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이산가족 화상상봉센터 개소식 열려
8.15 이산가족 시범화상상봉을 위한 이산가족 화상상봉센터의 개소식이 오늘 오후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에서 열렸습니다. 오늘 개소식에서는 대전과 부산 등 전국 5곳에 설치된 지역 화상상봉장과 서울 상봉 센터를 연결하는 화상 대화 시연도 이뤄졌습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기존 전화 직통선에서 한 단계 발전돼 화상 직통선이 연결됐다는 데 이번 8.15 화상상봉의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 남북이 소통하는 대화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화상 상봉이 실현이 기존 대면 상봉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오는 15일 열리는 시범화상상봉은 지난달 남북간에 연결된 광케이블망을 통해 남북의 이산가족 20명 씩이 대형 화면을 보면서 상대측의 가족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KBS 뉴스
[2000년] 프랑스 화가 카르주(Jean Carzou, 1907~2000) 사망 철사가 얽힌 듯 한 선의 화필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장 카르주가 2000년 8월 12일 도르도뉴 지방에서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시리아의 아르메니아계 집안에서 태어난 카르주는 1924년 파리에 발을 디딘 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정치인 캐리커처를 그리다가 점차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 삽화, 무대 미술 분야에서도 활동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노스크의 프레장타시옹 교회에 묵시록의 풍경을 담은 대형 벽화를 남겼고, 오페라 극장과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공연물 무대 미술과 의상도 맡았다. 랭보, 이오네스코, 헤밍웨이 등 유명 문인들의 작품에 독창적인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77년 프랑스 미술원 회원으로 선출됐고, 레종 도뇌르와 문학 예술 훈장 등을 받았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금융실명제 발표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긴급명령을 발동,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한국은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국내 저축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예금주의 비밀을 보장하고 가명·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차츰 경제가 성장하고 금융거래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하경제를 부추기게 되었고 완전한 종합소득세제 실시가 불가능해졌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등 각종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1982년에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그 폐혜가 극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같은 해 '7·3조치'를 발표해 1983년 7월 1일부터 종합과세와 자금출처 조사가 포함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83년 7월 제정된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은 핵심사항이 모두 빠진 채 통과되었으며, 실명에 의한 금융거래 의무화 시기도 연기되어 부동산 투기와 저축 감소현상 등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말 정부는 다시 한 번 금융실명제의 전면적인 실시를 천명했으나 1989년부터 경제가 어려워지자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기습적인 금융실명제 실시 선언이 있고서야 이 제도가 실행되었다. 실명제의 실시 이후 우려했던 부작용들이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실명제의 궁극적 목적인 세금탈세 근절, 검은 돈 흐름의 차단, 지하자금의 양성화 등에 대해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82년] 미국의 영화배우 헨리 폰다(Fonda, Henry, 1905.5.16~1982) 사망
네브래스카주(州)에서 출생하였다. 미네소타대학교를 나와 언론계에 뜻을 두었다가 배우를 지망하여 1929년 브로드웨이에서 무대배우로 첫출연하였다. 폰다는 연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네소타대학교 신문학과를 중퇴하고 뉴욕 시에서 연극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브로드웨이에서 여러 연극에 출연하다가 1935년 〈농부 결혼하다 The Farmer Takes a Wife〉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목숨은 하나뿐이다 You Only Live Once〉(1937)의 주역을 맡았으며,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 Lincoln〉(1939)·〈내 사랑 클레멘타인 My Darling Clementine〉(1946)·〈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40) 등에 출연하면서 개성 있는 미국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굳혔다. 