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현실
“이국의 병사여!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라. 우리일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그대가 가는 그 길을 중국군도, 일본군도, 프랑스군도, 지나갔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전선으로 떠나는 우리 군을 보고 현지 노인네가 하는 말이다.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터이니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화 대사지만 옳은 말씀이다.
자유라는 핑계로 멀고도 먼 남의 나라에 와서 얼마나 많은 총질했는지 모른다. 목공예 공장을 할 때다. 나무를 켜다 보면 총알 박힌 나무 때문에 톱날 여러 개를 망가뜨린 적이 있다.
영화 ‘하얀 전쟁’을 마치고 바로 ‘머나먼 송바강’ 촬영으로 이어졌다. 하얀 전쟁 촬영한 낙원동 ‘대일필름’ 팀들이 철수하자 그 뒤를 SBS 창사 기념 드라마를 촬영하러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먼저 영화 하얀 전쟁뒷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홍표·도수 아우와 함께 참으로 우여곡절 끝에 영화 하얀 전쟁촬영을 마쳤다. 하얀 전쟁 팀들이 귀국할 때 공항에서 안성기·독고영재 배우들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준 것이 아니고 사지 말라는 동물 박제를 산 것 때문이었다.
특히나 모양이 좋은 바다거북이 박제를 여러 개 샀는데 이걸 세관원이 통관이 안 된다는 걸 어쩌랴. 구입한 배우들은 배웅 나간 나에게 주고 떠났다. 이렇게 받은 바다거북 여러 마리를 안고 공항을 나오는 나를 보고 만나는 이마다 “요즘은 그런 것도 파세요.”하고 묻는다. 갑자기 내가 공항에 거북이 박제 장사꾼이 돼 버린 순간이었다.
그때는 국교 정상화 전이라서 사이공에 한국인들이 많지 않을 때라서 모두가 한두 번쯤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리고 우리가 바나나 수출하다 잘못되어 여권까지 빼앗겼으면서 용케 돌아다닌다고 의아해 했다.
아시아나 전세기까지 띄워 영화 ‘하얀 전쟁’ 촬영을 마친 우리를 모른다면, 그건 틀림없이 북조선 동무들이라고 믿어도 착오가 없을 때였다. 1992년은 그렇게 사이공 바닥이 작고 좁았다.
그 시절 사이공에는 북쪽 동무들이 남쪽 동포들 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사이공 강가를 거닐다 보면 우리 태극기는 안 보였지만 북한 기를 단 배는 종종 마주친다. 호기심도 생기고 장난기가 발동해 배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동무들보고 소리를 냅다 질렀다. (이것은 '이현령비현령' 국가보안법 위반이 틀림없다)
“안녕! 북쪽 동무들 밥 먹었네? 아직 안 먹었으면 말이지 날래 내려 오라우, 우리 함께 목자야” 그럼 돌아오는 메아리가 이렇다.
“일없어야 우리는 괴기 국에 이밥 먹었어야.” 밥 먹었느냐. 아니면 함께 먹자고 했지 누가 현지에 흔해 빠진 쌀밥에 고기 묵었느냐고 물었나?
북한 사람들이 이렇게 찬물에 기름 돌듯이 피하는 통에 접촉 한 번도 못했다. 그 뒤 국교 정상화가 이뤄져서 우리기업들이 많이 들어오자 북한 측은 사이공에 ‘대동강’이라는 식당을 만들었다.
호기심이 발동해 대동강식당은 몇 번 가보았다. 인물 좋은 여자들을 뽑아서 외화벌이 보냈겠지만 그들의 모습만 놓고 보자면 남남북녀라는 말이 떠오르도록 아름답고 우아했다. 음식 맛은 별로였지만 손님들은 많았다.
어느 날 사이공에 운영하던 대동강 식당이 문을 닫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예전에 우리 집에 일하던 현지인 아가씨가 북한 식당 계산대에서 일했기에 문 닫은 사연을 물어보았다.
대동강식당 사람들은 2년에 한 번씩 교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2년이 되어서 북으로 돌아가야 할 여자가 증발해 버렸다. 영명하신 김정일 장군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이 문제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과는 멀어진다. 내 형제 내 동족이거늘 이제 어찌할까. 이러다 영영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구 위에 마지막 분단국가 대한민국, 강대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가 남북으로 허리가 잘렸으니 무슨 힘을 쓸 것인가.
그나마 또 동서로 나뉘었다. 어찌 밥통 짓을 해도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한때는 만주 벌 넘고 헤이룽 강 너머까지 아우르든 광휘에 빛나든 민족이 어이 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선조님들이여 굽어 살피소서-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영화 같은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슬프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