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아버지 사람들은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요 비닐하우스의 배추들은 따듯한 나라 꿈을 꿔요
겨울이 오면 아버지 아이들은 아련한 눈길로 이웃을 바라보고요 돌아오지 않는 친구들과 만나는 나라 꿈을 꿔요
추우면 추운대로 나무들은 잠이 들고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나도 이렇게 강가에 서 있고요
넓은 강은 아픈 소릴내며 꽁꽁 얼어만가도 그 아래로 물은 흐르는 것처럼 우리도 어깨를 부비며 흘러가고요
바람이 불면 아버지 따뜻하게 서로의 손을 잡아 주고요 추우면 추울수록 사랑하는 것도 배우지요
귀여운 아버지
최승자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늙지 않는 아버지
이생진
올같이 노인이 흔한 해에도 우리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노인 한번 못 되고 떠나셨다 나는 50이 넘었는데도 그분은 아직도 30대 오늘같이 흔한 경로잔치에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섭섭하다 무덤 앞에는 봄마다 8그분 대신에 할미꽃이 늙는다 그분은 아직도 30대 내가 그분보다 20이 넘었는데도 그분 앞에서는 수염이 나지 않는다
명태와 아버지
마경덕
처마 끝에 매달려 눈을 뜨고 죽은 명태 건들건들 바람에 흔들리다 언젠가 북어가 될 젖은 명태 방망이에 흠씬 두드려 맞고, 그때서야 명태가 아닌 북어라고 깨달을 명태 아가미에 주둥이를 밀어 넣고 물기를 빨아먹는 바람에게 저항할 수 없는 끈에 묶인, 저 명태
막다른 골목 맨 끝 집 문간방에 명태처럼 매달려,
흔들리다 흔들리다 북어가 된 아버지
아버지
정대구
새벽마다 나의 잠을 깨워 주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내가 나의 아이들의 새벽잠을 깨우는 새벽 다만 벽 위에 매달린 긴 잠이 무거우셨던 게지 먼저 먼지 털고 일어나 내려오시는 걸 나도 어느새 아버지가 되어 벽에 걸리고 지금 내가 잠을 깨워놓은 아이가 또 아버지가 되어 제 아이의 새벽잠을 깨우는 새벽 몇 삼년의 긴 잠에서 먼지 툭툭 털고 일어나 내려올 것인가 아버지여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들이여 아들의 아들의 아버지여
아버지
정호승
겨울이다 눈이 내린다 김장독 대신 언 땅에 아버지를 묻었다 좀처럼 눈이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께 - 근황
이향아
어떤 밤엔 가끔가끔 꿈으로 스며 어머니의 깊은 잠을 풀고 오셔서 미련의 밧줄 같은 억센 힘줄이 벽마다 스며들어 새벽이 되어요
한밤에 큰 바다 해일을 지나 어머니 옷고름 풀려 있어요 동여맸던 옷고름 풀어 헤쳐요 복숭아꽃빛 어머니의 취기 피어나요, 피어나요 울고 싶은 아침
아들 낳고 딸 낳고 그럭저럭 살아요 죄지요 그럭저럭 사는 것은 죄지요 질기고 때 타는 줄 모르는 갈색 털목도리 같은 신랑들을 만나서 꼬막 조개, 속찬 알토란 같은 각시들을 만나서
나는 가을 한창 시샘으로 벙글어요 산 그늘에 강둑 위에 지천으로 피어 이상해요, 내 신랑은 내 사랑 그리움을 걸어 두고 보아요
서른 여덟 나들이간 젊은 장인 부끄려요 내 사랑 그리움은 남아돌아요
아버지와 아들
서정홍
바쁜 일 있으면 허둥거리는 것도 학교에 걸어가면서 동화책 읽는 것도 미역국 콩나물국 좋아하는 것도 조금만 피곤하면 변비 생기는 것도 뒷간에 앉아 만화책 보는 것도 그날 일 그날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야단스러운 것도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 뒤적거리는 것도 다 닮았다, 내 아들은 모기에게 물려 가려우면 참지 못하고 긁어 대는 것까지도
그러나 꼭 한 가지 닮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시장 바닥에서 가장 싼 미역을 좋아하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파 생미역을 씹어 먹고 학교를 가던 옛 생각이 떠올라 이 애비는 가슴 아프단다.
