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래에 제가 "한국 젊은이과 제국주의"라는 글에서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씨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언급하였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수년 전에 한국의 사학자들이 그것을 사료들을 들어 입증해놓았더군요.
당시는 중국의 동북 공정 문제가 없던 때인지라 한국 사람들이 무시하고 잊어버렸으나 지금 중국이 만주와의 연고를 들어 고구려를 우리 역사에서 빼앗으려는 지금, 우리는 이런 연구들을 발굴하여 만주의 금나라와 후금도 사실은 한민족의 역사와 다름없다는 것을 강조하여야겠습니다.
고려에게 신라가 망하자 많은 신라 유민과 왕족들이 만주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여진들을 계몽, 규합하여 고구려를 이을 새 나라, 금나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그래서 발해를 멸망시켰던 거란에 복수하고 고려와의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로왔다 합니다... 같은 민족이니까...
물론 고려도 금나라도 서로 자기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니까, 서로가 상대에게 복속하기는 싫었을겁니다.... 그리고 이후 여진에서 성장한 이성계가 여진족과 힘을 합하여 고려를 멸망시켰다고 합니다.
그 밑에 또 하나의 논문도 인터넷에 떠 있던데 수긍이 가는 겁니다. 후금도 한민족이 세운 나라였다는겁니다...조선의 건국에 여진이 관여한 것이 많으며, 그 당시에 여진들은 우리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진들도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금나라도, 후금도 모두 고구려의 후예로서 고려와 같은 한민족의 나라요 역사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중화 사대주의에 젖어서 중화족을 정복하고 억누른 여진족들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들의 역사를 우리 역사에서 제외하고 있었습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제외하였던 것도 여진을 우리 민족에 포함시키기 싫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여진과 경쟁하여야 햇던 고려 왕실의 정책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서 우리도 여진을 우리 역사에 넣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이제 와서 만주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해야된다고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마저 중국에 빼앗길 위험이 증대해진 지금, 일찌기 거란을 상대로 고구려의 후예를 주창하여 강동 6 주를 탈환해온 탁월한 외교가 "서희" 장군의 예를 좇아,
적어도 우리는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던 우리 것을 발굴하여 수호해야겠자는 의지를 잊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는 2명이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 아닌 설악산을 근거지로 왕건에 대항했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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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라 최후의 왕 김부(金傅,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경순왕이 고려 건국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신라 천년 사직을 경솔하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하며 살다가 죽었다는 인물이다.
생몰연대를 전혀 알 수 없는 신비의 인물인 마의태자는 일반적으로 개골산, 그러니까 지금의 금강산에 숨어 살다가 자결한 것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가지 않고 설악산에 갔다! 일찍부터 이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은 서울 보성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했던 김종권씨였다. 이미 작고했는데, 일찍부터 이 사실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친 분이었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건, 설악산에 갔건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저기 다리 품을 팔면서 외치고 다녔을까? 한때 필자도 김종권 선생을 한심한 재야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우연히 이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다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죽으러 갔다는 뜻이고, 설악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신라의 국권을 왕건 같은 반역자―당시 왕건은 일개 반란분자에 지나지 않았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과 설악산이 가지는 상징 코드를 해석해내면 마의태자와 관련한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왕건은 고려의 건국 명분을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국권을 평화적으로 양도받아 은근히 고려 건국에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미하려 했다.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차기 대권 후계자인 태자가 경순왕의 양국(讓國)에 반대한다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왕건은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중신들과 상의했을 것이고, 중신들이 “간단합니다. 태자를 마의태자라 부르게 하시고 금강산에 죽으러 갔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란 이런 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왕건도 이 소리를 듣고 탄복했을 것이고 “그리 하거라” 했을 것이다. 당시 금강산은 그곳에 유배될 경우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地名)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
인제 김부리 지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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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먼저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김부리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폐촌 아닌가. 또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했다는데, 육군에서 재빨리 이 일대를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이 텅 빈 채 서 있고 그 옆에 대왕각이 남아 있다.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이 분지에 마을이 셋이나 있었고 마을마다 대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 남은 대왕각마저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000년 동안 김부대왕각에서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셔온 신라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로 변해버린 것이다.
...(중략)....
마의태자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은 이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탓에, 김부가 마의태자란 사실을 모르고 경순왕으로만 이해했다.
