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듬해 박정희대통령 임석 시범을 보이면서 특공무술로서 인정을 받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수옥님께서 92년도 특공무술 교본을 편찬하게 되는데
이때 술기를 집대성하신분이 [서승재]님이십니다.
서승재님은 80년도 중반부터 특공무술의 기본술기를 정립하고 각단에 맞는 [형]을 창안하셨습니다.
이 술기들은 현재 많은 단체로 분파되어 있는 특공무술 단체들이 거의 똑같이 수련하고 있습니다.
그외에 특공무술 초창기때 참여했던 분들 중에는
박노원님이 있습니다. 박노원님은 5공수에서 특공무술을 전파했으며
경찰학교에서는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이후 싸우디로 파견나가 10여년동안 태권도 사범을 지내셨습니다.
이후 1996년경 입국하여 장수옥님이 설립했던 대한특공무술협회의 부당한 운영에 항거하여 국제특공무술연합을
조직하였는데 1세대 제자들 거의가 동참하여 대한특공을 탈퇴하였습니다.
그 이후 2000년도경에 정부의 사단법인 설립규정의 완화로 인해 많은 법인단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윗글에 있는 분중
이석환님은 알지 못하는 분이고
이원익님은 5공수 여단장님을 모시고 있던 군인출신이며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특공무술연맹]을 설립하셨습니다.
이 단체의 술기는 국내의 특공무술 술기와 전혀 다른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른분이 쓰신 글중 이원배님이 계시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이분은 장수옥님의 초창기 제자가 아닙니다.
당시 합기도관장으로 있다가 제자로 영입되신 분입니다.
현재 [특공무술세계연맹]을 설립하여 독립하셨습니다.
미흡하지만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에서 특공무술에 관한 글들을 썼던 경험으로 올려봅니다.
국방부자료에는 뭐라 나왔는지 저도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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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해주세요! 의견쓰기 신고 로그인 하신 후에 의견을 남겨주세요. 특공범님 님의 답변 | 2009-03-09 13:58 스크랩 0 카페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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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1 ● 특공무술 역사
무술의 역사는 반드시 사실에 기초하여 정확히 열거되어야 한다. 일부 무술이 근거가 희박한 고서, 심지어는 벽화 등 그 해석에 있어서 모호한 사실 등을 아전인수격으로 무리하게 해석하여 이를 자신들의 무술사에 사용함으로서 역사로서의 무술사의 본질을 훼손하는 다소 황당한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역사를 약육강식의 입장에서 정리하여 무술의 발전에 본질적으로 기여한 사람을 배제하는 순수하지 못한 기록으로 “강자존”의 법칙으로 일관하는 사태가 있어왔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각종 무술협회가 비리에 대한 지탄을 받게 되자 이와 동시에 그 무술에 대한 왜곡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그간 국기로 평가 받아오던 태권도를 비롯한 여러 무술분야에 시도되고 있다.
다행히 특공무술은 역사가 그리 깊지 않은 무술이어서 초창기 특공무술인들이 모두 활발히 각 분야에서 사회활동을 하고 있음으로 이 기회에 이분 들이 증언하고 기억해 낼수 있는 사실에 기초하여 정확한 특공무술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특공무술의 역사를 재기록함에 있어 아울러 특공무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관련 단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이 기록의 재정립에 증언해 주신 분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장세동 예비역 중장, 전 장관(전 특전사령부 작전처장, 공수여단장, 대통령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
특공무술의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우선 특전무술과 제606특공부대(후에 제27특공부대로 부대명칭이 바뀌었음)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특전무술은 세계의 어느 특전부대에나 있을 수 있듯이 특전사령부에서 자체의 임무수행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집약한 무술이다. 후에 특공무술이 제27부대에 의해 개발되어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전군에 이 특공무술을 전파하라는 지시가 있자. 당시 국군태권도선수단을 배속받아 운영하고 있었던 제5공수여단(단장 장기호장군)이 특공무술을 제27부대에 의해 전수받고이를 기획하여 전군에 시범을 보이고 이로 인하여 전군으로 특공무술이 전파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장기호 장군은 특공무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전에 있었던 특전무술과 연계를 시도한 지휘관이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원익 총재는 이때 장기호 장군의 당번병으로서 특공무술 초단을 획득한 병사이다.
