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마태복음 9:27-31
봄철에 피는 아름다운 꽃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맹인들은 아름다운 꽃들을 보고 즐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손자 손녀들의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가버나움에 두 맹인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니 눈들이 밝아졌다는 짧은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을 때에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에게 ‘내가 능히 너를 구원해 줄 것을 믿느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능히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을 때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관리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거기에서 떠나가시는 길에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관리’(18)는 ‘지위가 있는 자’란 의미로 마가와 누가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했습니다(막5:22).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고 거기에서 떠나 집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두 맹인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두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 입니다.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또 다른 맹인 한 사람 있습니다. 길 가에 앉아 구걸하던 여리고에 거지 바디메오 입니다(눅18:38).
당시 여리고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가르쳐 주는 말을 듣고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아는 것과 ‘다윗의 자손’으로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나사렛에 자라고 사는 사람으로 인간 예수를 의미합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시골뜨기에 불과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나사렛을 매우 천한 시골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은 구약에서 예언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실 메시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여리고에 맹인 바디메오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지만 년대 순서로 따지면 가버나움의 두 맹인이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죽은 자신의 딸을 살려주신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두 맹인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의 눈을 밝았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눈을 밝게 하고 어두운 귀를 들을 수 있도록 해 주며 말못하는 혀도 노래하게 하며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도 부르지 않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나사렛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를 볼품없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예수를 나사렛 사람으로 알았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예수로 아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는 다른 예수가 아닌 한 분이지만 나사렛 사람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으로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저주냐 구원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가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죄가 있어서 맹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맹인으로 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저가 맹인 된 것이 자기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요9:2). 가버나움의 두 맹인도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아 왔을 것 입니다. 인간적으로 희망도 믿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소망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맹인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어둔 눈을 밝게 해 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대단한 믿음과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맹인들도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고 고침을 받았다는 것과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맹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게 된 것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믿게 되었다기 보다는 성령께서 도와주셨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게 되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세주로 믿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으로 알았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게 된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두 맹인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눈을 고쳐 달라고 간청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리고에 맹인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지르며 계속 따라 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했을 때 바디메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눈을 밝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구하지 않았던 것을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아는 사람들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구합니다. 지금까지 바디메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푼을 달라고 구걸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게는 한 푼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구하지 않았던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한 푼을 구합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집은 가버나움에서 공생애 3년 동안 거주하시던 집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으며(4:13), 본 동네라고(9:1)고 했습니다. 죽은 딸을 살리신 회당장의 집에서 예수님이 거주하신 집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웃집처럼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두 번 소리 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며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듣지 못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다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맹인들에게 칭찬을 하시고 축복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들은 측도 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이 집에까지 따라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알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질렀지만 들은 측도 하지 않을 때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보다’ 라고 의심을 하고 실망했더라면 더 이상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집에까지 온 것입니다. 긴가 민가 했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들의 이와 같은 확고부동한 믿음의 진위를 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은 나를 구원해 주실 분으로 흔들림 없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맹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들어간 그 집은 예수님이 거주하시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병자를 고치신 집으로 오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구원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받는 곳입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두 맹인을 향하여 입을 여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을 믿느냐’고 물어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입니다. 믿음을 확인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기 전에 언제나 이처럼 믿음을 요구하시고 확인하셨습니다. 믿음이 이적의 원인이요 또한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맹인들의 간구가 단순히 절망에서 나온 부르짖음이 아니라 것입니다. 확실한 믿음에서 나온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과 권세를 믿었음을 보여 주는 진실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야 말로 그들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들에게 ‘내가 능히 너를 구원할 것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 해 주실 것을 믿는 가를 확인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이야 말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두 맹인의 눈들을 예수께서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둔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병고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맹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스런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욱 크게 북돋아 주기 위한 동정어린 행동으로 보입니다.
맹인들의 어둔 눈을 밝게 하신 것은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충분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란 ‘너희가 믿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던 맹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았고 또 능히 자신의 눈을 밝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밝게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맹인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의 아름다운 세계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을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쁜 손자 손녀의 얼굴도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눈을 밝게 해 주신 예수님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도 사함 받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낙원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와 여러분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뿐 아니라 능히 죄도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합시다. 그래서 세상에서 나를 불쌍하게 만든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나아가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서 맹인이었던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찬송하며 영생복락을 누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