폰다는 소박하고 자연스런 스타일의 만능 연기자로, 낭만적 희극물 〈숙녀 이브 The Lady Eve〉(1941), 서스펜스 스릴러 〈악한 The Wrong Man〉(1957), 사회성 짙은 드라마 〈옥스보 사건 The Ox-Bow Incident〉(1943)·〈12명의 성난 사람들 Twelve Angry Men〉(1957) 등에서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1955년에는 〈미스터 로버츠 Mister Roberts〉를 각색한 영화에 로버츠 역으로 출연해 토니상을 수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그뒤 〈안전장치 Fail-Safe〉(1963)·〈때로는 훌륭한 생각을 Sometimes a Great Notion〉(1971) 등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틈틈이 연극 무대에도 섰다. 1974년에는 1인극에서 클래런스 대로 역을 훌륭히 연기했다. 1978년 미국영화연구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고, 1982년에는 〈황금 연못 On Golden Pond〉(1981)으로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81년] IBM PC 첫 등장
← 첫 출시된 IBM PC `PC5105 1981년 8월 12일 미국의 IBM이 뉴욕에서 기자들을 모아놓고 신개념 상품인 PC5105를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PC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보다 5년 앞서 애플컴퓨터가 ‘애플’이라는 개인용 컴퓨터를 출시했지만, 전문가들은 IBM PC를 PC의 원조로 꼽고 있다. 무엇보다 애플컴퓨터의 8비트 컴퓨터는 일부 매니아를 위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PC (Personal Computer)는 이제 개인용 컴퓨터를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지만 당시는 제품명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였다. IBM은 인텔이 만든 중앙처리장치(CPU)를 최초의 PC에 집어 넣었다. 또 PC를 움직이는 운영체제로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DOS를 선택했다. PC 사업에 동참한 두 벤처기업은 21세기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IBM은 처음 1986년까지 24만1683대의 PC가 보급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PC는 IBM의 상상을 뛰어 넘는 속도로 성장했다. 1983년 12월 타임지는 PC를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로 선정해 논란을 불렀다. 무생물이 최초로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자리에 선 것이다. 첫 PC는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8088칩(속도 4.77㎒)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MS DOS 1.0,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64킬로바이트 메인메모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드디스크나 CD롬드라이브와 같은 저장장치는 아예 없었으며 마우스도 그 당시에는 없었다. PC의 판매량과 제품 성능은 광속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1981년 첫 해에는 대략 4만대의 PC가 팔렸지만 컴팩, 텔과 같은 PC업체가 등장하며 판매대수가 매년 갑절 이상 늘었다. 또 XT와 286AT라는 1980년대 제품을 거쳐 1990년 이후 386, 486 PC가 등장하면서 PC의 성능도 광속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94년 이후 PC가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PC는 세계경제의 심장이 되었다. 2000년 말 기준 보급대수는 5억여대에 달했다.
[1877년] 에디슨, 축음기 발명
← 자신의 납관식(蠟管式) 축음기를 작동해 보이는 에디슨 1877년 8월 12일 미국의 발명가인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했다. 축음기는 바늘이 회전하는 레코드(축음기판)의 홈을 따라갈 때 생기는 진동으로 소리를 재생시키는 장치이다. 이러한 원리의 장치는 1857년 처음 등장했지만, 축음기는 대개 에디슨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에디슨은 음향전신의 변형이라고 생각되던 전화에서 수신된 메시지를 사람 음성의 형태로 바꾸어줄 기구를 개발하던 중 우연히 축음기를 발명했다. 이 발명 덕분에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멘로파크의 마술사’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10년 가량이 지난 후 에디슨은 뉴저지 주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축음기를 상업적으로 생산해내는 데 성공했다. 축음기는 에디슨의 또 다른 발명품인 알칼리 내장 전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당시는 가정용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축음기를 돌리는 전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알칼리 내장 전지를 고안해냈다.
[1971년] 대한적십사자, 1천만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1971년 8월 12일 남북한의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남북한적십자사 대표가 서울·평양이나 어떤 제3의 장소에서 회담할 것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적십자사는 14일 평양방송을 통해 이 제의를 수락한다고 밝히고 회담은 판문점에서 하자고 주장했다. 한적이 이에 동의, 8월 20일 남북한 측 대표가 역사적 첫 대화를 가졌다. 이날 한국 측 대표로는 이창령 윤여훈, 북한 측 대표로는 서성철 염종련이 참석해 9월 16일까지 5차회담을 거쳐 예비회담의 기틀을 마련했다. 남북한 적십자 예비회담은 12월 17일까지 13차례나 열렸다.
