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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몸으로부터 자유로우신가요?
몸을 빠져나와 자유롭게 공간을 넘나드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아니면 어떤 사극에 등장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이 글은 그런 특별한 재주를 가지신 분들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全知的 作家 視點)에서 쓴 소설들이 있습니다.
전지적이라는 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뜻이죠.
소설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은 물론, 다른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모습, 심지어는 그 사람들의 내면세계와 심리까지
다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쓴 소설입니다.
작가는 늘 착하기만 한 우리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물론이요,
비밀리에 주인공을 해코지하려는 악당들의 음모와 그들의 심리까지 다 알고 묘사합니다.
그래서 흔히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의 작가의 위치를 신(神)의 위치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이러한 전지적 작가 시점은 소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곤 합니다.
마치 세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하면 옳다, 그르다 하는 심판까지 내리곤 하죠.
물론 이는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전에 블로그씨 질문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없어지고 나만 남게 되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일어날 수는 있겠지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아마도 로또에 1등 당첨된 순간 벼락에 맞고 죽을 확률보다 더 낮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실제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다니,
제가 이상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찬찬히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인간>에서
당신은 평소처럼 오늘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집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죠.
평소와 달리 출근과 등교 준비로 바쁠 아내와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궁금해서 이 방, 저 방의 문을 열어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식구들이 보이지 않자 당신은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러나 벨소리가 방에서 들려옵니다.
아이들 휴대폰도 집에 그대로 있습니다.
당신은 조금 불안해집니다. 텔레비전을 켰지만 아무런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다.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더 불안해집니다.
당신은 베란다로 나가서 밖을 내다보는데 놀랍게도 평소와 달리 행인도, 움직이는 차도 보이질 않습니다.
단 한 사람도, 단 차 한 대도!
그리고 화재가 난 듯 어떤 집에서는 연기마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놀란 당신은 밖으로 뛰어나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옵니다. 역시 사람 하나 보이질 않습니다.
가로수와 집을 들이받은 차들이 몇 대 보일 뿐 다른 차들은 주차장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고요합니다.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당신은 회사 동료, 친구들, 친지들에게까지 전화를 해보지만 그 누구와도 통화를 하지 못합니다.
회사에 갈 생각을 포기한 당신은 매일 이용하던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가봅니다.
그리고 승강장까지 내려가 보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매점에 가보니 조간 신문들이 꽂혀 있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신문을 보니 오늘자 신문입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어떤 큰 일이 일어났나 봅니다. 바로 오늘 아침에요!
조간 신문을 펼쳐보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을 예측하는 기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포와 걱정에 지친 며칠의 시간이 흐릅니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사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고, 답답하고, 무섭고, 외롭고, 힘든 시간들이었죠.
전기가 끊기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심지어 다른 나라 사이트까지 뒤져봤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추측할 수 있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서점까지 가서 책들을 살폈지만 이 사건을 암시해주는 책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좀 더 먼 곳까지 가봤지만 거리는 굶주린 개나 고양이들이 오갈 뿐입니다.
<지구에서의 마지막 인간>에서
시간이 흐릅니다. 몇 달이 흐른 듯합니다.
어떤 곳에는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추락한 듯 잔해도 보였습니다. 수도나 전기, 가스가 끊긴 지 오래입니다.
곳곳은 화재로 재가 된 집들이 보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에도 사람이 없습니다.
자,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에는 자신 외에는 더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물론 당신은 인류가 모두 사라진 것 아니냐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극심한 공포와 불안, 그리움, 갖가지 상상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시달리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적극적으로 사람 찾는 일을 포기할 겁니다.
나 외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을 거라는 절망이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오겠지요.
하지만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도 갑자기 문이 덜컹 열리면 당신은 사람이 나타난 줄 알고 놀랄 겁니다.
최근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 보이거나 인기척이 나면
당신의 체념과 절망은 금세 희망이나 긴장, 두려움, 반가움, 설렘으로 바뀌곤 할 겁니다.
그리고 아마존 밀림의 어느 깊은 동굴이나 남극 기지, 태평양의 외딴 섬, 우주정거장에 살아남았던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역시 한편에는 있을 것입니다.
또 어쩌면 지구에 위험이 닥친 것을 알고 미처 당신에게 알릴 틈도 없이 급히 우주선을 타고 피신했던 인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상상을 평생 하면서 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생존자를 찾아
기약 없는 먼 여행을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은 인류가 모두 사라진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당신이 할 수 있는 진솔한 말이란 이럴 겁니다.
"아무리 사람을 찾아도 왜 안 보이는거야. 진짜 다 사라진거야,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위에서 제가 세상에 모든 사람이 없어지고 당신만 남게 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신만이 알 수 있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쓴 소설에나 등장하는 일이고,
현실에서의 나는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도대체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블로그씨의 질문처럼
일상생활에서 종종 신처럼 생각하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작가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입니다만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언젠가 인류 문명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면 우주의 모든 의문을 풀고
우리가 궁극적 진리를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입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쓴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말이라는 거죠.
이 말 역시 나라는 존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생생한 상황을 도외시한 말이란 거죠.
