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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사업 (행幸)복福 |
수행 = 공부 혜慧 |
이것은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람이라면, 또는 어떤
생령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복은 다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다 지혜 있기를 원합니다.
참. 이 지혜가 없으면 사람이 스스로 고생을 하면서.. 자기만 고생하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까지도 고생 시킵니다. 자기만 죄업을 지으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까지 죄업을 짓게 만듭니다. 지혜가 없으면 그럽니다.
자기만 갑갑하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까지 갑갑하게 만들어서 그 사람이
갑갑하다고 말하게 해서 죄업을 짓게 만듭니다. 지혜가 없으면 스스로가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가 지혜가 없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났다고 생각하니까..
복이 없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진짜 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복이 없는
줄도 모릅니다. 복은 바라면서 복이 달아날 짓만 하고 다닙니다.
우리가 신앙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복. ‘복福’ 앞에 붙이는 글자가
‘행幸’자 입니다. 행복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면서 왜 고통스럽게
사느냐? 왜 가난하게 사느냐? 인물 가난.. 지혜 가난.. 재물 가난.. 인연
가난.. 이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는 종교 다녀라. 나는 안 다니련다.’
‘종교는 하나의 주장이지 않냐?’
‘하나의 학설이지 않냐?’
‘그냥 좋은 말이지 않냐?’
‘도덕 아냐?’
알고 보면 수행은 도(道)요 신앙이 덕(德)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공(空)의 세계이고 신앙은 공(公)의 세계라고 합니다.
수행은 나를 다루고 신앙은 대타 관계입니다.
신앙 = 사업 복福 덕德 공公 |
수행 = 공부 혜慧 도道 공空 |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해보면 알겠죠? 나도 자력으로 잘 해야겠지만
대타관계를 어떻게 잘하느냐에 따라서 잘 됩니다. 어릴 때나 노인일
대나 초입자일 때는 타력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항상 타력만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자력이 있어야 타력도 오는 것입니다.
부동산이 있으면 은행에서 대출을 해줍니다. 내가 은행에 갔더니 대출이
안 된다고 합니다. 원불교 교무라고 했더니 종교인은 대추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별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으로
자력이 없으니까 타력을 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력을 입으려고 해도 자력이 있어야 타력을 입을 수 있습니다.
자력이 없으면 타력이 와도 도망가 버립니다. 부담스럽거나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력이 와도 도망갑니다.
교리적으로 설명하면 이 수행을 삼학 팔조라고 하고, 이 신앙은 사은
사요라고 합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자력과 타력을 병진하고 어떻게
공부와 사업을 병진하고 어떻게 복과 혜를 갖출 것인가..?
내가 어떻게 도와 덕을 휘어 잡을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죠?
신앙 4은=체體 4요=용用 |
수행 3학=체體 8조=용用 |
3학을 체라 하고 8조를 용이라고 합니다. 4은을 체라고 하고 4요를
용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3학과 8조, 4은과 4요의 관계입니다.
일원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면서 일원상의 속성이 3학입니다.
그 3학의 내용이
즉, 일원상은 텅 빈 성질을 가지고 있더라..
그 자리를 가자는 것이 정신 수양입니다.
일원상의 자리는 두렷해서 훤히 일과 이치에 밝더라..
그것이 사리 연구입니다.
일원상의 자리는 천지가 운행하듯이 그대로 바르게 돌아가더라..
바른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 그것이 작업 취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느냐?
내가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주사를 주었습니다. 기침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주사 한 방 맞으니까 기침해도 괜찮아졌어요. 뭡니까?
약을 썼습니다. 촉진제.. 그 촉진제가 8조입니다.
8조라는 촉진제를 딱 맞으면 이 3학 공부가 잘 됩니다. 그 촉진제를
동력이라고 합니다. 앞에 ‘원’자를 붙여서 ‘원동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딱 맞으면 정신 수양, 사리 연구를 잘 하게 되는데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다 음양인 것 같습니다.
못하게 하는 장애, 장벽이 있습니다.
3학 공부를 잘하게 하는 것을 진행 사조라고 하고 못하게 하는 것을
사연 사조라고 합니다. ‘버릴 사’자를 써서 버릴 것입니다.
잘하게 하는 네 가지는 신•분•의•성이요,
못하게 하는 네 가지는 불신•탐욕•나•우입니다.
원불교에 오면 뭐부터 해야 할까요? 제일 중요한 것이 신입니다.
신으로 출발합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와 같다. 아무리 땅이 비옥하고
기름지더라고 뿌리가 말라버리면 나무는 죽습니다.
뿌리가 깊이 박혀야 합니다.
내가 완도에서 근무를 할 때였는데 비비람이 아주 세게 불어서 유리창이
팍팍 다 깨지고 나무가 다 뽑힌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바람에 밀려서
종이처럼 날아가고 그랬습니다. 그때 완도에 있는 아파트 유리창
다 깨지고 우리 수련원의 유리창도 거의 다 파괴되었습니다.