[1960년] 윤보선, 4대 대통령 당선
4월혁명 후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 유일했다. 1960년 7월29일에 치러진 민의원ㆍ참의원 선거는 민주당이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무려 172석(78.5%)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지만 민주당 내 신ㆍ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팽팽한 의석 분포를 이룬게 문제였다. 갈등이 내연하는 가운데 신ㆍ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기 위해 암투에 들어갔다.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고 신파는 대통령 자리를 윤보선에게 넘겨주되 총리는 자파(自派)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윤보선의 대통령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8월12일 윤보선은 민ㆍ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예상대로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두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무리한 욕심이 화근이었다. 구파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17일)했다가 민ㆍ참의원 회의에서 부결된 것이다. 윤보선은 할수없이 장면을 지명했고, 장면이 총리 인준에 성공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했지만 신ㆍ구파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당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1963년 범야(汎野)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이 결성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을 결성한 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5년]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6.6~1955) 사망
뤼베크의 부유한 곡물상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형 H.만(1871∼1950)과 장남 K.만(1906∼1949)도 모두 작가였다. 189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안이 파산, 몰락하여 1893년 가족이 모두 뮌헨으로 이사하였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면서 뮌헨대학에서 미술사·문학사 등을 청강하였으며, 한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키 작은 프리데만 씨》(1879)를 비롯한 육체·정신적 결함으로부터 고독한 행복을 추구하려다가 실패하는 주인공을 취급한 제1기 단편소설집을 발표한 후에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Die Buddenbrook》(1901)을 발표하고, 그 속에 쇼펜하우어의 고뇌하는 의지,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 니체의 의지철학 등의 영향을 더욱더 밝혀 내어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어 《트리스탄 Tristan》(1903) 《토니오 크뢰거 Tonio Kr ger》(1903)를 비롯한 제2기 단편집 및 3막극의 희곡 《피오렌처》(1905) 등에서 이미 제1기 단편집 속에서 취급되거나 싹트고 있던 주제를 삶과 죽음, 시민과 예술가, 정신과 삶, 정신과 예술 등의 대립현상 속에서 거듭 추구하고, 그것들의 조화를 꾀하였다. 장편 《태공전하(太公殿下) K nigliche Hoheit》(1909)와 단편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1912)은 그 성과의 제1보였고,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12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프랑스의 A.지드가 높이 평가한 대작 《마(魔)의 산 Der Zauberberg》(1924)은 이 기간에 집필이 진행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집필이 일시 중단되었다. 서유럽식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독일 문화를 옹호하는 논문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 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1918)을 써내어 형 하인리히와 한때 사이가 벌어졌다. 산문 소품 《주인과 개》(1919)와 서사시 《어린이의 노래》(1919)는 논쟁으로부터 창작으로 복귀해 가는 과도기의 작품이지만, 평론 《괴테와 톨스토이》(1922)는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사상권에서 벗어나서 독일 고전주의 휴머니즘의 상징인 괴테에 접근해 간 그의 정신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독일공화국에 대하여》(1923)는 그의 민주주의 지지를 성명하는 작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완성된 《마의 산》은 죽음과 과거에만 집착하였던 초기의 우울한 귀족적 의식을 억제하고 삶과 미래에 봉사하는 사랑의 휴머니즘으로 향해 간 정신적 변화과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때까지의 창작활동에 의하여 독일의 소설예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임무를 다하였다. 