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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과연 폭군이었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이나 48대 경문왕이라고 한다. 태어난 날이 음력 5월 5일로 옛 사람이 흉일로 여기는 날짜였고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하늘에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어 높은 곳에서 던져 죽이려는 것을 유모가 가까스로 받아 구출했다고 한다. 또 이때 실수로 유모가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유모가 어린 궁예를 품에 안고 담을 넘다 넘어지면서 눈을 찔렀다는 전승도 있다.
궁예가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서자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많다. 일단 신무왕이나 문성왕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천 김씨, 광산 이씨의 족보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물론 족보라는 것은 조상에 대한 과장된 전승과 황당무계한 전설까지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긴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일반적으로 악인으로 규정되었던 궁예를 일부러 자신들 가문의 조상으로 내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이들 가문이 궁예의 후손일 가능성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보아 궁예를 주로 연구한 여러 학자들 중 하나인 이재범 교수는 이 기록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라 왕실과의 직접적 혈연관계를 부인하는 주장들도 많다. 예를 들면 임용한은 아예 대놓고 궁예의 출생 이야기는 전형적인 술자리 허풍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비하할 정도. 대표적으로 여자 한 명이 눈이 찔려서 마구 우는 아이를 데리고 몰래 도망치는 게 가능했겠냐는 것.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에는 그렇게 높은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 물론, 임용한도 궁예가 진골 방계나 어쩌면 진짜 신라 왕자일 가능성 자체는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지만, 궁예가 버려지는 과정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궁예가 적어도 신라의 지배층 출신이라는 설은 부정하기 쉽지 않고, 궁예시대 당시부터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적어도 신라 말기에는 왕을 둘러싸고 바람 잘 날이 없었으므로, 왕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왕이 될 수 있었던 신라 지배층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가령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신라의 왕자라고 굳이 사칭할 필요는 없었다. 신라 북부의 호족들이 대부분 고구려계였고, 이들은 신라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내세웠는데, 이들을 아우르기 위해 사칭을 했다면 차라리 고구려 왕족의 유민이라고 사칭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먼 옛날인 고구려보다 생존해있는 신라 왕실의 권위가 더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백제 부흥을 주장한 견훤도 신라왕의 자손임을 사칭했다.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었다는 일화를 비롯해서 신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궁예는 신라의 지배층에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는 궁예 자신이 신라지배층과 모종의 악연이 있으며, 신라지배층에서 밀려난데 대한 원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궁예가 자기 출신을 사칭했다면 고려의 궁예 격하 과정에서 출신을 속였다는 언급이 있었을 텐데 그런 흔적도 없다. 궁예 말기를 보면 완전히 사이코패스 패륜아인데, 고려의 사서들은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궁예의 행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정작 고대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출신을 가지고 궁예를 까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대에서 혈통은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가문이나 혈통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은 항상 정적들에 의해 공격받았다.
가령 고려사에서 고려왕조가 어긋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도 기술하거나 혹은 사기에서 진시황을 여불위의 아들로 묘사, 그리고 조조를 비난하면서 조조가 내시의 후예라든지, 거지의 아들이라고 폄하되고 있다. 만약 궁예가 신라왕족을 사칭을 했다거나 혹은 그의 출신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면 고려의 사서에는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다. 허나 고려 왕조로서는 궁예가 신라 무슨 왕 아들이니 하는 말이 의심스럽다고 해도 굳이 부정할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설은 궁예가 신라 왕자 출신으로 신라를 핍박한 불효 불충한 인물이므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왕건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론이 딱 그런 논지로 쓰여 있다.
학자 중 일부는 궁예가 왕족의 후손이 아니라 권력 투쟁에서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손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궁예가 신라에 대해서 증오심을 품은 이유도 그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 왕족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는데 무열왕의 후손으로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다음, 명주로 밀려나 명주군왕을 칭했다는 김주원, 김주원의 아들로 장안국을 세웠다가 몰락한 김헌창, 김헌창의 아들로 역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김범문 등의 사례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어릴 적에 성격이 괄괄하여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유모가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자 궁예가 뉘우치고 출가해 세달사(世達寺)란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는 것. 궁예는 법명을 자칭 선종(善宗)이라고 하고 장성할 때까지 세달사에서 지냈다. 궁예는 이곳에서도 신체를 단련하는데 힘을 썼다고 하며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없는 그냥 민간 설화 내지는 후대 작가의 창작이다.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대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바리대에 까마귀가 떨어뜨리고 간 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고 궁예는 자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을 예감했다고 한다.