장기호 장군께서는 이원익을 포함한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 특공무술협회 소속 사범 어느 누구에게도 공식적인 직함이나 협회인가를 한적이 없고 이는 교육사령관의 직무범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후일 한국을 방문하여 본인과 만나서 대담을 한 김인기 사범은 이원익씨의 역사왜곡에 비판을 가한 사범으로써, 그는 특공무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특공무술은 본인이 검토한 결과, 그 교육의 내용은 특전무술과 유사하다고 판단되며 이는 이원익 사범이 특공무술의 내용을 심도있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특공무술 외적인 요소(특전훈련)를 특공무술의 교육내용에 포함시켰기 때문 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미국의 특공무술은 무술 외적인 요소들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제606특공부대(후에 제27특공부대)
제 606특공부대는 김택수 장군이 당시 대통령경호실장인 차지철 실장의 인가를 받아 편성되어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된 부대로써 그 당시 창궐하는 국제테러에 대응하기 위하여 창설된 부대였다. 특히 당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재직하고 계시던 전두환 장군은 당시 영국런던에서 열린 세계대테러대책회의에 예하참모들(김택수장군, 김진영장군(후에 육군참모총장 역임,대장 예편)을 참석시켜 대테러대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국내에도 대 테러부대가 있어야 함을 경호실장에게 강력히 설득하고 이를 대통령께 보고하여 이로서 1979년에 제606부대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전두환장군은 미국유격대과정과 미공수훈련을 이수하고 공수여단장을 역임한 바 있어 그 분의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606부대는 당시 특전사령부에서 대통령경호실에 작전배속되고 있던 제66특전부대에서 1개제대(김종헌 장군, 당시 소령)를 차출하여 이를 근간으로 편성된 부대이며 영국의 SA, 독일의 GSG-9, 미국의 Delta Forcs등의 전술과 장비를 연구하여 대 테러작전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 부대는 오형근 장군, 김종헌 장군으로 지휘권이 인계되면서 존속되다가 1992년 해체되면서 특전사령부 제707특수임무부대로 대부분 흡수되었다.
특공무술의 탄생과 성장
탄생
초대 606부대장 이었던 김택수 장군(당시 중령)은 특수전 작전에 대한 혜안을 가진 분이셨다. 그는 당시에는 드물게 대 테러작전에 대한 전문적안목을 가진 분이었다. 현 한국특공경호무술협회의 총재인 임웅환 예비역 대령(당시 대위)은 김택수 장군의 참모로서 초기 대 테러작전구상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 부대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데 노력하였다.
부대가 대 테러작전 수행능력을 보유하기 위하여 장비, 교리의 발전등이 필요하였다. 특히 개개인의 개인전투함양에 있어서 보다 특공작전에 필요한 무술은 첨예의 관심사였다. 당시 특공요원 들은 태권도의 전원 유단자 들이었으며 투검 등 다소의 특수전 임무수행에 필요한 개인기술 들이 태권도와 함께 수련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를 “특전무술”이라 불렀다.
김택수 장군은 특공부대가 대 테러작전에 필요한 무술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 착안하고 당시 부대를 방문하여 특공부대원에게 한방의료를 지원하고 있던 김택수 장군의 고교동창인 김 한의원 원장의 소개로 장수옥 합기도사범을 알게 되었고 이와 함께 당시 태권도 5단이었던 현 한국특공경호무술협회총재 임웅환 대위와 함께 무술을 상호 접목시키려는 본인의 시도를 지시하였다. 임웅환 대위와 김택수 부대장은 부대를 방문한 장수옥 사범의 시범을 보고 난 다음 합기도에서 참조할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여 즉각 새로운 종합무술의 구상에 착수하였다.