나무도 다 뽑혔는데 가만히 보니 어떤 나무는 안 뽑히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뿌리가 깊고 탄탄한 것은 바람이 세게 불어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신심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뿌리와 같습니다.
종교가에서 신이라는 것은 어떤 종교를 떠나서 가장 중요한 것이요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운동선수도 신이 없으면 운동은 못합니다. 예전에
말했습니다. 운동 선수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신을 회복하면 슬럼프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참 묘합니다. 어리석을수록 스스로 자기를 속입니다.
먼저 전체를 살피고 들어가겠습니다. 모든 공부는 팔조의 신으로써
출발합니다. 신 앞에 딱 하나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드림, 꿈, 희망, 비전, 목적이라고
합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T.V를 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어떻게 고시를 보겠어요? 안됩니다.
고대 법대를 다니는 학생들이 고시 합격률이 50~60밖에 안 됩니다.
고대 법대 학생들은 웬만하면 고시를 다 붙습니다. 왜 떨어지는가
봤더니 화투를 치거나 게임을 하거나 이성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 떨어져요. 나머지는 웬만하면 다 붙습니다.
그런데 친구 사귀고, 게임하고, 술 먹고, 이런 놈들은 다 떨어집니다.
그것은 불신•탐욕•나•우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시라는 목표 하나를 원력으로 신을 세우면 분발심을 가지고
죽어라고 합니다. 예전에 서도안 교우가 재수할 때
일어났답니다. 안 믿어지지만 그때는
한의대에 붙죠. 4시간도 못 자고 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하기엔 힘듭니다. 신나게 몰아 붙인 것입니다.
즉, 내가 원력이 있고 확신이 있으니까 분발심이 나서 어떻게 하면
점수가 나올지 의심을 들이대서 잠이 와도, 피곤해도, 게임 하고 싶어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그냥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붙잖아요?
직업에다 신•분•의•성을 들이대면 직업에 성공하고 삼학 공부에
들이대면 삼학 공부에 성공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다 .딱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신•분•의•성이예요. 이 신•분•의•성에서 한 치 벗어나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넘어서지도 않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신•분•의•성에 에누리
없이 다 걸립니다.
그런데 원불교 공부를 모르는 사람도 성공하는 사람들 결과는
신•분•의•성입니다. 신•분•의•성으로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불신•탐욕•나•우를 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분•의•성으로 직업에 들이대거나 고시에 들이대거나 아니면 정신
수양, 사리 연구, 작업 취사에 들이댄다는 것입니다.
내가 허리가 아파서 아침 좌선에 며칠 못 나갔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생각하기를 내가 20년간 죽어라 했더니 알아서 되는구나. 희한합니다.
사람들은 조금 하다가 아프거나 직업상 문제가 생기거나 어떤 일이 잘
풀리거나 어떤 일이 안 풀리면 가다가 정성이 끊어지고 나태로 도로
들어가버립니다. 헌배, 사경을 한다고 했다가 출장 며칠 가면 벌써
흔들려 버립니다. 아파도 흔들려 버리고 술 한 잔 해도 흔들려 버립니다.
그러죠? 내가 다 해 봤거든요.. 나도 테이프도 끊어지고 다 해봐서
잘 압니다. 모를 것 같죠? 술 먹는 심경도 알고 담배도 많이 피웠습니다.
군대에서 한 달에 담배가 15갑씩 나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 나누어
주다가 나도 좀 피워보았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 심경도
내가 잘 압니다.
누구는 담배 끊는 사람은 독종이니 상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담배를 끊은 사람이야말로 무언가 결단력 있게 할 사람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담배 끊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중생의 세계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신•분•의•성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고 작업 취사를
하는데 그 작업 취사에서 다시 꼬리를 물고 갑니다. 그 취사는 사은에
보은 하자는 것입니다. 그 보은을 하는데 더 들어가서 사람에게
보은불공을 해라. 그것이 사요입니다. 사요를 인류에 대한 불공법이라고
합니다.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아이티에 나오잖아요? 기아와 빈곤과 질병과 무지.. 그대로 다 혼재되어
있죠? 그것을 해결하자는 것이 이 사요입니다. 그리고 사요가 다시
신으로 와야 합니다.
그럼 순서가 신•분•의•성으로 삼학 공부를 해가지고 사은으로 가고
사요를 실천해서 다시 신•분•의•성으로 가서 다시 서로 회전을 하면서
진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불교 공부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어떤
서원이냐? 신•분•의•성으로 출발해서 다시 신으로 와야 비로소 작은
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돌고 와야 진짜 신입니다.