실제로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에 모셔놓은 위패에는 ‘김부대왕 제1자’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나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탑이 마의태자가 죽고 난 후 그 후손이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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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리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기(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기),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골짜기를 ‘맹 개골’이라 전하는데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유물은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가져가버려 찾을 길이 없는데 그 모형이 남아 있다. 철마상을 두고 경주의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천마상(天馬像)을 모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가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철마상은 대장간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符籍)이었다. 이런 부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간에서는 농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도 김부리가 고려에 반대하는 항려운동(抗麗運動) 기지였다는 증거로 이 고을의 특이한 지명을 들 수 있다. 김부리 옆의 마을 이름이 갑옷 갑(甲)자에 진 칠 둔(屯), 즉 갑둔리다.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이 왜 필요했을까. 또 한 골짜기의 이름은 막을 항(抗)자에 군사 병(兵)으로 항병골이니, 이렇게 위험천만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거기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에다, 수거 넘어 등의 지명이 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이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이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 인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와 관계 있다고 믿는 지명으로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을 든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부하인 맹장군이 양구지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해 저장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외에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 경내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라는 전설은 너무 유명하고, 인제와 지척간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지왕동(至王洞)이 있는데,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塔山)을 거쳐 이 마을에 왔다가 인제로 떠났다는 것이다.
다물리 마을에서 해마다 지내던 민속행사 가운데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았다 한다. 대왕각(大王閣) 동제(洞祭)에서는 제상에 꼭 미나리떡과 취떡을 올려놓았다는데, 마의태자가 이 곳에 와서 특히 좋아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제례 때는 절을 네 번이나 했다고 전한다. 천자(天子)가 아니면 4배까지 하지 않는 것이 예다.
이러한 김부리 마을의 동제는 고려 500년 동안 몰래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볼 때 마의태자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마의태자라 하지 않고 경순왕 이름인 김부를 썼을 것이다.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족 몰살의 화를 당했을지 모른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멸망 후 200년 만에 영남지방에서 신라 유민들이 항려운동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무신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고려왕조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마의태자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신라 유민들은 신라가 망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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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는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라벌을 떠났고 뜻을 같이하는 충신열사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는 화랑(花郞)의 나라였다. 화랑의 힘으로 발전하고 또 통일의 꿈을 이룩한 나라였다. 그런 신라가 아무리 타락하고 나약해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려에 순순히 항복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의태자는 화랑답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권을 물려받을 사람이 바로 마의태자 아니던가. 그런 자리를 한마디로 반역자이자 역적인 왕건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그래서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무조건 항복에 극력 반대했다고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 얼마나 의젓하고 화랑다운 말인가. 태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하나 아직 충신과 의사가 많이 남아 있다. 둘째, 신라의 민심이 흩어졌다고 하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셋째,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그만둘 일이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다.
한편 이때 경순왕의 다른 왕자 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가버렸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고려의 관사(官史)인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고 마의태자 한 사람만 반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신라의 왕손인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년, 1642년)’를 보면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기 전에 두 부인(석씨와 박씨)이 있었고 그 사이에 왕자를 여덟 명이나 두었다. 이들 여덟 명의 왕자 가운데 두 사람이 개골산에 들어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즉 마의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중략).......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의태자 후손으로 보이는 김씨가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웠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마의태자의 마지막 거점 한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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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마의태자는 혼자서 경주를 떠나지는 않았다.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조부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서울(경주)을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결연히 개골산으로 떠났고,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가 많았던 것이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가는 경순왕의 일행은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나 이어졌다고 하는데 마의태자 일행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경순왕 일행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마의태자 일행을 보는 군중의 눈에서는 망국의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깊은 산골인 ‘하늘 아래 첫 동네’를 택했을까. 바로 그곳에 한계산성(寒溪山城)이라는 이름난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은 “한계산성은 인제현 동쪽 50리 거리에 있다. 산성은 둘레가 6278척, 높이가 4척의 석성(石城)이다. 지금은 퇴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략).........
그런데 바로 그 내성에 우리가 찾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필승을 다짐했다. 한계산성의 천제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삼신단(三神壇)’이다. 또 거기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그리고 김세진(金世震)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과 경오(庚午), 신미(辛未)라는 간지(干支)로 판독되었다고 한다.물론 세 사람이 어느 시기의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간지의 정확한 연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의선운장이란 의병장을 말하는 것이니, 김성진과 김세진은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장군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신라의 왕족 경주김씨 아니었을까.