그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심’으로 국내외에 널리 퍼져 간 결과가 되었고, 1929년에는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나치스의 대두를 위험시하고 ‘이성에의 호소’ 등의 정치적 강연 및 많은 평론을 통하여 독일시민계급에게 그 위기를 호소하였다. 이때 발표한 《마리오와 마술사 Mario und der Zauberer》(1930)는 국수주의적 독재의 사기술을 폭로한 단편소설이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외강연여행에 나선 그는 그대로 망명생활에 들어가 스위스에 거주하여 독일의 국내사정을 조용히 살피면서 구약성서 중의 《창세기》에서 취재한 4부작 《요셉과 그 형제 Joseph und Seine Bruder》를, 제1권 《야콥 이야기》(1933), 제2권 《젊은 요셉》(1934), 제3권 《이집트의 요셉》(1936), 제4권 《양육인 요셉》(1943) 등으로 발표하였다. 1936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적을 획득하였고, 그 해 독일 국적과 국내재산을 박탈당한데다, 본대학교 철학과에서 받은 명예박사 칭호까지도 철회해 버리자, 다시 침묵을 깨고 본대학에 응수하는 《서간(書簡)》(1937)을 썼으며, 반(反)파시즘 기관지 《척도(尺度)와 가치》(1937∼1939)를 발행하여, 전투적 휴머니즘의 대표자가 되었다. 1938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미국으로 이주한 후 미국 내의 14개 도시에서 〈찾아올 민주주의의 승리〉 〈이 평화〉 〈자유의 문제에 대하여〉 등의 강연을 하였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40년부터 1945년 5월까지 BBC 방송을 통하여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타도를 호소하는 반(反)나치스 정기방송을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제1성은 독일인의 성격을 파고든 강연 〈독일과 독일인〉으로 시작되지만, 이미 1900년경에 품고 있던 모티프, 극히 독일적이며 괴테의 대표작으로도 되었던 악마와의 계약에 의해 예술의 힘을 얻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매우 복잡한 창작기법 속에 수록한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us》(1947)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성 상실의 이야기이지만, 이어서 발표한 《선택받은 사람 Der Erw hlte》(1951)은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전설에 의하여 은총의 기적을 주제로 한 인간성 회복을 묘사한 최고 걸작이다. 그는 유럽을 향한 향수를 달래지 못하고 1952년 마침내 스위스의 취리히로 이사하여, 제1작인 단편소설 《속임받은 여인》(1953)을 발표하였다. 1954년에는 그의 생애에 걸친 자기고백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회상록의 제1부》(1954)를 발표하였는데, 사기꾼의 인생 행로를 통하여 예술 및 예술가의 문제를 추구한 이 작품이 그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다. 그는 또한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평론가로서도 탁월하여 문학·예술·철학·정치 등 많은 영역에 걸쳐 우수한 평론과 수필을 많이 남겼다. 평론집으로는 《응답》(1922) 《노력》(1925) 《시대 요구》(1930) 《거장(巨匠)의 고뇌와 위대함》(1935) 《정신의 고귀》(1945) 《신고론집(新古論集)》(1953) 등이 있고, 수필로는 여행기인 《파리 방문기》(1926), 히틀러 타도를 부르짖은 라디오 방송문집 《독일 청취자 여러분》이 있으며, 자서전 및 자작해설적인 것으로 《약전(略傳)》(1930)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1949) 《나의 시대》(1950) 등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1955년 8월 12일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49년] 제네바협약 체결 1949년 8월 12일,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네바 협약'이 체결됐다. 48년 열린 국제적십자회의에서 제정된 협약안이 이날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66개국의 조인을 거쳐 1950년 10월부터 발효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66년에 조인·발효됐다. 제네바협약 체결 과정은 적십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국제적십자를 창시한 앙리 뒤낭이 제안해 이뤄진 첫 국제회의가 제네바협약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1864년 8월에 열린 회의에서는 '전쟁 중 부상자의 상태개선을 위한 협약'이 체결됐고, '적십자 마크' 사용이 결정됐다. 협약은 이후 1906년과 1929년 두 차례에 걸쳐 수정·보완되면서 전시(戰時) 희생자들을 보호해왔지만 2차대전의 경험을 살려 협약내용을 좀 더 가다듬은 1949년의 제네바협약으로 희생을 더욱 줄일 수 있게 됐다. 전쟁지역의 군대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1협약), 해상 부대의 부상자 및 병자와 난파선 승무원의 상태 개선(2협약), 포로 대우(3협약), 민간인 보호(4협약) 등 4개 분야로 구성됐다.