아들아 네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일하지 않고는 밥 먹지 말아라. 이것까지 이 애비를 닮으면 다 닮는 것이란다.
아버지와 자장면
이영춘
내 어릴 적 아버지 손목 잡고 따라가 먹던 자장면
오늘은 그 아버지가 내 손목 잡고 아장아장 따라 와 자장면을 잡수시네
서툰 젓가락질로 젓가락 끝에서 파르르 떨리는 자장면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처럼 혈흔처럼 여기저기 툭툭 튀어 까만 피톨로 살아나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 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런닝구
안도현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등판부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너덜너덜 살이 헤지면 쓸쓸해져서 걸레로 질컥거리던 런닝구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방바닥에 축 늘어져 눕던 런닝구 마흔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는 런닝구
아버지의 비밀
박철석
아버지는 순농사아비였지요 농사 일은 아버지의 천직이였지요 열다섯에 황포갯가 최씨집 막내 처자에게 장가 들었어요 나는 유자나무 울타리가 팽팽히 서 있는 외가를 무척 좋아 했어요 그리고는요 외가 마당에는 사철 구슬 같은 파도가 조잘대고요 괭이바다에서 퍼 올린 시퍼런 대구, 뽈낙, 우륵 들이 빨간 눈알을 굴리며 어린 내 고추를 노려 보곤했어요 그런데요 아버지 젊은 날에는요 들꽃 같은 풋풋한 이야기 하나 감추어져 있었어요 같은 동네 황씨 과수댁이 마음에 있었는가 봐요 아버지는 과수댁 농사 일을 번번히 거들고 했어요 어머니 심청은 칼날이 섰지요 과수댁 황토밭을 갈거나 타작을 거드는 날에는 어머니는 과수댁 문밖에서 뒤를 밟았어요 그날 저녁에는 뒷집 멍멍이도 입을 꼭 다물었어요 버들재를 넘어 오던 보름달도 발을 멈추고 눈감아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안상학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전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아들 딸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퀴를 찾을 무렵 아버지의 바퀴는 오토바이 두 대째로 굴렀다. 아들 딸들이 자동차 바퀴에 인생을 실었을 무렵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끝났다. 뺑소니 자동차 바퀴가 오토바이 바퀴를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마지막 바퀴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그때의 택시바퀴였다. 석 달 긴 끝에 깨어난 뒤 바퀴 읺은 아버지의 인생은 지팡이였다. 걸음 앞에 꾹꾹 점을 찍는 아버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하나 남은 바퀴는 죽어서 저기 갈 때,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의 노동은 오토바이 바퀴가 찌그러지면서 끝이 났다.
아버지의 침묵 ― 급보
이만주
충격적인 날은 충격적인 말은 안 하기
사람이 죽었단다
얘들아 모여라 배고프다 조용히 밥 먹자
홍어
정병숙
지푸라기에 한 꾸러미 홍어를 매단 아버지 등이 풍덕천 오일장 달무리 앉은 겨울 그루터기처럼 수척하였다 굵은 땀방울에 살 삭는 냄새가 났다 팔 남매를 둔 무릎 아래 새끼줄 얽힌 한 시절은 홍어를 썩히는 데 다 지났을까
홍어 안주 탁주 한 잔에 진양조 육자배기 배어나고 니들도 더 살어 봐 빠진 이 사이사이 배알이 톡톡 터지는 소리 얼큰한 초저녁 술잔 위에 떠오르는 황토빛 그림자 너머 막막강산에 젖어오는 헛기침 소리.
첫댓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군요...아버지와 다정하게 대화도 나누지 못한 것이, 가슴이 메입니다. 대화를 못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젊으셨을 때 아버지는...돈만 벌어다 주는 사람...늙으신 아버지...귀가 나빠 잘 못든는 사람...아버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