낙엽 같은 신, 감정적인 신이 아닙니다. 누가 귀에다 대고 너만 알라고
1분만 말해도 교무님 설교 1시간 한 것보다 효과가 있습니다.
신•분•의•성으로 불신•탐욕•나•우를 제거하자고 했습니다.
즉, 불신•탐욕•나•우는 알아서 잘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제거하고 제거하는데 무엇으로 제거를 해요? 신•분•의•성으로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불신•탐욕•나•우는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렇게 그래프로 설명하면 잘 알겠죠?
서원과 욕심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계•정•혜, 삼학.
즉, 수양•연구•취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 즉, 욕심을 원합니다.
서원은 계•정•혜, 삼학을 원하는 것입니다. 욕심의 의•식•주와 서원의
삼학은 초입 때는 반비례합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서원이 없습니다.
서원을 이야기 하면 저기 멀리 남의 집 이야기입니다.
‘교무님이나 많이 하세요.. 나는 그것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좌선을 이야기 해도, ‘교무님이나 많이 하세요.. 나는 먹고 살기 바빠요..’
의•식•주에 대한 욕심이 꽉 차면 정신의 의•식•주를 구하려고 안 합니다.
그런데 정신의 의•식•주에 대한 욕심이 있을수록 욕심은 줄어듭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되냐? 정신의 의•식•주가 올라가면서
육신의 의•식•주도 같이 따라 올라갑니다.
서원이 있으면 나중에 돈도 같이 올라갑니다. 초입 때는 반비례하지만
서원이 힘을 타면 돈이 들어오는데 얼른 들어오지 않습니다. 돈은
유형이고 서원은 무형의 세계입니다. 무형의 세계는 불변의 세계이고
유형의 세계는 변하는 세계입니다.
유형의 세계는 눈에 보입니다. 의•식•주에 눈이 밝은 사람은 회사에
지각 안하고 일도 철저히 잘하는데 교당에 오는 것은 지각 도인입니다.
교무님이 신용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안 지킵니다.
그 사람은 의•식•주에만 정성이 가고 이 삼학 공부에는 정성이 가질
않습니다. 아침에는 방바닥이 따뜻하다며 누워 있다가 후다닥 일어나서
의•식•주 구하는 직업 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의•식•주에는
신•분•의•성을 잘 들이댑니다.
우리는 의•식•주에는 신경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영육쌍전이라는 것은 의•식•주에 공을 들이고 서원에도 공을 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게으른 사람은 ‘아따 원불교가 날 죽이네..’
이런 소리를 합니다. 더 게으른 사람은 어쩌겠어요? 공부심은 조금
있는데 게으른 사람은 삼학만 취합니다. 의•식•주는 안 합니다.
더 게으른 사람은 서원은 아예 안 하고 의•식•주만 취합니다.
‘아이고 교당 못 다니겠다. 밥 먹고 살기도 죽겠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못해 먹겠다.’ 그러면서 의•식•주만 구합니다.
서원과 아주 친한 양반이 있습니다. 바로 신•분•의•성입니다.
반대로 나의 욕심이 늘어날수록 신•분•의•성은 줄어듭니다.
그리고 나태와 불신과 어리석음이 같이 따라 다닙니다.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이 정성스런 사람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징그럽네 그렇게 살 필요 있어..? 저 사람은 인간미가 없어..’
자기가 그렇게 못하니까 정성스런 사람이 별종으로 보이고
그 정성스런 사람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정성 있는 사람은 참으로 좋아하고 고마워 합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참 예쁘다. 뭐 사줄까?’ 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예쁘게 보입니다.
불신•탐욕•나•우는 저희들끼리 어깨동무하면서 항상 서로 붙어 있습니다.
불신이 들어가고 탐욕이 들어가면 벌써 좌선 잘 안하고 원불교 법이
부담스럽고 교무님이 너무 먼 당신이 됩니다. ‘교무님 말이 사회에서
통할까?’ 불신의 마음이 들고 나태심이 납니다.
그런데 신심이 났을 때는 ‘교무님 그것이 정답이었습니다.
아휴~ 감사합니다.’, ‘교무님 좋아 죽겠어요.’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와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을 하는데 신심 있는 사람은 너무너무 감사하고 있고 신심
없는 사람은 눈을 흘기면서 자리도 저기 뒤쪽에 앉습니다.
누구야 뒤에 앉은 사람은…
- ㅎㅎㅎ
신심 있는 사람은 앞자리로 옵니다.
저를 쳐다보는 눈빛도 다정하게 쳐다봅니다.
- ㅎㅎㅎ
저기 뒤에 앉은 사람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면서 쳐다봅니다.
‘아따.. 부담스러운 소리를 하네..’ 그럽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나한테
돌립니다. ‘교무님은 재미있게 해주고 편하게 해주지 왜 불편하게 하냐?’