[1940년] 독일군, 영국 본토 공습 시작 1940년 8월 12일, 독일 공군이 처음으로 영국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공습했다. '시 라이언(Sea Lion)' 작전이라고 명명한 영국 침공 작전의 시작이었다. 대규모 공습 후 영국본토 상륙이 독일군의 계획이었다. 8월 15일 독일공군은 다시 전투기와 폭격기 총 1천786대를 동원, 전례없는 최대규모의 공중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34대, 독일군은 7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1단계 작전에서 쌍방 모두 피해가 막심했으나 독일이 영국에 비해 2배 이상의 피해가 컸다. 8월 24일 독일군은 제2단계 작전을 시작하면서 공격목표를 해안기지로부터 내륙 항공기지로 전환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2단계 작전은 영국의 대공 방어체제를 흔들었고, 전투기 손실도 적었다. 9월 7일 약 3백대가 넘는 독일 폭격기가 약 6백대의 전투기 엄호 하에 런던을 대거 공습, 런던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3단계 작전의 시작이었다. 9월 7일 대공습 이후 일주일간 계속된 폭격에 영국의 저항이 약해지자 독일은 영국 공군이 거의 붕괴되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오판이었고, 9월 15일은 승리에 도취한 독일 공군에게 암흑의 날이 되었다. 독일 전투기들이 영국으로 다가오자 대거 출격한 영국 공군기는 독일 폭격기를 모두 격퇴시켰다. 독일은 60대의 폭격기를 잃는 참패를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6대의 전투기를 잃었음에도 영국인들은 이날을 '영국 전투의 날'로 경축했다. 그 뒤 산발적인 도시 폭격이 이어졌지만 히틀러는 불리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결국 11월 11일 공습을 전면 중단했다. 2차대전 초기 연전연승한 독일은 영국 상공에서 최초로 좌절의 고배를 마시고 영국 침공계획을 포기했다. 영국 전투에서 독일은 1천733대, 영국군은 91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 야나체크(Jancček, Leoš, 1854.7.3~1928) 사망
20세기 민족주의 음악의 중요한 주창자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 국경 근처의 후크발디 출생. 어려서는 브르노에서 성가대 단원으로 있었으며 프라하·라이프치히·빈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브르노·라이프치히·페테르부르크·빈 등지에서 지휘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한 뒤 1876년 브르노필하모니협회의 지휘자가 되고, 1881년 브르노에서 오르간대학을 설립하여 1920년까지 이끌었다. 1881~88년 체코슬로바키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1919년 프라하 음악원의 작곡교수가 되었다. 민속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프란티이셰크 바르토슈와 함께 민요를 수집했으며, 1884~88년 정기 간행물 〈음악적 지면들 Hudební Listy〉을 발행했다. 그의 첫번째 오페라 〈샤르카 Sárka〉(1887~88, 공연 1925)는 바그너와 스메타나의 정신을 계승한 낭만적인 작품이다. 그후의 오페라들에서 그는 모국어의 억양과 밀접하게 연관된 독특한 체크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순수 기악 작품과 마찬가지로 모라비아 민속음악의 독특한 음계와 선율을 사용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오페라들로는 국제적 명성을 확립시켜준 〈예누파 Jenůfa〉(1904, 원래 제목은 〈그녀의 수양딸 Její pastorkyňa〉)·〈마크로풀로스 사건 Vĕc Makropulos〉(1926)·〈죽은 자의 집으로부터 Z mrtvého domu〉(1930), 1920년 프라하에서 공연된 2편의 1막 풍자 오페라 〈브로체크 씨의 달여행 Vylet pana Broučka do Mĕsíce〉·〈브로체크 씨의 15세기 여행 Vylet pana Broučka do stol〉, 희가극 〈교활한 작은 암여우 Příhody Liśky Bystroušky〉(1924) 등이 있다. 그의 오페라는 극적 효과를 높여 음악을 기교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그의 합창곡 역시 모국어의 억양을 살리는 성악 작품을 전형으로 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곡으로는 〈글라골스카 미사곡 Glagolská mše〉(1926)을 들 수 있는데 이 곡은 슬라브 미사 또는 축제 미사라고도 부른다. 이 미사곡은 예배용 언어인 옛 슬라브어로 씌어져 있으나 악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의 예배의식에는 연주될 수 없다. 연가곡 〈사라진 자의 일기 Zápisník zmizelého〉(1917~19)·〈자장가 Řikadla〉(1925~27) 역시 유명하다. 3차례 러시아를 방문한 이후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졌다. 이러한 관심의 결과 오페라 〈카티아 카바노바 Kát'a Kabanová〉·(1921)와 관현악적 광시곡 〈타라스 불바 Taras Bulba〉(1918)가 나왔다. 여러 편의 실내악곡도 작곡했는데, 성악곡에서처럼 실내악곡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속음악에서 영향받은 견고한 화성과 반복되는 선율을 솜씨있게 다루고 있다. 후기 작품에서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민속음악적 요소의 사용과 말의 억양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그는 20세기의 무소르크스키로 각인되었다. 계속 고도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양식을 유지했다.