간지의 연대도 마의태자 때라면 경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년(970), 21년(971)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망한 해부터 헤아리면 36년 내지 37년 뒤가 된다. 만일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이 산성은 신라 멸망 이후 고려 제4대 광종 때까지 적어도 37년간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유민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성에 올라서서 동쪽을 보면 한계령 고갯길이 눈 아래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동해안 쪽에서 한계령을 너머 침입해오는 고려군을 감시하고 또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개성에서 인제 땅은 너무 멀다. 이곳을 공격하자면 육로보다 동해안에서 진부령을 넘는 것이 훨씬 쉽다. 지금 동해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이 있는데 진부령의 본시 이름은 김부령(金富嶺)이었다는 말이 있다.
.....(중략)......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부터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중앙에서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유배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후대에 조작된 금강산 태자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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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금강산이라는 불교 냄새 나는 이름 대신에 개골산이니 풍악산이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중략)..............
그러나 산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은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분명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학자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일찍이 금강산을 등산, 태자 유적지를 보고 ‘금강예찬(金剛禮讚)’(1927년)이란 기행문에서 이것은 가짜라고 말했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다 끊고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다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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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마의태자가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정의에 불타는 전설 속의 대장부였다면 금강산으로 가지 않고 설악산으로 갔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떠난 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면 하나는 설악산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금강산 기슭 어딘가 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금강산에 그를 추모하고 아끼는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의태자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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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두 가지 가설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의태자 문제에 관한 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엄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0년 전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알려진 발해진을 탐방한 일이 있다.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이요,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금 태조가 공격하여 되찾은 우리의 서울이었다. 가던 날 발해진 광화문 위에는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그곳 조선족 한 사람이 한 말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 땅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우리 땅입니다. 중국 사람 말 듣지 마시구레.”
또 다른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년(1074) 9월,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년)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보고가 들어왔다. 다행히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 것도 같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금준(今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금씨란 우리나라에 드문 성이니 김씨가 맞을 것이고,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이야말로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혁명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대륙을 통일하는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여진으로 떠난 마의태자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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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족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그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당시 여진은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금나라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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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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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出處:.<신동아 2000년 5월호> 著者:박성수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
2000년 4월 3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서 열리는 신라사연구소
(소장 신형식 이화여대 교수) 창립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
저자는 現在 천안 목천 국제평화대학원 대학교 총장으로 재직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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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여진이 세운 후금도 실은 한민족과 같은 역사로 봐야 한다는 논문입니다.. 매우 길어 임의로 중략을 하였습니다.
......(이하 시스템클럽 사이트에서 펌)........
신라의 본토는 만주의 길림성
명나라가 멸망시키고 중원의 주인이 되어 자금성을 차지한 청나라를 살펴보자. 청나라는 신라의 후예라고 자처했다. 후금의 태조는 누루하치다. 그는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한뒤 중원으로 진격해서 중원의 지나족의 땅을 점령했다. 지나족들은 반청복명의 기치를 세워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공산화가 되기까지 최후의 중국 지배자 청나라의 왕족들의 성(性)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후금(後金)은 금나라가 다시 일어섰다고 해서 후금이다.그들이 청나라로 나중에 국명을 개칭했다. 그런데 왜 금나라와 후금왕족들의 성에는 신라가 들어갈까? 신라왕족의 성이 금(金)이 아니던가? 신라가 또한 청구(淸邱)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그들이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고 칭하다가 나중에는 淸이라고 칭했다. 청구(淸邱)에서 언덕구(邱)를 뺀 글자이다.
신라왕족의 성은 금(金)이며 금(金)나라,청(淸)나라 왕족의 성은 신라(新羅)이다. 단지 국호와 성의 위치만 바뀐 것이다. 궁예와 후백제 견훤이 일어나고 왕건이 고려를 세웠을 때 신라의 후예들은 고스란히 고려에 흡수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신라의 후예들은 만주로 가서 금을 세운 것이 아닐까? 고려말에 청나라의 시조가 된 누르하치에 대해 살펴보자
마지막 好太王 淸太祖 愛親覺羅 奴兒哈赤 : 재위 1616∼26
麗末 이성계와 연합하여 조선을 개국한 여진족은 조선에서 벼슬을 받는 등 민족 통합과정을 걷는다. 그러나 남북민족의 통합을 우려한 明조정의 반발과 이방원을 축출하기위한 이성계와의 연합군이 패한 후 다시 野人의 길을 걷게 된다.누르하치는 어렸을 때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고도 한다.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을 즐겨 읽었다. 그의 지략은 천성적인 면도 있지만 이 두 소설에서 얻은 것도 많았다.