고 합니다. 신심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신심이 있으면 ‘야 교무님이 나를 중생의 세계에서 불보살로 끌어주려는
저런 욕심이 있으시구나.. 나를 범부의 세계에서 더 끌어 올려주시려는
열정이 저렇게 있으시구나..’ 하면서 고맙다고 합니다. 박수 한 번 쳐..
- 짝짝짝 ^^
그래요 안 그래요?
- 그래요. ^^
그렇죠?
- 네 ^^
지금 내가 예쁘게 보여?
- 네 ^^
신심 있는 거구만..
- ㅎㅎㅎ
내가 부담스런 사람 있어?
- …
그건 내가 뭐라고 말 했으니까.. ^^
서원과 신분의성은 저희들끼리 무지하게 친해서 비례합니다.
신이 십이면 분도 십이요. 신이 백이면 분도 백이다. 뿐만 아니라 의와
성도 따라 붙습니다. 참 묘합니다.
좋을 때는 누가 신이 없겠습니까? 좋을 때는 나한테 잘해줍니다.
정성도 수준이 다릅니다. 칭찬해주고 돈을 받고, 격려해주고, 맛있고,
좋으니까 정성을 들이는 반면에 칭찬을 해주든 안 해주든,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몸이 좋든 아프든 끊임없는 정성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칭찬해 줄 때 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력적인 정성
무형의 정성은 그것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수준이 그 정도는 되어야지요.
칭찬해주면 좋아라 하면서 ‘교무님이 나를 좋아하는가 봐.’ 그러다가
내가 누구를 조금 더 쳐다보면 ‘교무님이 나한테 마음이 식었네..’
그 정도의 정성.. 예를 들면 영어 선생이 예뻐하니까 영어 공부를 하는
것하고 예뻐하든 안 예뻐하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의 정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직장에서만 정성인가? 아니면
내가 어디서나 일심을 놓지 않는 정성인가? 칭찬이 없어도 일심인가?
돈이 안 되어도 일심인가? 칭찬은커녕 반대로 오해를 해서 나무래도
정성이 안 끊기는가? 낮게 설명해야 하는데 오늘 너무 높게 출발해
버렸네..
신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신의 반대는 불신입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과 미신이 있습니다.
정신은 올바른 믿음입니다. 모르고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그리고 형식과 장엄도 미신입니다.
정신 중에서도 자력의 정신이 있고 타력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력신과 타력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다니는 양반들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저기 어디에 계시면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다 주재하고 계시는 소소영령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믿으라고 합니다. 첫째는 자성을 믿자는 것입니다.
나의 성품, 즉, 이 마음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내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나에게는 이미
부처의 성품이 갊아져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나에게는 본디 공•원•정
이라는 일원상의 속성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나는 별 것이 아니요 어떻게 하다 보면 되겠지요’ 가 아닙니다.
다릅니다. 나는 죄인인데 열심히 기도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는 본래 일원상과 같은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한 존재인데 이것을
내가 깨닫고 못 깨닫고, 지키고 못 지키고, 또 이것을 활용하느냐
못 활용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 타력의 정신은 무엇이냐? 하나는, 법신불 사은의 위력을 믿어라.
또 하나는 사대분리신심이라고 하는데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입니다.
원불교에 처음 왔는데 내 안에 불성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믿으라고 하면 갑갑할 일이죠. 그러니까 먼저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을 믿으라고 합니다. 어리고 약자일 때는 타력이 중요합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도 처음에는 스승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승이 법을
짜고 있는 진리를 깨치셨고 그 스승이 만든 것이 회상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법과 회상은 말을 하지 않는데 스승님은 말을 합니다.
혼내기도 하고 예뻐하기도 합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에 천주교에서는 고해 성사를 합니다.
‘제가 저의 죄를 사하러 왔습니다.’
‘말하시오. 하느님을 대신하여 제가 사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럼 사해져요? 참말로 세상 웃겨 죽겠습니다. 자기가 짜장 먹었으면
짜장똥 싸는 것입니다. 짜장 먹고 왜 짜장똥을 안 싸려고 해요?
새까만 짜장 먹었으니까 새까맣게 똥이 나오는 것이죠.
내가 먹었으면 내가 싸는 것입니다.
내가 했으면 내가 그것을 갚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돈을 빌려 놓고
왜 다른 사람에게 갚아달라고 해요? 자기가 갚아야죠.
이것이 다른 측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대분리신심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진리,. 이것을 두 개로 나누면? 인과와 영생입니다. 인과와 영생의
진리입니다. 인과에 바탕 한 신앙 영생에 바탕 한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법은 우리의 교리와 제도입니다. 삼학 팔조와 사은 사요.
또 우리는 공화제도.. 등등이 있습니다.
그 다음 스승님은 어떤 것입니까? 일차적으로는 대종사님이 스승입니다.
