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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옹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과 정순옹주(중종의 서3녀)의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송인(宋寅, 1517[중종 12]∼1584[선조 17]). 본관 여산(礪山). 14세. 정가공파(正嘉公派).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庵). 시호 문단(文端). 조선 전기의 학자. 영의정 송질(宋軼)의 손자이며, 송지한(宋之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
▲ 묘역군 우측에 위치한 신도비 |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순수하고 겸손하고 근실하였으며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효도로 이름났다. 거상(居喪) 때에 잘 견디지 못할까 미리 걱정하여 평상시에 하루 걸러 담박한 음식을 먹었다. 놋쇠 그릇으로 요강을 만들지 않았는데, 이는 훗날 망가져 사람들의 음식 그릇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
▲ 신도비와 송인/정순옹주 묘역 사이에 위치한 아들인 돈녕봉사(敦寧奉事) 송유의(宋惟毅) 묘역 전경 |
젊어서부터 경학에 통달하고 예학에 익숙하여 명유(名儒) 이황, 이이 등과 강론하였다. 풍채가 빼어난데다 예절에 익숙하였으므로 정승 노수신 등이 매양 송인이라면 파격적으로 종백(宗伯)을 삼거나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다고 평하였다. 그래서 조사(詔使)가 올적에는 영위사(迎慰使)로 삼기를 계청하였으니, 그로부터 의빈(儀賓)중에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면 영위사가 될 수 있었다. |
▲ 돈녕봉사(敦寧奉事) 송유의(宋惟毅)와 정대년(鄭大年)의 딸인 정부인 동래정씨 합장 묘역 전측면 모습 |
10세에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충훈부·사옹원·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조식(曺植)·이민구(李敏求)·정렴(鄭磏)·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
▲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과 정순옹주(貞順翁主) 합장 묘역 전경 |
특히 글씨에 능하여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楷書)를 잘 썼는데, 이황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저서로는 《이암유고》 12권 4책이 있다. |
▲ 전방 좌우측에서 바라 본 송인/정순옹주 묘역 |
그의 글씨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부안의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
▲ 묘비에는 여성군(礪城君)으로, 정순옹주(貞順翁主) 부좌로 새겨져 있습니다. |
동호(東湖)에 있는 그가 지은 수월정(水月亭)이 유명하였는데, 그곳에 오르면 묘적산의 아침 구름(妙寂朝雲), 청계산의 저녁비(淸溪晩雨), 한강의 가을달(漢江秋月), 아차산의 개인 눈(峨嵯霽雪), 용문산의 푸른 산빛(龍門聳翠), 전교의 들판(箭郊平蕪), 저자도의 돌아가는 배(楮島歸帆), 사평의 나그네(沙平行客) 등 여덟가지 아름다운 풍광이 보였다. 이를 두고 이홍남, 임제 등이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수월정에서의 풍광을 문자로 빛낸바 있다. |
▲ 송인/정순옹주 묘역내 석물 모습 |
수월정은 산수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노래를 잘하는 석개(石介)라는 가기(歌妓)가 있었다. 석개는 특히"수월정사(水月亭詞)"를 잘 불렀다고 하는데, 그 노랫말이 진본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에 실려 전한다.
이성저성하니 이룬 일이 무슨 일고
한 달 서른 날에 잔(盞)을 아니 놓았노라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 듯이 |
▲ 송인/정순옹주 묘역내 석물 모습 |
중종의 딸 정순옹주와 혼인한 송인. 그는 16세기에 문장과 인망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그의 집에 자그마한 계집종 하나가 들어왔다. 비틀린 화살같이 작은 눈에 늙은 원숭이 얼굴을 한, 석개(石介)라는 이름의 계집아이었다. |
▲ 측면에서 바라 본 송인/정순옹주 묘역 |
석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노래를 부르는 일에만 몰두했는데,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주변에 작은 돌멩이를 수북하게 모아 놓고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돌멩이 하나 집어 광주리에 넣고, 또 한 곡 부르고 나면 다시 돌멩이를 광주리에 넣었다고 한다. 나를 잊고 세상을 잊고 노래 부르다 보면, 광주리에는 돌이 가득 찼다 텅 비기가 수차례 반복되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아무리 크게 나무래도 그녀의 노래하는 삶은 전혀 달라질 줄을 몰랐다. |
▲ 송인/정순옹주 묘역에서 바라 본 좌측 묘역군 |
결국 석개의 이야기는 송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송인은 석개에게 노래를 배울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허락하였다 한다. 석개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유몽인은 "근 100여 년 동안 그녀만한 명창이 없었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박지화의 『수암집』에 '선가사', 즉 '가사를 잘 부른다' 라는 기록이 있다. |
▲ 좌측 묘역군에는 10여기의 봉분이 있으며, 후손의 묘역인 듯 합니다. |
석개의 음악은 당시 여러 명상들을 감동시켰다고 하는데, 석개의 노래를 듣고 그녀를 위해 지은 시가 적지 않을 정도이다. 영의정 홍섬은 절구 3수를 지었고, 여러 재상들도 화답하여 큰 시첩을 이룬 것도 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겨룰 만한 이가 없을 정도로 석개가 빼어난 예술 세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데, 옛문헌들에 나타난 한 예술인의 모습, 예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 다음 카페(예율가야미)에서 내용 발췌 - |
▲ 좌측 묘역군에서 멀리 바라 본 정순옹주 묘역 및 신도비 |
▲ 좌측 묘역군에 위치한 다른 신도비각 모습 |
제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 [1488 ~ 1544]
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 ~ 1557]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 ~ 1515]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 ~ 1565]
서1남 복성군(福城君) [1509 ~ 1533] (경빈 박씨) |
정순옹주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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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상단 중앙의 빨간선 마지막 부분이 정순옹주 묘역입니다. 소재지 : 경기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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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초교를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라며, 빨간선의 153m 부분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고, 264m 지점에서 우측으로 접어 들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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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선의 상단 부분에 송질선생 묘가, 하단 부분에 선생의 손자 며느리인 정순옹주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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