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한번씩 이웃을 생각해본다.
철 들기 전 고향을 떠나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기까지 성장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태어나 친척들 집안, 고향 동네 어른들, 형, 아우, 친구들, 초등학교에 들어가 선 후배, 동기 동창, 선생님, 중학교에서는 새로운 선후배와 동기 동창, 선생님, 고향을 떠나 고교시절 선후배 동기, 선생님 , 대학, 군대, 직장, 거래처, 취미활동, 기타, 내 삶의 주위에 있는 많은 형, 아우, 지인 ,가게 아줌마, 남녀 친구들, 친구에 친구, 형에 친구, 누나의 친구, 동생의 친구, 우연한 인연으로 긴 교우를 갖는 특별한 지인, 매일 다니는 길목에서 우연히 만나는 수많은 낮선 사람들 이렇게 살아가면서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과 사람 속에서 자기를 성장시키고 정체성을 확인하며 선악을 구분하고 행불행의 의미를 만들고 진퇴를 결정하는 만남의 연속 속에서 살아 가고있다.
이런 만남 중 이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생활을 위해 이사 짐을 싸고 몸을 누인 집은 고향집-고교시절 마산 양덕동집-진해 자취집-부산학원 독서실-미선이집-부산 남천동-군대병영3곳-마산 형님집-마산 자산동 자취집, 대학시절 서울 흑석동 자취집-수협 역삼지점-가락동 자취집-국민은행 학동지점-옥수동, 결혼 후에는 신혼집이던 원당-의왕시 포일-부산 감천장-부산 개금-부산 초읍-또초읍-함안군 칠원-부산다대포-성남-분당 지금 집으로 수없이 옮겨 다니며 짐을 꾸렸다. 이 과정에서 항상 이웃이 생기고 신뢰를 만들고 정을 키우며 스스로 성장하는 꿈을 먹는 인간 속에서 살아왔다. 이렇게 이웃을 생각하다보면 잊지 못 할 일이 있다. 지금은 너무나 오랜 옛날의 일이 되어버린 그 사건은 우리 집과 아부지의 운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부지런함과 자상함과 손재주와 넘치는 정으로 온 동네 구지리 한 잡일들을 보아오셨는데 특히 물이 할메집 과는 한집처럼 지냈다. 할메 집은 자식들이 모두 출중하여 큰 아제는 국민학교 선생님이시고, 둘째는 육사를 나와 군대에, 셋째는 연세대를 나와 행정고시를 하여 집에는 할메와 큰아주메 뿐 그래서 농사일을 포함해 대소사를 모두 우리아부지가 대신하며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한집처럼 잘 지냈다. 어른들이 가까이 지내니 자연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게되어 흉허물이 없었다. 어린 우리들도 잔심부름을 열심히 했다. 그러다 큰 아제의 전출로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되니 아버지는 몹시 서운해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농사는 물론 아버지가 붙이고 문제의 동메도 우리가 관리했다. 들 한복판인 우리 동네는 밭이 없는데 유일한 동메 밭으로 감나무도 여러 그루고 밭이 넓어 밭곡식 자급하기에도 충분했다. 몇 년인가 지나 겨울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들렸다. 그 동메 밭을 부산에 있는 갑복이 큰아버지한테 팔아 갑복이 네가 대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팔거면 당신한테 팔라고 누차 이야기가 있었는데 큰 아제가 덜렁 팔아버려 아버지의 비탄과 한숨은 말이 아니었다. 정을 준 만큼 더 아프다는 것을 아신 아부지는 한동안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시고 담배만 더 너셨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후로 한동안 뜸하던 할메 집과의 사이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복원이 되었다. 내가 재수할 때 한철을 미선 집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후였다. 아버지의 이웃은 항상 넘치는 아부지의 정을 나누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나의 이웃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아버지를 넘지 못하는 벽이 바로 이것이다. 이사도 잦지만 현대인은 고정된 삶이 아닌 흐르는 삶, 항상 새로운 이해관계 속에 살다보니 필요한 만큼의 정들을 서로 나누기 때문에 각시나 아이들의 이웃은 있는지 몰라도 진정한 나의 이웃은 없다. 어린 시절 동메를 관리할 때 뽐내던 내 손에는 감이며 오이며 가지가 있었으나, 지금 내겐 나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이유는, 내가 아버지가 아니라는 방증인지! 아버지의 이웃을 생각하면서 나의 이웃은 어디 있는가 되 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