·의결되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2. 혁명의 성격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데 당시 가난한 농민들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엄청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자연스럽게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관리들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 농민들의 분노로 인해 발생한 혁명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 이를 보기에는 사실상 반란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일본군과 청군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진압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왕정 하에서 농민들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큰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 모두에게 나름대로 높게 평가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2023년 5월 18일, 동학 농민 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유래 및 역사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에 기반을 둔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으로, 1894년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 대항한 고부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어, 반봉건·반침략·항일투쟁으로 발전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봉건 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깨우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무장항쟁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2019년 제정되었다. 기념일 선정을 위해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대상 기념일을 공모하고, 공청회 및 기념일 선정위원회의 심의 과정을 거쳐 1894년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월 11일을 기념일로 최종 선정했으며, 2019년 2월 19일 국무회의에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심의·의결되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 시설안내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https://www.1894.or.kr/main/?menu=77
4. 동학농민혁명(1894년~1895년)
상세 탐구
1) 원인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패 및 수탈에 대한 반발
2) 교전 세력~조선, 청나라, 동학농민군, 일본제국
3) 전개 과정
동학 농민 운동은 고부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 농민들을 착취했다. 1894년 1월 11일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이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4월 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 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 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 측이 이에 응하여 5월 7일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 1차봉기(반외세 < 반봉건)
♡ 탐관오리의 처벌과 봉건제도의 개혁을 요구
고부봉기 → 백산봉기 → 황토현, 황룡촌 전투 승리 → 전주성 점령 → 정부가 청에게 도움 요청 → 청나라군 상륙(아산) + 일본군 상륙(인천) → 전주화약
* 2차봉기(반외세 > 반봉건)
♡ 일본의 조선 침탈에 항의하여 봉기
일본의 경복궁 점령 → 청·일전쟁 → 교정청폐지, 군국기무처 설치(동학농민군 진압 명령) → 우금치전투
3) 결과
조일 연합군의 농민군 진압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 청일전쟁 발발
5.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군이 실패한 이유는 민씨정권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훈련된 관군을 대적하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비록 실패한 반쪽혁명이었지만 불의에 저항한 농민들의 저항운동은 신분제의 타파와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으로 당시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 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 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농민군이 주장한 내용이 폐정개혁에 반영되어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라는 역사발전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농민군이 패전한 이유는 관군에 비해 열세인 무기를 비롯해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동학 농민군의 혁명은 이와 같이 실패하였으나, 그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밖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침입할 구실을 삼아 대군을 파견하여 마침내 청⋅일 전쟁을 일으켰고, 안으로는 갑오경장이 추진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성리학적 전통 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근대 사회로 전진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룬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날자가 지나서 옮겨 드리지 못하오니
다음부터는 자유/ 좋은 글방에 올려 주시면
감사 하겠읍니다
천사가 미처 열람 하지 못함을 이해 해 주세요
카페 사랑 고맙습니다 예술박님
늘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