후일 建州女眞의 추장이 된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켜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87년 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인 興京老城을 구축하였다.1592년 壬辰倭亂때에는 같은 겨레인 조선에 원군을 보내려고 했으나, 민족 통일을 우려한 明나라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99년에 海西女眞의 哈達를 멸망시키고, 1607년에 輝發, 1613년에 烏拉 등을 병합하여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통일한다. 16년에 칸(汗)의 지위에 올랐다.(유전적으로도 한국인은 남방계와 북방계 두가지 형태가 있다. )
조선의 백성들에게 병자호란을 가져다준 이들이 바로 청나라이다. 그때 한겨울에 수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다가 눈길에서 얼어죽었다고 한다. 조선의 명장 임경업장군은 미처 그들이 임장군이 지키고 있는 성을 피해갈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수도를 급습당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고 결국 청나라를 향해 구배지례를 하는 굴욕을 당하고 청나라에 굴복하게 되었다.
필자가 지금 이야기 하는 바는 청나라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이민족이 쳐들어와 그나라와 문명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경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나라와 전쟁때 일반 백성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던가? 아니다. 대부분 피난길에 눈속에 얼어죽은 것이 원인이었고 마을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거의 안전했다. 사망한 숫자는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로 극소수이며 제대로 전투한번 붙어보지 못했기에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도 못되었다.
임경업장군이 천하의 명장인지라 이들이 먼길을 돌아 수도를 공략했을까? 임장군이 천하명장이긴 하지만 그들 청나라의 팔기군 입장에서 보면 결코 아니다. 적어도 청나라의 팔기군은 소수로 드넓은 중원대륙을 정복한 이들이다. 이들의 팔기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부대의 편성을 8개로 나누어 팔쾌의 원리에 따라 종횡무진 움직이는 팔기군은 진속에 갇힌 적군을 매번 전멸시켰다. 그들의 진에 갇혀 살아난자가 전무할 정도였다고 하니 잔혹성 역시 알아줄만 했다.
그런만큼 자존심과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물며 전쟁에서 비록 실력이 딸리더라도 무인이 전투를 회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팔기군이 피를 보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 먼길을 돌아갔던 것이다. 지략에 뛰어난 임경업장군조차 상상조차 자존심 강한 청나라 군대가 성을 우회해서 수도로 향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청나라는 지나족 병사들이나 타민족의 군대들은 몰살시키면서 우리 조선의 병사들과 접전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청나라는 명나라와 전투때 투항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잔인하게 죽였다) 게다가 수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같은 만행 또한 찾아볼 수가 없다. 타민족 국가를 침략할 때는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런 모습을 곧잘 보이기 마련인데...
단적으로 말해 청나라는 조선을 같은 민족이 설립한 다른 국가로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신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또한 고구려와 같은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자처했다.(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하는 것은 주로 몽고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런만큼 같은 고구려, 신라의 후예인 조선을 지나족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적어도 광해군은 이러한 명과 청의 틈바구니에서 중립외교로 훌륭히 국가를 지켜냈다.(국가의 힘이 약하니 힘을 기를 때 까지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실각하고 청나라를 적국으로 돌리자 청나라는 인조를 목표로 공격해온 것이다.
이때 청에서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는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나온다. 그 문서에서 청국에서는 예로부터 조선과 청은 같은 민족이라는 구절이 나오며 또한 조선에서 원한다면 군신간이 아닌 형제국으로의 예를 갖추도록 하겠다 란 구절이 나온다.
조선의 건국공신이 여진족이며 이지란장군의 동향사람들인 만주족이 힘을얻자말자 이제는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을 군신관계 또는 형제관계로 삼자고 하니 인조로써는 치를 떨 만했다.
명의 입장에서는 만약 조선이 청의 편으로 돌아서면 명의 안위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것이다.