그런데 대종사님만 스승이면 어떻게 전화해서 맨날 물어봐요?
‘대종사님 어떻게 하죠?’ 전화 안 받잖아요?
전화 받는 스승이 있어야 하잖아요. 어떤 양반이에요?
최소한 정사 이상으로 법강항마위 이상입니다. 그래야 견성을 해서
자성 자리에 바탕 해서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 원진 교무님은 스승일까요 아닐까요? 아직 항마위 아니거든요?
원래 서원을 세우고 막 출가하면 정식 특신입니다. 조금 있으면
법마상전이 시작되든가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무님은?
아닙니다. 교무님은 정사는 아니고 종법사님의 대행자입니다.
여기서 신심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깨달은 자만이 가장 잘 실행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가 깨달은 자 못지 않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돈이 없어도 티켓이 있으면 갈 수 있잖아요?
나에게 돈은 없는데 티켓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겠어요? 나는 정사가 아니고 법강항마위가 아니어도 법강항마위
티켓을 받았습니다. 대신 내고 갈수 있는 티켓을 받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 티켓이 있으니까 타고 가는 것입니다.
대행자입니다. 그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왕이 아니어도 마패를 짠 보여주면 되잖아요. 그 위력이
있으니까 발발발 떨잖아요. 심청전에 나오잖아요.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마패를 짠 보여주니까 ‘아이고매 나 죽네~’ 그러잖아요.
그 암행어사는 사또보다 훨씬 후배입니다. 이제야 고시를 합격해서
나온 것이고 별 것 아닌데 그런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 신에 대해서 할 것이 많은데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못 가지게 하는 것이 불신.. 여우 같은 믿음이고 탐욕이 많으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어리석어도 믿음이 없어집니다. 누가 귓속말로 하는 것은
교무님이나 종법사님 말보다 더 잘 듣습니다. 불신자, 힘이 없거나
욕심이 많으면 거기에 혹합니다. 지혜가 어두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음은 분발입니다.
제가 우연히 봤는데
그 사람은 가난한 어촌의 엿장수 딸입니다. 가난해서 어려서 가발공장과
식당에서 일하다가 결혼을 일찍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날마다 쥐어
패니까 안되겠다 싶어서 백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튀었습니다.
미국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대학을 다니고 76년에
미 육군의 장교로 들어 갔습니다. 나중에 소령으로 예편해서 하바드
박사 과정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성공한 원동력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 다리 말하면 반항심과
복수심으로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 나갔다는
것입니다.
반항심과 복수심은 분발심입니다. ‘내이씨~ 그냥..’ 눈알을 부라리면서
죽어라 하는 것입니다. 공순이에서 끝날 사람이 하바드 박사까지
간 것은 분발심 때문입니다. 그 분발심의 근저에는 자기의 목표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대로 신•분•의•성으로
답이 다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분발은 내가 부족하다 내가 못
깨쳤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소선 소지에 만족하면
분발이 없습니다.
제가 원불교를 안 만나고 잘 풀리면 이럽니다. 좋은 직장 다니면서
예쁜 마누라 얻어서 좋은 차 사서 해외 여행 다니면서 뉴스에 아이티
같은 사건 나면 전화 080 두 번 눌러주고 남들이 다 강남에 가네?
그럼 나도 강남에 가야지.. 다 과외 시키네 나도 내 자식 과외 시켜야지..
그러면서 나는 잘 사는 거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나?
나는 아이티도 도와 주었는데..?
큰 원력이 없고 법에 대한 확실한 신이 없으면 일생을 어떻게 사느냐?
인생이 잘 풀리면 일생을 소선 소지로 삽니다. 소선 소지에 만족하고
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안 풀리는 사람은 어쩌죠? 아이고 이놈의 인생
못 살겠네.. 그러면서 복권이나 살까? 부동산이나 해볼까? 주식이나
해볼까? 팍 튀밥 튀기듯이 한 번 튀겨볼까? 외국으로 한 번 튀어 볼까?
이소성대의 원리는 저리 버려버리고 느닷없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원불교를 만났다면 일원대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나가 아니라 큰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주의로 겨우 돈 벌어서
내 가족과 잘 살고 조금 돈 남으면 ARS 한 번 눌러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대 세계주의, 공도주의 세계에 벌써 발을 담근 것입니다.
이것이 일원주의입니다. 이것은 소선 소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안 하면서 잘 산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소선
소지인 경우입니다. 작은 선과 작은 나에 만족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분발심이 안 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학교 선생님들입니다. 80년대 초까지는 교사 수입이
이렇게 안되어서 다 기업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교사의
급여가 올라가고 대우가 좋아지니까 ‘나도 좋은 직업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성업이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선 소지에 만족하고
이 대도에 발심을 안 하는 것입니다. 교당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많이 봤습니다. 우리 교당도 작년에 선생이 10명 왔는데
다 떨어지고 한 2~3명 남았습니다. 나머지는 다 갔습니다.