미륵정토를 꿈꾸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자 궁예는 세달사에서 나와 죽주(안성)에서 한창 세력을 날리던 기훤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의 재능과 인물됨을 잘 알아주지 않았고 궁예는 더이상 그의 휘하에 있어봤자 비전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후 궁예는 함께 기훤의 밑에서 활동하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기훤을 떠나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있던 백성들에게 공평무사한 궁예의 행보는 당연히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양길의 부하가 되어 여러 성을 정복한 궁예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자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여 894년에 명주를 점령했다. 당시 명주의 성주는 김순식으로 신라의 진골 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태백산맥 동쪽, 오늘날로 치면 영동지역에서 엄청난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중에 왕건에게 항복했을 때 왕건이 대광 벼슬을 주고 자신의 성씨까지 하사해서 왕순식이 된 것을 보면 아무리 궁예의 군대가 강했다고 해도 김순식을 무력으로만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김순식이 기득권을 보장받는 대신 명주를 궁예에게 바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김순식은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에도 10년 넘게 왕건을 반대하며 항복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김순식과 궁예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양길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고 나서 899년에는 본격적으로 양길과 대립하기 시작하더니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소백산맥 이북의 영역을 거의 장악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지금의 개성시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과 인근의 패서지역 고구려계 호족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왕건은 이 시절 승승장구해 나갔다. 그런데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고치고 겨울 추위가 굉장히 혹독한 바로 그 철원에 도읍을 삼았다. 후고구려가 망한 게 혹시 겨울 한파 때문인가? 왜 궁예가 3년 만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와 연호를 고쳤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적으로는 왕건을 위시한 고구려계 호족들의 세력이 궁예의 왕권에 장애요소가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마진이란 이름 자체가 불교용어 마하진단(摩荷震檀)의 준말, 혹은 마한, 진한을 의미하는데, 어떤 뜻이 되 든 고구려의 이미지만으로는 삼국통일이 어렵다는 시각 하에서 내려진 결정이란 것이다. 실제로 궁예는 901년에 보였던 친고구려적 성향을 철원에 천도하고 나서는 버렸다. 신라의 오소경중 하나인 청주 주민들을 철원으로 이주시키고 아지태를 위시한 백제계 호족인 청주 세력들을 적극 등용한 것 등은 궁예가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출생 탓인지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내심 속으론 신라계를 포함한 여러 계통의 세력들을 이용해 고구려계를 견제할 정도로 냉철한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몰락의 징후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속설에 따르면 오행설에 근거한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로 금의 기운으로 일어난 신라의 금덕을 잇겠다는 의도에서였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고려사에 의하면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으며, 사왕진안관심법(觀心法)으로 사람의 마음을 뚫어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궁예가 자신을 부처에 비유하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미륵으로 칭한 것은 신라후기 혼란한 시대에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을 민중들에게 구세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관심법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방책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궁예의 왕권강화책은 지나친 나머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미륵신앙을 활용해 자신의 왕권을 높이려는 생각은 미륵신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던 법상종과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궁예의 미륵신앙 정치화에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법상종의 거두 석총을 처형하는 사태로 나타나고 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가 20권의 불경을 손수 집필했는데 이게 요망스러운 불쏘시개여서 이 강설을 듣던 석총이 이런 해괴한 이야기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석총이가 마군이야 마군이가 쓰였어 하며 대놓고 욕을 먹고 철퇴를 맞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궁예가 썼다는 경전의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이 어쨌건 대놓고 경전을 제멋대로 찬술한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이다. 게다가 승려를 무참히 살해했으니, 당시 불교계에서는 승려와 신도를 불문하고 충격과 공포를 받았을 것임이 분명하고 미륵신앙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행태는 불교 교단의 반발을 샀을 것이다. 또한 궁예는 관심법을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듯하다. 궁예는 점점 정적들에게 무자비해졌으며 자신의 왕권강화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왕비 강비를 잔인하게 죽이고 이를 말리던 아들 청광과 신광까지도 죽이고 만다.