혹자는 명이 임진왜란때 원군 45000명을 보내준 것에 대한 의리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청나라는 임진왜란때 조선이 원군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원군을 보내줄 의사를 보내왔다. 물론 이때 선조가 거절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져 갔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정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무엇과 닯았는가? 그렇다 고구려가 초기 신라에게 했던 모습과 똑같다. 또한 견훤이 신라의 마지막 왕에게 행했던 모습이기도 하다. 언어가 통하고 문화가 같은 민족이기에 이들 나라에 있는 백성들은 언제든 자국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끼리의 전쟁은 늘상 군대끼리의 전쟁이었고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청나라라는 별도의 국가가 체계가 세워지면서 이들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으며 조선의 백성들을 핍박하거나 약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민족에 대한 탄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백제나 고구려가 멸망해서 신라의 국민이 되더라도 거기에서 차별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중국에서 국가끼리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지의 위, 오, 촉이 그랬고 중국내의 국가끼리 전쟁에서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보기힘들었다. 반면에 지나족과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민족과의 전쟁에서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전쟁양상을 보이며 장차 성장하여 군인이될 소지가 있는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만주족은 우리와 완전한 같은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제주도 순수방언을 경상도나 함경도 사람이 처음들으면 무슨소린지 알아듣기 힘겨운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사투리가 오랜시간 변형되어 이젠 언어가 달라져 버렸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신라의 후예다. 이는 그들 만주족의 역사가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가 여진족을 신라의 후예로 인정한다면 만주족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 세운 다른국가였다. 국제적 역사를 깊이있게 연구한다면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고구려,백제, 신라끼리의 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아시아 국가 전체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한적이 단 한번도 없다. 21세기에는 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여진족들은 고구려의 백성이었으며 신라의 백성이었고 고려건국에 참여한 국민이었고 조선의 건국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실제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가 만주 여진족이 살던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는 여진족을 다스리는 고려의 관리였고 증조부,조부까지 그곳의 관리였다.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활솜씨가 뛰어난 것은 바로 여진족속에서 자랐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곳에서 의형제 이지란(퉁두란)을 만나 건국의 뜻을 품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함경도와 같이 한 국가안에 지역적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나는 국민이었다. 여진이라는 말은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이두문자로 같은 뜻이다. 그 말은 광명의 세계를 뜻하는 말로 마찬가지로 밝달(밝은 들), 배달과 같은 뜻이 된다.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의 스키타이 유물과 한반도 신라의 그것은 너무 닮아서 러시아 학자들조차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KBS 일요스페셜.97.3) 특히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줄줄이 달린 곡옥은 지금도 흑해남부와 터키지방에서 발굴되는 스키타이 종족의 것과 일치한다
고구려와도 다르고 백제와도 다른 이 금관의 주인공들의 강역은 카스피해 근처다. 이런 추정이 틀리더라도 최소한 동일한 문화를 뿌리고 가지고 만주 전역과 조선의 의주지역과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같은 유물과 같은 문화양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같은 민족이라고하는 것은 가설일뿐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묻고싶다. 정설이란 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역사의 정설이란 것은 일정한 지역의 유물과 문화양식을 통해 추정되는 내용을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인준한 것이다. 정설과 가설의 차이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준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단지 그차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있다. 코웃음을 치면서 '그렇다면 여진족과 거란족 그리고 몽고인들은 자신들이 고조선의 후예이며 고구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가?'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뭐라고 남의 조상이 우리 조상이라고 우기는가? 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날의 몽고와 거란, 여진족이 '그렇다' 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몽고과 거란 여진족들이 자신들의 선조는 고구려인이고 자신들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지극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정사로써 교과서에 싣고 있다. 몽고와 터키는 대한민국을 형제국가로 같은 핒줄이 세운 국가이므로 대한민국의 발전과 월드컵 4강진출을 매우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다만 여진과 거란은 몽고나 중국에 흡수되어 지금은 자신들이 지나족인줄 알고 있으며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또한 과연 지나족으로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하면 결코 아니올시다이다. 지나족으로 귀속되고 자신들이 중화족인줄 착각하고 사는데 중국인들 중에서도 정통 귀족은 따로 존재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백인중에도 상류층 의 전제조건중 1번인 앵글로색슨족 계통이거나 유대인 이라는 조건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들은 지나족인줄 알고 살고 있지만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정책에 의해 엄연히 불평등한 대우와 처우를 받고 있다. 필자와 친분이 있는 중국 조선족 자치구의 재중한인 대학교수 한분이 중국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증언한 내용이다.