‘나는 좋은 일하고 시간 있는 방학 때 놀러 가는데 내가 뭐 잘못 했냐?’
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부족함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느껴야 내가 어디까지 아는 것인가? 나의 법력을 어디까지
인지? 나의 수행력은 정말 어느 정도인가? 나는 나라는 존재를 정말로
제대로 아는가? 나는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정말로 감을 잡았나?
고락을 넘어선 극락의 세계에 대해서 내가 아는가? 인과와 영생에
대해서 얼마나 감을 잡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가? 에
대해서 모르니까 알려고도 않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분발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준이 낮습니다. 이 정도면 됐지 그럽니다.
내가 뭐 잘못했냐? 나 대학생인데 이 정도면 잘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훈련을 나고서는 제가 잘못한 게 참 많다고 했습니다. 왜 신심이
났거든요. 신심이 나고 분발심이 나면 내 기준이 낮다는 것을 그때서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발심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발심이 안 납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내가 부족함을 느끼려면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책 한 권만 읽어도
그 속에서 얼마나 자극을 받는 줄 아세요? 법회 한 번만 봐도 자극을
받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안분지족하고
자만자족하면 더 이상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 없나?’
하면서 취미 생활을 찾습니다. 좋은 이야기 해줘야 하는데..
분발심은 아까 그 서원을 더 키우는 분발심이고 신을 더 다지는
분발심입니다. 제가 7일간의 출가 여행을 가자고 여러 사람에게
권했습니다. 내가 권할 때의 마음은 내가 얼마나 이것을 준비했는데
제발 좀 갔으면 하는 마음이죠. 그런데 자기가 신이 없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교무님 나 바쁜데요?’,
‘나 과외 있는데요?’,
‘나 직장 있는데요?’,
‘나 교당 안 빠지고 출석하면 되지, 교무님 뭐 그것까지 요구 하십니까?’
분발심이 안 나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부족한 것을 너무 생각하면
자기 학대를 합니다. 참 다양합니다. 너무 긴장 해서도 안되고 너무
이완 시켜도 안되고, 너무 부족한 것만 느껴도 안되고 너무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특히 분발은 정신적 분발에서 기질적 분발까지 같이 나가줘야
합니다.
아침 좌선 할 때의 분발심은 뭘까요?
서원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분발심을 낼 것 같아요?
‘야. 너 지금 뭐하고 있냐? 네가 서원이 있는 사람이냐?’
하고 자문자답합니다. 그럼 일어나게 됩니다. 신심이 있는 사람은
‘어이 너 대종사님이 어떻게 하라고 하던..?’
하고 자문자답하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서원과 신이 있으면
분발심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서원이 없고 신이 약한 사람은 무슨 분발입니까?
분발의 반대가 뭐예요? 나태입니다. 그냥 잡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은
‘나만 자나? 다 자는데..‘ 자기가 알아서 합리화하고 기준을 낮추어서
‘이 정도면 됐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분발심이
나겠어요? 분발심이 안 납니다.
안에는 욕심으로 밖으로는 다른데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영화 보는 데는 악착 같이 잘 봅니다. 내가 <아바타>를 천만 명이
보았다는데 아직 못 보았거든요. 여러분들 <아바타> 보았지? 아마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에다는 분발심을 적극적으로 냅니다. 나는 갈
시간이 없네.. 옛날에는 좀 데리고 가더니 요새는 말이 없어 조용해.. ^^
내가 나의 법위를 향상하겠다는 분발심을 내는가?
그냥 나는 범부로 살다가 죽겠다.. 여러분들은 그 정도로 포기합니까?
그리고 대재 지낼 때 위령문 받을 것입니까?
‘영가시여 살아 생전에 무슨 연유가 되었든지 어떤 이유로
걸려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보통 범부가 되었소..’
그런 위령문을 받을 것입니까? 아니면
‘선진님 선진님 감사합니다. 당신 덕택에 이 초기 교단에..’
라고 고축 찬송을 받을 것입니까? 법위에 분발심을 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가 들어서
‘교무님 법위가 중요하나요? 마음이 중요하지..?’
그럽니다. 그것도 우와 치에 근간한 마음입니다.
또 분발심 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교무님 제가 절대 좌선 안 빠지고 잠 참아가면서 하겠습니다.’
이것은 욕속심입니다. 이것도 경계의 대상입니다.
수양회가 조직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며칠 갈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좌선을 꼭 하고 빠져도 이틀을 넘기면 안되고 벌금을 5만원씩
낸다고 하는데 내가 두고 볼 판입니다. 욕속심을 너무 내도 안되지만,
또, 나는 저것 부담되니까 안 하겠다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둘 다 문제네..