[1911년] 멕시코의 희극배우 칸틴플라스(Cantinflas, 1911~1993.4.20) 출생 본명은 Mario Moreno. 1911. 8. 12 멕시코시티~1993. 4. 20 멕시코시티. 라틴아메리카 영화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모은 연예인. 국제적으로 알려진 광대·곡예사·음악가·투우사·풍자가인 그는 바지를 끈으로 묶고 낡은 펠트 모자를 쓰고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누더기 코트를 걸친 멕시코의 빈민가 주민인 펠라도라는 희극적인 인물과 동일시된다. 칸틴플라스는 학교를 그만두고 순회공연을 하는 천막 쇼단에 무용수로 들어가 곧 희극적 풍자와 무언극 공연을 했다. 순회극단을 떠난 뒤에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폴리스 극장에 출연했으며 그후 짧은 광고영화에 출연했다.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장편영화는 〈상세한 것은 거기에 있다 Ahí estáel detalle!〉(1941)이며, 〈피도 모래도 아닌 Ni sangre, ni arena〉(1941)이라는 투우를 풍자한 영화로 그는 스페인어권에서 멕시코 영화로는 드물게 흥행 기록을 세웠다. 1950년대에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칸틴플라스는 영어권 관객들에게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1956)에서 피니어스 포그의 하인인 파스파르투로 소개되었다. 이어서 나온 할리우드 영화 〈페페 Pepe〉(1960)가 흥행에 실패하자 멕시코로 돌아와 계속 라틴아메리카 코미디계의 왕으로 군림했다
. [1887년]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슈뢰딩거(Schrödinger, Erwin, 1887~1961.1.4) 출생
슈뢰딩거는 물질의 파동이론과 양자역학의 다른 기초들을 세우는 데 기여한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이다. 빈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취리히로 간 후인 1926년 양자파동역학의 기초를 세우는 논문들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의 역학에 대한 편미분방정식을 기술했다. 1924년 물질 입자들이 이중성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드 브로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러한 체계의 행동을 파동방정식으로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도입했다. 1927년 베를린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으나 1933년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1940년 더블린 고등연구소에 자리잡은 후 15년간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물리학과 과학철학 및 과학의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이 시기에 저술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에는 양자역학이 유전구조의 안정성을 설명하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나타나 있다. 과학뿐 아니라 문학·철학에도 능통했던 그는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에 대해 연구한 <자연과 그리스인 Nature and the Greeks>(1954)을 집필하는 등 일생을 통해 과학과 철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P. A. M. 디랙과 공동으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848년]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스티븐슨(Stephenson, George, 1781.6.9~1848) 사망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이 1848년 8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81년 영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하면서 기관부·기관공이 되어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을 익혔다. 1813년 그는 광산에서 석탄을 밖으로 수송하기 위해 존 블렌킨솝이 제작한 '바퀴 달린 증기 보일러'를 조사할 목적으로 이웃 탄광을 방문했다. 이 무거운 기계가 매끄러운 목재 레일에서 견인될 수 없다고 믿은 블렝킨솝은 톱니가 달린 제3의 레일 위로 달리는 래칫 바퀴를 증기 보일러에 부착시켰지만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이것을 개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킬링워스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레이븐스워스와 상의한 다음, 30t의 석탄을 1시간에 6㎞ 운반할 수 있고 8개의 무개화차(無蓋火車)를 견인하는 기관차 '블루처'를 제작했다. 이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는 기관차의 출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배기 증기의 방향을 굴뚝 위로 다시 바뀌게 하여 공기를 끌어당김으로써 통풍량을 증대시키는 '증기분사'를 도입했다. 이 새로운 설계방식으로 기관차는 진정한 의미에서 실용적이 되었다. 1823년 뉴캐슬에 세계 최초의 기관차 공장을 설립하고, 1824년 스톡턴∼달링턴 간의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도가 부설되어, 1825년 9월 27일 스티븐슨의 '액티브'(나중에 '로커모션'으로 이름이 바뀜)에 의해 견인되는 대중여객용 열차가 450명의 승객을 태우고 24㎞/h의 속도로 달링턴에서 스톡턴까지 최초로 운행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후, 1830년대부터 거의 모든 선진국에 증기철도가 건설됐다. 