임웅환 대위는 각종 무술관련 서적들을 구입하여 참고하여 그 자신이
태권도 유도 등의 무술 유단자임과 사관학교에서 권투 챔피언이었던 자신의 경험과 작전경험 등을 종합하고, 새롭게 개발된 대 테러작전의 수행여건에 알맞은 상황을 실전에서 즉각 사용 가능한 무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구상은 대 테러작전의 상황을 설정하고 여기에 각종 무술을 재 배치하되 동작은 3개 동작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대원칙이었으며, 태권도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기술이나 현장성이 없는 기술 등은 배체하였다.
임웅환 대위는 이러한 원칙 하에 교안을 작성하면서, 동시에 합기도 사범인 장수옥 사범으로부터 합기도에서 필요한 체포, 연행술을 추출하여 부대원
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게된다. 따라서 특공무술은 합기도에서 필요한 술기들을 도입하였으나 합기도가 바로 특공무술인 것은 아니다.
무술의 종합과정에서 대 테러훈련에 필요한 무술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김택수 장군은 이를 특공무술이라고 부르면서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에게 새로운 특공무술에 대한 시범을 약속하였다. 당시 부대의 상황은 대 테러부대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이어서 무엇이 되었던 많은 보고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시범일정이 촉박하게 잡히었고 상황에 따른 태권도와 합기도의 혼합정도의 수준에서 경호실장에 대한 시범이 이루어졌다. 당시 장수옥 사범은 아직 민간인 신분이었고, 특공무술이 그가 하는 합기도 그 자체도 아니었으므로, 부대시범이 끝난 후에 찬조출연을 하는 차원에서 시범이 구성되었고 부대시범 중에 장수옥 사범의 수하 사범이 몇 명 신분을 감추고 제606부대원으로 가장하여 실시하는 해프닝도 이었다. 시범을 참관한 후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은 이를 가다듬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범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일정 역시 빠듯하였다.
부대는 모든 역량을 대통령시범에 두고 전력을 다한 결과 몇 개의 사항을 수정함과 동시에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시범을 보일 당시 가장하여 참가했던 그의 제자들을 제외시키고 장수옥 사범과 그의 부인 김단화를 찬조 출연시키는 차원에서 시범을 실시한 결과 이를 보신 박정희 대통령은 특공
부대 차원의 시범으로 평가하시었든지 별다른 말씀은 없으시었다.
이어 10.26사태. 12.12사태가 연이어 정국을 흔들었다. 제 5공화국이 탄생되기 전까지 장수옥 사범은 아직 민간인의 차원에서 김택수 부대장의 요청에 의해 무도수련을 지원하는 차원이었으나 이 역시 부대가 위 두 사태에 참가하게 되어 무도는 수련 할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특공무술도 당분간 잊혀진 채로 시간이 흘렀다.
성장
제5공화국이 탄생되고 제606부대는 제27부대로 명칭이 바뀌어진 가운데 오형근 장군(당시 중령)이 지휘하게 되었다. 오형근 장군은 특공무술을 다시금 부대의 임무에 맞도록 재편하시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시범 역시 제27부대원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오형근 부대장의 배려에 의해
장수옥과 김단화는 보조참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 졌다.
시범은 단장에 오형근장군, 씨나리오 작성은 조윤기 작전참모(당시 소령), 시범의 진행은 고명승 대령(대장 예편)이 담당하였다. 이 자리에서 특공무술의 진가를 처음부터 알고 계시던 전두환 대통령은 이 무술을 전군에 전파할 것을 당시 경호실장 정동호 실장에게 지시하셨다. 따라서 제27부대는 당시 제5공수부대여단에 특공무술을 전파하였고 당시 여단장이었던 장기호 장군은 예하부대원으로 하여금 특공무술을 교육하여 육군시범을 보임으로써 각군에 보급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특공무술의 내용은 미미하였다.
