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맥베스>는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비극이다. 하지만 맥베스는 야망을 위해 고독해질 용기, 극한의 행동까지 감행할 정신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부추길' 존재이자, 야망의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아무리 인간이 마음대로 써먹는 게 종교라지만, (다윗도 아니면서) 하느님이 주군과 동료들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우기긴 어렵다. 차라리 악마가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세 마녀는 진정 맥베스가 필요로 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은 맥베스의 그림자 속 괴물, 자아 너머의 목소리, 유혹하는 악마들이다. 마녀들은 맥베스의 최후의 변명거리기도 하다. 자신의 반역과 폭정이 마녀들 탓이듯, 패배와 죽음 또한 마녀들이 농간을 부린 것이지 자기 죄의 대가를 치른 게 아니다. 물론 맥베스의 현실도피용 환상은 그의 파멸을 막지 못한다. 맥베스가 저지른 살인과 폭정을
두고 보이지도 않는 마녀들 따위를 욕할 사람은 없다. 마녀가 있다면, 맥베스는 그걸 사역한 악마다.
2. 숲이 일어나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맥더프가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맥베스의 파멸은 피할 수 없었다. 맥베스에겐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왕정국가에서 가장 좋은 명분인 핏줄도 해당되지 않는다. 맥베스 토벌군은 <삼국연의>의 동탁 토벌군 같은 '명분'의 위세를 보여준다. 움직이는 숲은 바로 그 위세의 상징이자, 자연의 법칙과 그 뒤에 있는 신까지도 맥베스를 버렸다는 뜻이며, 더 이상 도피할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한 맥베스의 절망 자체다. 마지막까지 환상에서 허우적거린 맥베스는 네로와 같은 희비극 속에 무너진다.
3. 다른 4대 비극과 달리,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에게 어떤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 맥베스의 주위에는 수많은 동료와 친구와 그리고 아내가 있었지만, 결말로 갈수록 그들은 죽거나 떠나거나 적이 된다. 끝내 맥베스는 까마귀 한 마리도 앉지 않는 시체로서 무대 한 가운데 버려진다. 참으로 비참한 죽음이다. 그러나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다'라는 전제가 사실이라면, 맥베스의 죽음이 어찌 비참한 것일 수 있는가? 오이디푸스는 죄가 없는데도 슬프고 외로운 최후를 맞이했다. 맥베스는 원하던 국왕 이 되었고,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고, 모든 것을 마녀들의 탓으로 돌리고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 속에서 죽었다. 딱히 손해 본 것도 없다.
4. 어쩌면 맥베스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건 오델로인지도 모른다. 악의에 찬 이아고에게 속은 것이라고 해도, 자기도 모자라 죄 없는 아내까지 죽음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햄릿은 또 어떠한가? 그가 한심하게 머뭇거리는 사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개인이나 가정 정도가 아니라 국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리어왕은 동정을 받기는 커녕 역사가의 펜에 찢겨져도 부족하다.
5. 반면에 맥베스는 오로지 자신만 파멸했다. 그가 파멸하여 나라는 오히려 평화를 되찾았다. 맥더프는 가족의 원수를 갚았다. 정통성을 지닌 맬컴 왕자가 왕이 되었다. 무대 한편에 쓸쓸하게 남겨진 맥베스의 시체가 어둠에 싸이면서 세상엔 평화와 행복이 찾아왔다. 이것은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희생이 아닌가? 추리소설 속 살인마가 폭로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으면, (부유한 신사숙녀들의) 세상은 평화로워지고 탐정은 명성을 얻어 모두 행복해지듯이 말이다.
첫댓글 지금 마침 멕베스를 읽고 있다. 내가 왜 세익스피어를 읽지 않았을까? 아마 현실과 동떨어진 극이라는 형식과 시적 대사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심기일전하여 세익스피어에 도전해 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