이 말 역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죠.
위 그림은 라파엘로가 1510년 무렵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유명한 작품 아테네 학당의 일부입니다.
별 같은 것이 박힌 공을 들고 있는 사람이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했다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라고 하네요.
그런데 예언자 조로아스터는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을 풀고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밝혀 놓았습니다.
지금 이 말은 누가 한 말일까요? 제가 한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의 이 말에 당장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다수의 인류, 똑똑하다고 하는 학자나 현자나 종교인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요.
그렇다면 진리는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투표로 결정될까요? 그러나 똑똑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가톨릭이나 이슬람교나 힌두교의 신도 숫자가 많다고 이들 종교가 진리일까요?
또 당신이 제 말을 받아들여 조로아스터교를 진리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당신이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니까요.
대체 그 무엇을 기준으로 당신은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완전히,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의 관찰이고, 선택이고, 생각이고, 판단이고, 주장일 뿐입니다.
종교가 되었든, 과학이 되었든 어떤 이야기가 모든 의문을 풀고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밝혔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거기에 동의하느냐 하는 당신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이나 논리를 이해했느냐의 여부도 오로지 당신의 판단과 노력에 달렸습니다.
어쩌면 미래가 아니라 지금 있는 이론 중에서 이미 우주의 모든 의문을 해명한 이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인류의 많은 사람들은 특정 이론(종교나 사상 포함)을 궁극적 진리라고 생각하며 믿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이론이 우주의 진리를 밝혔다고 해도
수학을 모르기에, 혹은 영어로 씌여진 그 이론을 읽을 줄 몰라서, 그 이론을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 안 되어서,
우주의 진리를 모르는 경우가 여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또 그런 이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느라 바빠서, 그딴 것에는 취미가 없어서,
아마존 밀림의 원시부족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예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을 수 있죠.
이처럼 우리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1인칭 (관찰자) 시점, 즉 나의 시각에서 써나간 소설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시야와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곧바로 진리에 이르도록 하는
통로가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의 계시입니다.
신의 계시를 통해 진리를 곧바로 전달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위는 신과 인간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시베리아 샤먼들입니다. 신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죠.
과거는 물론 지금도 신의 계시를 받아서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무당이나 목사, 또 일반인들이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에 있던 최태민 씨 같은 사람이 종종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신의 계시를 받은 당사자는
그것이 신의 계시인지, 환청이나 환각인지, 꿈인지, 몽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을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최태민 씨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박 전 대통령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거죠.
오래전에 그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국의 한 역사가가 기차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사고가 일어나서 갑자기 기차가 멈춰 섰습니다.
많은 승객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차에서 내려 사고 현장으로 갔고요. 그 역사가도 기차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큰 사고가 아니어서 기차는 잠시 후에 출발했습니다.
기차가 출발하자 승객들은 조금 전에 일어났던 사고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역사가는 여행에서 돌아와 역사학을 때려치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직전에 눈으로 본 사건에 대해서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직접 보지도 않은 수백, 수천 년 전의 일을 다루는 역사학을 연구할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죠.
세상이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본 것임을 안다면 천국이나 극락, 천당의 비밀도 풀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천국(극락)에서는 24시간, 1년 내내 바흐의 음악만 들려주면 될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늘 장미향을 좋아한다면 극락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장미향이 풍기게 하면 될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늘 흰 옷만 좋아한다면 사람들에게 흰 잠옷만 입혀 놓으면 천국이 될 겁니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만 계속 틀어 놓으면 우리 어머니는 질겁합니다.
장미향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을 가진 분에게 장미향은 달갑지 않은 향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향기는 없습니다.
저는 김치를 정말 사랑하고 식탁 위의 김치는 대환영이지만 지하철에서 스며나오는 김치 냄새는 싫습니다.
천국에서는 흰 옷만 입어야 한다면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는 천국이 있을 수 있지만 1인칭 시점에서의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 화가들이 그린 극락을 보면 궁궐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곳이 극락이라면 저는 일부러 나쁜 짓을 해서라도 극락에 안 가고 싶네요.
극락에 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가 있다면 그곳이 극락일까요?
1인칭 시점에서의 천국이나 극락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시각각 다릅니다.
배가 고프면 푸짐한 밥상이 천국이지만 배가 부르면 영화라도 몇 편 볼 수 있어야 즐거운 삶이 됩니다.
대화와 토론을 하다 보면 종종 싸움이 일어나곤 합니다.
싸움의 원인에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표현들도 싸움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원래는 안 그래."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은 틀렸어."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안 그런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남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말이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 어떻게 알까요?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게 있지만 현실에서는 1인칭 관찰자 시점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1인칭 주인공이나 관찰자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세상이 빨갛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빨간 선글라스를 쓰고 세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될 수 없고,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각자가 1인칭 시점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은 각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모성애로 충만한 어머니라고 할지라도 자식 대신 밥을 먹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 사람을 위한 천국을 만들어 놓고는 세상 사람들을 그 천국으로 강제로 데려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각자에게 사상의 자유, 종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각자 1인칭 시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세상의 주인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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