따라서 특전사를 비롯한 몇 개의 부대에만 전파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현재까지도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이 그 정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 시범을 기회로 오형근 장군은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던 장수옥 사범을 개인적으로 돕기 위해 대통령경호실 무도사범으로 그를 추천하였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형근 장군을 포함한 많은 제27부대원 들의 도움으로 장수옥 사범은 대통령경호실 무도사범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호작전 참가 경력과 특수부대경력이 전혀 없는 장수옥 사범은 애초에 27부대에서 만들어진 특공무술과 그가 몸담고 있었던 합기도를 합한 차원에 무도를 넘지못하는 한계를 맞았다. 이는 현 국제특공무술회장인 박노원씨가 정확히 지적하듯 합기도와 태권도를 혼합한 정도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합기도게의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덛 부쳐 말하면 특공무술은 본질이 작전경험을 기초로 만들어진 무술이며 순전한 무술인에의해 만들어진 무술이 아니라 전사(戰士)들에 의해 만들어진 무술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발전의 계기
전두환 대통령의 부관으로써 현 대한특공무술의 사단법인인가를 도왔던 임웅환 회장 본인도 후일(後日)에서야 이러한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기꺼이 대한특공무술협회 회장의 직책을 맡아 최초 구상하였던 바대로 특공무술을 재정립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들은 사정이 허락한다면 후일 상세히 기록할 것이다.
다행히 영국에서 특공무술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소식이 날아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태권도 은메달을 수상하고 4번의 국제 대회에서 태권도 챔피언에 선발된 경력이 있는 에베간사 사범은 타이킥복싱참피언, 국술원에서 합기도5단을 획득하고 영국의 특수전부대와 영국의 용병부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범이었다. 그도 태권도와 합기도 등, 한국무술의 한계를 느끼고 다른 한국무술을 찾던 중 특공무술을 발견하고 임웅환 본인에게 연락해 왔던 것이다. 에베 사범의 생각이 특공무술이 주장대로 실전적이라면 특수전 경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이에 초심으로 돌아가 특공무술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영국의 용병부대인 그루카 부대에서 시범을 보인 결과 무엇보다도 실용성을 중시하는 그루카 부대원을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그루카부대원들은 우리의 특공무술을 전 대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병훈련과정에서부터 이를 수련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도 합기도와는 다른 실전적 무술에 관심을 가진 여러 사범들의 참여 하는 특공무술이 연구되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특공경호무술협회가 사단법인으로 인가되어 활동 중이며 영국을 비롯한 미국, 캐나다,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쿠웨이트,
브루나이, 네팔 등에 해외지부가 실립되어 활동 중이거나 설립이 추진 중이다.
결론적으로 특공무술은 제27부대원 들의 소중한 자산이며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특공무술은 합기도 그 자체는 더욱 더 아니며 특공무술은 특수작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현장성이 있는 응용된 종합무술이며 또 그것을 기반으로 하고있음을 강조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어떠한 개인 또는 단체에 대한 비판의 목적은 없으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역사의 재인식 또는 재정립은 국가에서 뿐 만 아니라 개인과 단체에 있어서도 그 나라, 그 단체, 그 개인의 발전을 위하여 중요함을 인식하여 가능한 많은 진술과 자료에 근거하여 이 자료를 준비하였다. 공사다망한 가운데서도 특공무술역사의 재정립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 주신 과련인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러한 노력으로 특공무술을 연마하는 모든 수련생들이 보다 자랑스런 마음으로 특공무술을 연마하여 자기 발전은 물론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당시 1공수 단장 이셨던 전두환 장군께서, 경호실로 가시기 전, 공수단 일부 병력을 선발, 66지역대를 설립 경호실에 근무케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 얼마후 장군께서 경호실로 가셨습니다.
3분대기 지역대,무장구보,사격.태권.격파,무성무기....등등 특급올 마스타. 각여단에서 선발함.
어제는 포근 오늘 오후부터 춥다고 합니다,, 감기
조심 하시고,,건강 하세요,,
포근하고 편안한 밤되시어요, 전두환 대통령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