스티븐슨은 벨기에·에스파냐 등에 진출하여 많은 철도 부설사업에 종사했고, 1847년에는 철도관계 기술자들이 중심이 되어 버밍엄에 창설한 세계 최초의 기계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1604년]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 (德川家光) 출생 1604. 8. 12 일본 에도[江戶]~1651. 6. 8 에도. 250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바쿠후의 토대를 쌓았다. 1623년 아버지 히데타다[秀忠]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되었으나 1632년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이에미쓰가 권좌에 올랐을 때에는 이에야스[家康]의 통치 초기처럼 대봉건영주인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권력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다. 이에미쓰는 다이묘들에게 거만하게 대한 첫번째 쇼군이었으며, 나아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천황의 일부 특권마저 빼앗아 버림으로써 바쿠후 체제를 공고히 다졌다. 또 정부운영을 위한 엄격한 행정지침을 마련했으며 도쿠가와 가문에 소속된 세습무사들의 교육과 행실에 대한 규정을 선포했다. 심지어 그는 친형제가 가신(家臣)들을 부당하게 다루었다는 이유로 영지를 빼앗고 자살하게까지 했다. 그는 아버지의 반(反)그리스도교 정책을 계승하여 일본에 남아 있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쫓아내거나 처형했으며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불교사원에 신자로 등록하게 했다. 1638년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들 가운데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듬해에는 선동적인 사상의 전파를 막는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인들을 일본에서 쫓아냈다. 이리하여 이에미쓰는 나가사키 항[長崎港]에서 조선·중국·네덜란드 상인들과 엄격히 통제된 제한적 교역을 하는 것 외에는 외부와의 교역을 폐쇄했으며, 이러한 쇄국정책은 그뒤 20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642년] 영국 청교도 혁명(英國內亂, English Civil Wars, 대반란)
영국에서 의회세력과 군주정세력 간에 발생한 싸움(1642~51). 스코틀랜드와 벌인 주교전쟁(1639, 1640)에 의해 내란이 촉발되었는데 찰스 1세는 주교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640년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찰스 1세 진영과 하원 사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찰스 1세는 1642년 1월 4일 5명의 하원의원들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1월 10일 런던을 떠났고 양측 모두는 전쟁을 준비했다. 애초에 양 진영의 병력 규모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각기 약 1만 3,000명 정도). 1645년 의회파가 신형군을 창설할 때까지는 왕당파가 기병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의회파가 재력면에서 왕당파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싸움의 최종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게 했다. 왕당파 지지세력은 주로 웨일스와 북부 및 서부 잉글랜드에 분포되어 있었던 반면, 의회파는 좀더 부유한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강세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또한 런던과 대다수의 항구 및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의회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던 반면 찰스 1세는 현금 마련을 위해 지지세력들의 너그러운 인심에 의존하고 있었다. 1642~46년은 전쟁의 초기국면이었다. 찰스 1세가 1642년 8월 노팅엄에서 기치를 내건 후, 여러 차례의 접전으로도 결정적인 승부가 나지 않았다. 1642년 10월 23일 찰스 1세는 에지힐에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턴엄그린에서 의회군과 마주치자 런던으로의 진군을 포기했다. 그후 옥스퍼드로 철수했는데 이곳이 찰스 1세의 지휘본부가 되었다. 1643년 6월 30일 애브월턴무어 전투에서 승리한 왕당파는 거의 요크셔 전역을 장악했으며 의회파는 10월 11일 윈스비 전투에서 승리해 링컨을 차지했다. 남서부지역에서 왕당파는 랜스다운 전투와 브로드웨이다운 전투(7월)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찰스 1세의 조카인 루퍼트 공은 브리스틀을 손에 넣었다. 그해 9월 제1차 뉴베리 전투에서 승부가 나지 않자 양 진영은 동맹세력을 찾아나섰는데 의회파는 엄숙동맹을 통해 스코틀랜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확보했으며 찰스 1세는 아일랜드측과 강화를 맺음으로써(아일랜드에서는 1641년 이래 반란이 계속되었음) 아일랜드에 파견되었던 병력을 브리튼 섬으로 배치해 의회파와의 전투에 주력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마스턴무어 전투(7월 2일)에서 거둔 의회파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644년에는 전반적으로 왕당파의 군사작전이 좀더 성공적이었다. 