고려사는 이를 궁예의 광기로 규정했지만 아마도 궁예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강비가 자신의 아들들을 앞세워서 궁예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할 것을 우려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강비의 죽음에서 궁예가 노린 것은 왕건이라는 지적도 있다. 폭정을 멈추라고 간하는 강비에게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했다라고 누명을 씌워 죽인 것은 패서계 호족들을 대변하는 강비가 패서계 호족들의 대표격인 왕건과 정세를 논했거나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을 암시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강비의 죽음 이후 패서의 고구려계 호족들은 궁예가 자신들을 제거할까 두려워한 것 같다. 이들의 우려는 그간 왕건만은 건드리지 않았던 궁예가 왕건마저도 반역을 했다며 죽이려드는 사건을 통해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도를 철원으로 정한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정책이었다. 일단 너무 추워서 철원이 비록 풍요로운 평야 지대이지만 철원 자체의 생산력만으로 수도의 경제를 유지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마땅히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편리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당시의 철원은 이러한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데다 수운 교통이 발달한 당시, 한탄강을 이용한 수운이 원활하지 않은 철원은 사람의 이동이나 물자 이동이나 꽝인 곳이었다. 이 때문에 수도의 쌀값은 크게 치솟았고 백성들의 반감은 계속 커지게 되었다.
정개 5년인 918년. 왕건을 옹립하려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이 궁예에게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변장을 하고 부양 산골현으로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날로 먹던 중, 백성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보리이삭은 날로 먹을 수 없는데 이걸 먹을 정도였다는 건 상황이 어려워짐을 비유한다고 보면 된다.
궁예의 최후에 대해선 분분한데 <광산이씨소고>에 따르면 궁예왕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방면으로 도주 중 수풀 속에 숨은 폭도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이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하게 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왕후의 례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철원 일대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궁예왕은 쫓기어 삼방골짜기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한 스님 만나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으나, 스님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궁예 세력이 간단히 붕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철원지방에서는 궁예가 강을 건너 도망갈 때 한탄했다면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붙었다거나 궁예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의 군대와 대결하거나 산에 은거해서 싸웠다거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안내까지 해줬다는 민간전설도 있다. 실제로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열렬한 궁예 지지자였던 명주의 김순식은 4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았을 정도였던 걸로 볼때 왕건의 쿠데타는 전체적인 지지를 받은 게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웬지 항우의 최후와 비슷하다
평가와 후일담
물론 잘못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궁예는 상당히 능력 있는 정치가였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또한 일개 떠돌이 중이었던 신분에 출발해서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떨쳤던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대개 성공한 반란 이후에는, 으레 구지배체제에 대한 격하와 깎아 내림이 뒤따르지만 왕건이 등극한 이후 10여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전주(大王前主)라고 일컬어지며 선각사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다.
궁예의 몰락은 너무 성급하게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왕건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회유책을 쓴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 회유책이 왕건 사후에 불러온 다툼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궁예의 성급한 왕권강화가 옳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용한처럼 궁예의 능력과 그릇은 딱 도적 두목 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일국의 왕이 될 그릇은 아니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늘날 휴전선 비무장지대 안에는 궁예가 건설한 철원성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비무장지대인 탓에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요원한 상황이다. 철원성 유적은 하필 재수 없게 휴전선이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통일이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이번엔 경원선이 철원성을 완벽하게 관통한다. 하지만 현재 경원선은 단선에다가 선형이 약간 좋지 못한 관계로 통일 후에 철원성 유적을 보존하면서 주간선인 경원선을 복선 또는 복복선화 시키면서 이설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경원선 백마고지역 연장공사는 선형문제로 선로를 약간 변경했다.
궁예는 과연 폭군이었나?
당시 궁예의 폭정 증거로 ①부인 강빈과 두 아들 살해 ②당시 불교 고승들을 살해하고 자체적 불경제작 ③자신이 제작한 불경을 비판한 불교 세력 숙청 ④호족과 공신세력 숙청 ⑤사치와 낭비로 민심이반 ⑥신라계 차별 ⑦미륵신앙을 이용한 사이비 교주 등이다. 그러나 최근에서는 역사가 승자입장에서 기록된다는 것을 보면 막역한 폭군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궁예가 부인 강빈과 그 두 아들을 살해한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빈의 친정세력이었고 이들은 궁예와 강빈의 두 아들을 내세워 궁예의 왕권강화에 저항하였다는 역사학자들간의 주장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 숙청과 해괴망측한 불경제작도 당시 귀족중심의 불교에 익숙한 불교계에 민중중심의 불교를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도 보는 왕권강화의 일환이었으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문제를 진정시키기 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민중이 백성들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