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선생의 시호를 받기 위한 노력은 현재 남아 있는 천일재 홍중현의 시장과 성재 허전 선생의 시장 그리고 송암실기에 있는 두와 최흥벽 선생의 상소문을 기초할 때 시운이 불행하여 시호 청원이 무산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시호를 받기 위한 노력이 송암공의 집안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니성에 송암공의 양손이신 "정"자 "황"자 어르신의 손자이신 "윤"자 "경"자 어르신과 천일재 홍중현 선생간에 주고 받은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두분이 처남관계로 홍중현 선생의 개인 문집인 천일재 유고에 서간 내용이 있습니다.
남양홍씨이신 천일재 선생께서 남인이시고 숙종연간에 벌어진 남인과 서인의 세력다툼(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내용 입니다)에서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완전히 조정에서 세력을 잃은 상황에서 1714년에 시장이 작성되어 조정에 제출되어 아마 조정에서 검토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후에 영조 실록에 보면 궁의 수문장이시던 송암공의 5대손이신 재(梓) 공을 부르시고 "내가 너의 선조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때 "안타까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아무튼 후에 영조대왕의 성은으로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자주 등장하시는데..송암공 이후에 아마 외직이지만 울산좌수사로 절도사에 제수되실 뿐 아니라 서인의 시기 질투에도 불구하고 남인으로써 상당히 높은 벼슬을 하시게 됩니다.
송암공의 신도비명을 번암 채제공선생께 받으신 분도 "재"공 이십니다.
비록 천일재 선생께서 "윤"자 "경"자 어르께 시호 청원 시 예를 들어 경주 최씨인 정무공 최진립 어르신의 시호를 받은 경위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하지만 첫번재 시도에서는 시호를 받지 못합니다.
아마 이때 시호를 받으려고 했던 이유가 송암공으로 4대에 이르러 사당에서 신주를 천위하여 매안하는 일로 인하여 시호를 받아 국불천지위 받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찌된 연유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모계 선생의 모계집에 울산의 충효당 이건기 내용을 봤을때 불천지위를 위한 충청도 니성에 사당이 세워지고 당호가 충효당이라 채제공께서 당호를 내리셨다는 기록을 봤을때 송암공의 불천지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족보 서문과 노성 장선파에 속하시는 분들의 묘의 위치를 언급할때 구암서당, 신양분암 이라는 제실을 뜻하는 말이 있는데 .. 충청도에 광명제 말고 제실이 여러곳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분들이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 후에 영조와 정조 연간에 고령의 사림인 두와 선생께서 상소를 올리시고 거의 100년 뒤에 성재 허전 선생께서 송암공의 시장을 작성한 것이 있습니다.
때가 바야흐로 갑술환국 후 약 150여년 동안의 서인들의 장기 집권에서 고종의 등극과 함께 흥선대원군께서 정권을 잡으면서 남인을 등용을 하시면서 남인들이 시호를 받을 수 있는 때가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대원이 대감이 서원철폐로 인한 유림들의 반발과 고종과 명성왕후와의 정치적 패권 다툼에서 밀려남으로 인해 1873년 늦가을에 실각함으로써 남인이 다시 실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도 시호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재 선생께서 작성하신 시장 중에 대산 이상정 선생의 시장이 있는 데 대산 선생의 시호는 나라가 망하기 바로직전인 순종 때인 1910년에서야 시호가 내려집니다.
따라서 송암선생의 시호는 조정과 나라의 격변기에 시운이 따르지 않아 시호를 받지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첫댓글 두와선생께서 상소를 올린 시기는 병오년 순조 9년인 1809년 입니다. 두와선생께서 돌아가시기 3년 전에 상소를 올리신 것이 두와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