의심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보면 참 웃긴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의심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일과 이치를 풀어내는 의심입니다. 일과 이치의
자물쇠를 의심이라는 열쇠를 통해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대각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들의 여우 같은 의심,
저울질 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진리와 법과 스승에 대해서 저울질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의심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옳은 의심,
다른 하나는 삿된 의심 이렇게 나눕니다.
의단이라고 있습니다. 단심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수많은 일과 이치가
있고 수많은 의심이 있는데 이것을 만법이라고 합니다. 이 속에서 계속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이 만법을 귀일 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단으로 엮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이뭐꼬?’, ‘시심마 是甚麽’ 라고 합니다. 이 뭐냐?
도대체..? 무엇이 들어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느냐? 나는 무엇이 들어서
움직이냐? 누구는 무엇이 들어서 성공하냐? 등은 무엇이 들어서 밝냐?
이 ‘무엇’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에 대한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불할 수 있는 의심이고 이 세상의 일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포장마차 사장이면 돈을 벌 것 같습니다. 포장마차 체인점까지 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믿음을 가진 다음에 분발심을 갖고
나태하지 않고 남들 퍼 잘 때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고 깨끗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 이 포장마차를 어떻게 할 것이냐?
떡복이집을 한다면 어떤 떡복이를 할 것이냐? 그럼 그 안에 의심이
들어갑니다.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호떡을 한다면 그냥 동그랗게
안 합니다. 모양을 바꾸거나 빛깔을 바꾸거나 다른 것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호떡집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홍보 할 것이냐? 내 옷은 어떻게 입을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줄 것인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할 것인가?
위치는 어디에 잡을 것인가? 온갖 것이 의심이잖아요? 알아서 의심이
생기는 것이죠? 포장마차를 해서 돈을 벌려는데 의심이 안
생기겠습니까?
똑 같습니다. ‘교무님 저는 의심이 안 생겨요?’ 그 소리는 에너지를
다른 데에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포장마차 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이 왜 포장마차에 각종 의심이 안
생기겠어요? 똑 같습니다. 원불교에 들어와서 일과 이치에 얼마나
의심이 많겠어요? 나는 깨닫는 것은 나두고서라도 교무만 하려 해도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것 저것 챙기고 준비할 것이 무지하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다 의심이 걸리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그러셨죠?
<재질의 유무나 시일의 장단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뭐가 있으면 됩니까? 신•분•의•성을 들이대느냐
안 들이대느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핑계를 잘 댑니다.
‘저는 근기가 낮은 것 같아요?’
근기가 어디에 있는데? 마음에 있는데.. 또는
‘저는 원불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요?’
그것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신•분•의•성만 들이대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나이도 필요 없습니다.
원불교에 50대에 들어와서 출가위까지 올라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대타원 이인의화 할머니입니다. 대단한 양반입니다. 50대에
들어와서 견성을 해서 삼세를 보고 정산 종사님과 3000년 전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기도 정성과 일심 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내가 원불교 다닌 지 30년 되었다’ 이런 것 아무 필요 없습니다.
안 다닌 것보다는 낫겠지만 내가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신•분•의•성으로
들이대느냐. 다 자기의 마음에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선관위에 근무를 하는데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교무님 전 선관위에 근무하기 전에 선관위 간판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선관위에 근무를 하니까 산관위 간판이 잘 보이더랍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네.. 똑 같습니다. 여러분들 이발하려고 이발관 찾아보세요.
이발관이 잘 보입니다. 다 이발관 같습니다.
치과를 찾는데 왜 이렇게 치과가 많아요? 제가 은창 교우님 치과를
가려고 사당동에 내려서 걸어가는데 치과가 8개나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안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가지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안 만큼 보이고 관심을 가진 만큼 보입니다. 보인 만큼 알아집니다.
정성입니다. 이번에 훈련을 가서
‘제가 정성이 없었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 동안 정성 들여 했던 적이
없었답니다.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을 해 봤더니 서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네가 답을 잘 알았다고 했습니다. 네가 정성이
없는 것은 의심이 없었다는 이야기고 의심이 없었다는 것은 분발심도
없었다는 것이고 분발심이 없었다는 것은 힘과 원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목표의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남이 하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막 뛰어 가니까 그 사람에게 자네 왜 뛰어 가냐고 물으니
남들이 뛰니까 같이 뛴답니다. 내 원력에 바탕 해서 내 포부와 경륜을
어떻게 실행해 볼까를 생각하고 해야 하는데 남들이 뛰니까 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남들이 시집 가니까 시집가고 남들이
장가 가니까 장가 가고 그럽니다.
자 정성이라는 것은 신의 정성이요, 분의 정성이요, 의의 정성을
말합니다. 신이 정성스럽고 분발심이 정성스럽고 의심이 정성스럽습니다.