그들은 물론 그들 후손들까지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처우를 받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 중국 조선족들도 엄연한 우리의 동포이며 재중동포로써 재미교포나 재일교포와 똑같은 처우개선을 하려는 법률을 국회에서 상정하려 했다. 그러면 중국은 그런 움직임을 두눈 뜨고 가만히 지켜보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중국은 이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 압력을 넣으며 재중동포의 처우개선에 대한 법률통과를 저지하고 있다.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대한민국이 조선족에 대한 처우가 불평등하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하여 분노하고 있지만 정작 그 원인이 중국에 있는것임을 모르고 있다.
왕건의 오른팔인 유금필 장군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여진족의 영웅으로 고려건국의 1등공신이 유금필 장군이다. 단군조선이 마한, 진한, 번한의 3조선으로 나뉘어져 다스려 졌음을 우리는 기억 해야 할 것이다. . 만주지역은 유목생활을 하고 내륙지역은 농업사회였다. 여진족과 고려, 조선인들은 모두 이 마한, 진한, 번한의 후예들이다.
고려와 여진과 조선은 그렇기에 생활과 문화적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 하나로 생각하고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조선조 초기까지는 여진이 별도의 국가가 아니라 고려의 백성이었으며 조선의 백성이었다. 다만 그이후 청나라를 세우면서 갈라지게 된것이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당시는 분명히 지방 호족세력들이 제각기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을 당시이다.여진족이 별도의 나라를 세웠다면 이들이 고려의 건국에 1등공신이 될 수도 없고 전쟁에 참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 초기까지 지속된다.
태조 이성계의 의동생인 이지란장군(퉁두란) 역시도 여진족이다
태조 이성계가 100발 100중의 명궁이었고 이지란장군도 명궁이었다. 두 장군의 활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에피소드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장군시절 이지란장군이 만나서 활솜씨를 겨룰 때의 일이다. 사냥을 통해 많은 짐승을 잡기로 내기를 하였는데 좀체로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두사람 모두 화살 하나로 짐승 하나씩을 잡으니 실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사람이 동시에 화살을 날리고 어느한쪽이 먼저 잡는쪽으로 하자 하였는데 그때 숲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이지란 장군이 날렵하게 화살을 먹여 날렸는데 숲속에서 부스럭 거리며 걸어나온 것은 짐승이 아닌 나뭇꾼이었다고 한다.
이를 본 이성계가 즉시 화살(노루발 이라는 명칭의 Y자로 생긴 화살촉)을 날려 나뭇꾼을 향해 날아가는 이지란 장군의 화살을 옆에서 두쪽내어 떨어뜨린 것이다. 이를 통해 이지란 장군은 이성계에게 감복하여 평생 형님으로 모실 것을 맹세하였다고 한다.
멸망한 신라 유민들이 만주로 건너간 사실은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그리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고려는 통일신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들 스스로 국가를 내놓았으며 대부분 왕건의 포용정책에 의해 고려백성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만주로 가려면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올라가거나 아님 고려땅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백성들이야 고려에 우호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계급층으로 볼때는 천년의 역사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마의태자의 설화만 보더라도 고려에 대한 반발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주로 가는것이 왜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만약 불가능 하다면 발해라는 나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첫댓글 여진족은 같은 민족인데도 고려때 무시(산물이나 바치는족속)하는걸보면 현재의 혼혈아와 입장이 비슷하네염 같이 놀고 싶은데 않껴주는 ;;
여진도 그룹이 많았습니다. 고려에 내조해서 벼슬을 받는 친고려적 성향을 띤 부족이 있는가 하면 배타고 동해안 습격하던 동여진도 있었고 향도 역할을 하면서 거란의 침략을 유동적으로 만든 부족도 있고 .. 그러니 고려 조정 자체도 여진이란 존재를 확실히 믿을 수 없었겠죠.
멸망한 신라 유민들이 만주로 건너간 사실은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그리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고려는 통일신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들 스스로 국가를 내놓았으며 대부분 왕건의 포용정책에 의해 고려백성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만주로 가려면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올라가거나 아님 고려땅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올라가야만 하는데 이건 좀 그 당시 상황으로 볼때 불가능한 일입니다.
백성들이야 고려에 우호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계급층으로 볼때는 천년의 역사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마의태자의 설화만 보더라도 고려에 대한 반발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주로 가는것이 왜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만약 불가능 하다면 발해라는 나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