9월 20일 제2차 뉴베리 전투에서는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45년 의회파 진영에서 신형군을 창설하고 6월 14일 네이즈비 전투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전세가 결정적으로 뒤집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왕당파 병력은 7월 10일 랭포트에서 분쇄되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9월 13일 몬트로즈 후작이 필러포 전투에서 패퇴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의회군은 남서부 일대를 평정했다. 1646년 왕당파 병력은 최종적으로 해체되면서 옥스퍼드에서 항복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에 보호를 요청하며 피신했으나 스코틀랜드측은 1647년 1월 잉글랜드를 떠나면서 찰스 1세를 의회파 진영에 포로로 넘겨주었다. 1647년 찰스 1세는 갈수록 의회측과 불화를 빚어오던 군대에 의해 납치된 후 탈출했으나 불운하게도 와이트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2월 26일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비밀단체(Engagement)측과 협상을 갖고 자신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잉글랜드에서 장로파 제도를 확립하고 독립파의 활동을 억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왕당파의 몇 차례 반란과 1648년 7월 스코틀랜드의 침공 등 내란의 2번째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기도는 분쇄되었으며 찰스 1세의 이중성에 대해 분개하는 여론이 비등함에 따라 결국 찰스 1세는 재판을 받고 1649년 1월 처형당했다. 다음으로 아일랜드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새로이 확립된 공화정 체제를 위해 아일랜드에서 가톨릭과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1649~50)했다. 몬트로즈 후작이 주도한 스코틀랜드 반란은 1650년 4월 분쇄되었으며 찰스 2세는 장로교 서약파들과 타협을 보았다. 그해 9월 3일 크롬웰은 던바 전투에서 이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승리를 끝까지 마무리짓지는 못했으며 따라서 당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로 하여금 잉글랜드 지역으로 깊숙이 진격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당파는 1651년 9월 3일 우스터에서 완전히 패배했고 찰스 2세가 국외로 탈출함으로써 사실상 그동안의 내란이 끝났다. 내란의 과정에서 인명이나 재산상의 피해는 비교적 경미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내란은 공화정(Commonwealth)과 호국경 체제(Protectorate)를 만들어냈으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잉글랜드 내에서 비국교도의 전통을 성장시켰다. 또한 내란은 영국 국민들에게 상비군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감을 자리잡게 했다.
그밖에 2005 조오련 3부자, 울릉도-독도 횡단 성공 2003 제주해녀항일운동 주동자 김옥련 할머니 71년 만에 건국훈장 포상. 2002 제7차 남북 장관급회담 중단 9개월 만에 서울서 개막 2002 유럽 곳곳에서 100여년만의 최악의 폭우 2000 러시아 핵 잠수함 쿠르스크호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 침몰 1999 신구범 축협회장, 농협· 축협· 인삼협을 농업협동조합으로 통합하는 농업협동조합법안 통과에 항의 할복 1999 남북한 노동자 축구대회 평양서 첫 경기 1998 통일그룹, 금강산 유람선 관광사업을 추진하고 평북 정주에 평화공원을 조성키로 북한측과 합의 1996 한총련, 연세대 점거 과격시위 1992 부시 미국대통령,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을 포함한 세계최대의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는 NAFTA 타결 선언 1992 작곡가 존 케이지 사망 1985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747기 오스타카 산에 추락 524명 사망 1984 신준섭, 서향순 , 유인탁 LA올림픽서 금메달 획득 1983 정부, 광복절 특사로 1944명 석방 1982 미국 40개국 군축회의서 모든 화학무기공장의 10년내 폐기를 제의 1980 80세계복음화대성회 여의도에서 개막(~15일) 1978 일본-중국, 평화우호조약 조인 1977 중국, 제11차 전인대 개막 1966 북한, 자주노선 선포 1965 민중당 의원 61명, 한일회담에 반대, 국회의원 사퇴서 제출 1964 007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영국의 스릴러물 소설가 이안 플레밍 사망 1962 소련, 보스토크 4호 발사 1961 박정희 의장 63년 여름에 민정이양 하겠다고 성명 1960 최초의 방송통신위성 에코1호 발사 1957 한일회담 속개 1955 비구승 합법대회 전국 사찰 장악 1945 38선 설정 1945 소련군, 청진에 상륙 1942 미국-영국-소련, 모스크바에서 회담 1931 중국 양자강 대홍수, 8000여명 사망 1924 파키스탄의 대통령(1978-88) 자아 울 하크 출생 1919 사이토 마고토 (齋藤實) 제3대 조선총독 부임 1905 런던에서 제2차 영일동맹 조인 1904 일본, 내정개혁안 1903 일본, 러시아에 한만(韓滿)문제타협안 1674 프랑스의 바로크 시대 초상화가 샹파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