여러 가지의 행복 중에서 자기가 정성스러울 때 자기가 무지하게
예쁩니다. 자기가 정말 예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서 손을 털면서
말합니다. ‘오늘 나 참 잘했어..’ 남에게 칭찬 안 받아도 됩니다.
일심으로 하면 정성이 되고 끊어지지 않습니다.
행복 중에 행복이 일심입니다.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와 내가 하나가
되고 연주를 할 때 그 악기와 내가 하나가 되고 붓글씨를 쓸 때 붓과
내가 하나가 되고 춤을 출 때 춤과 내가 하나가 되고 선을 할 때 호흡과
내가 하나가 되고 요가 동작을 할 때 요가와 내가 하나 될 때,
그 정성이 들어갈 때 일심이 됩니다. 무지하게 행복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정성을 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오뚜기 같은 정성이다.
사람이 어떻게 계속 갑니까? 때로는 경계에 따라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일어서는 정성이라는 말입니다. 나태해서 정성이
끊어지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끊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나이 먹은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끊어지기도 합니다. 한 번 자존심 건드려 놓으면 에누리
없습니다. 억울함을 당해서 자존심도 상해봐야 합니다.
그것이 다 공부입니다. 그때 공부가 됩니다.
평상시에 축적해서 그때 써먹는 것입니다.
신심도 있고 법호도 받은 어떤 양반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교무님은 바쁘다고 오지도 않는데 기독교 목사가 와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날마다 기도를 하니까
‘아무래도 주를 영접해야 할 것 같아.’ 그럽니다.
신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교무님이 나에게 잘해주든 안 해주든,
교무님이 나를 예뻐하든 안 하든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성이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신입니다. 그것입니다. 아시겠어요?
‘교무님 저를 쫓아내지 마세요.’ 그런 것은 아직 약한 것입니다.
‘쫓아내? 네가 뭔데 쫓아내. 내가 왜 나가? 네가 나가.’ 그래야지요. ^^
신이 있는 사람은 그런 것 같아요. 신이라는 것은 요지부동입니다.
불신•탐욕•나•우는 아까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여러분들 신•분•의•성을
챙기면 불신•탐욕•나•우는 반비례해서 힘을 잃습니다.
그런데 불신•탐욕•나•우를 제거 하면서 신•분•의•성을 세우면 효과가
배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교무님 저는 서원이 안 세워져요.’ 또는 ‘제가 출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잘 안되네요. 결혼도 하고 싶네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결혼하기 싫어서 출가하느냐? 아니다. 결혼하고 싶지만
더욱 수행하고 싶고 더 큰 살림 하고 싶고 참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이다. 결혼이 싫어서 출가하는 것은 문제다.’
서원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하는데, 서원은 놔두고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출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곡식을 키우기 위해서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
곡식을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할 때 자신의 근원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본성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서 신•분•의•성의 보배를 가지고 그 기쁨을 느끼고
그 맛을 느끼고 그것과 하나가 되면 다른 것은 나중에 따라옵니다.
그런데 이 맛을 모르고 자신의 불신•탐욕•나•우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나는 왜 신이 안 날까요? 나는 왜 탐심이 많을까요? 나는 왜 이렇게
나태하죠? 나는 왜 자행자지 할까요? 이런 고민하지 마세요.
나의 신이 어쩐가 나의 분의 어쩐가 나의 의심이 어쩐가 나의 성이
어쩐가 나의 서원이 어쩐가를 고민해 보세요. 내가 그 맛을 얼마나
느끼는지 생각해 보고 그것으로 하라고 하는 수양을 내가
신•분•의•성으로 하는가? 헌배나 일기 기재를 내가 신•분•의•성으로
하는가? 교전을 사경할 때 내가 신•분•의•성으로 하는가?
이것으로 대조를 하면 됩니다. 그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참고로 덧붙이면 나태는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나태죠.
일을 무서워하는 것도 나태. 일을 뒤로 미루는 것도 나태.
수도하기 싫은 것도 나태. 수양하기 싫은 것도 나태입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왠지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나태입니다.
이 나태는 묘하게 핑계를 아주 좋아합니다.
나태는 자기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나는 직장이 어쩌고 나는 건강이
어쩌고 나는 나이가 어쩌고 나는 늦게 만났고.. 이렇게 나태는 핑계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냅니다. 왜 그런 데는 연구가 잘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현실 생활 속에서 나태가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나태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부지런히 해도 될까 말까 하는데
나태해서 뭐가 되겠습니까? 장사를 해도 나태하면 안될 것이고 수행을
해도 나태하면 안될 것이고 사경을 해도 나태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밥 먹을 때는 잘 챙겨 먹습니다. 그러죠? ^^
질문 없으면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950119_화공_39_제1장 일상 수행의 요법-4.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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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감사합니다. 잘 보고 옮겨 갑니다
항상 들러주시니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v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