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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무력진압 거부한 의인 육사출신으로 한국전쟁 참전 … 전남도경국장서 강제사직 후 보안사 고문 후유증으로 순직
1980년대는 광주의 시대였다. 1980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신군부의 무력진압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지만, 항쟁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80,9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올해 영화 ‘화려한 휴가’에 쏟아진 뜨거운 국민적 관심은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역사의 뒤안길의 물러난 27년 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사건임을 보여주었다.
27년만에 명예회복…국립현충원 안장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폭도들의 난동이 아니라 전국민적인 열망을 실은 민주화운동이었음을 인정받기까지 17년의 세월이 걸렸듯이, 당시 사건에 연루된 한 사람의 명예가 제대로 회복되는데는 장장 2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지난해 8월 서울지방보훈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에 대한 강경진압을 거부하여 직무유기를 이유로 해임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을 순직경찰로 등록했다. 이에 앞서 2005년 11월 24일 경찰청은 과거사 진상 조사 결과를 토대로 안병하 전국장의 순직 사실을 확인하고 유해를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시켰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경국장(지금의 전남도경찰청장)을 지낸 안병하씨(당시 52세)는 5월 18일 이전에 전남대학교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면담하여 대학생의 평화시위를 보장하고 시위를 평화롭고 질서있게 종결지었다. 그러나 5월 18일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여론이 악화되고 사태가 악화되자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시위대에 대한 발포명령과 강경진압을 거부하고 시민과의 충돌에 따른 불상사를 우려하여 시위 진압 경찰관의 총기를 회수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 때문에 안국장은 지휘권 포기를 이유로 강제 해임된 뒤 보안사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광주청문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인 1988년 10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97년 5.18 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병하국장은 5.18 당시에 사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직이 인정되지 않았으며, 2006년에서야 최종적으로 순직경찰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경찰청은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근거로 안병하 전국장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한 인권경찰의 표상이라고 결론짓고 명예회복과 함께 동상 건립, 경찰 60년사에 모범경찰로 기록하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다.
양양 남문리 출신, 속초중 강당에서 결혼
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은 강원도 양양군 남문리 출신으로 1974년부터 1976년까지 강원도 경찰국장을 지내는 등 강원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일찍 고향을 떠난 안병하씨를 기억하는 지역 사람들은 거의 없어 설악권에서는 잊혀진 인물이다. 이에 미망인 전임순씨(74세,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와의 인터뷰, 신문자료 등을 근거로 안병하 전국장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았다.
안병하(安炳夏)는 1928년 7월 13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남문리 178번지에서 순흥(順興)안씨 집안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양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제국중학교(?)를 다녔다. 부친은 해방 전에 원산에서 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충남으로 월남하였다.
해방 후 서울의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1948년 11월 육사 8기로 입학하여 6개월 후인 1949년 5월 23일 임관하여 6.25전쟁에 일선장교로 투입되었다. 육사 8기는 국군이 창설된 이후 최초의 사관학교 입소자이며, 6.25 전쟁 당시 일선장교들로 활약한 기수였다. 이들 중 김종필, 김형욱 등은 5.16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으며, 황영시, 차규헌 등은 전두환과 함께 12.12 쿠데타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6.25 전쟁 초기 춘천의 6사단 포병부대 소위였던 안병하는 소양강전투에서 육군 중위로 전사한 심일 중위와 함께 춘천 사수를 위해 끈질긴 전투를 벌여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춘천시민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전투참여의 유공으로 안병하는 1951년 5월 7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한국전사 공훈자편에도 공훈이 기록되어 있다. 6.25 전쟁 참전 중에 압록강까지 진격했었는데, 중공군의 투입으로 가랑잎 속에서 삼일 간 숨어 있다가 후퇴했다고 한다.
청년 장교였던 안병하는 6.25 종전 전인 1953년 봄 다섯 살 아래인 전임순씨와 속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15사단 감찰장교로 지내던 안병하는 부대가 고성군 간성읍에 있고, 이모가 천진에 살고 있어 가까운 속초에서 식을 올리게 되었다. 전쟁 중으로 변변한 예식장도 없던 시절이라 속초중학교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속초에 살던 초등학교 동창도 다수 참석했다고 한다.
74년부터 2년 동안 강원도경찰국장 재직
안병하 부부는 결혼 후 고성군 천진에 일제 때 중학교 관사로 사용했던 솔밭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몇 개월 만에 부대가 이동하면서 화천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고향에서 살던 기억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 안병하는 공직을 따라 계속 떠도는 생활을 한 것이다.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난 안병하는 자주 남대천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곤 했다고 부인 전임순씨는 전한다. 젊은 시절에는 양양 남대천을 찾아 지인들과 함께 어항으로 고기를 잡아 죽을 끓여 먹곤 하였으며, 어렸을 적 친구들이 다수 있어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고 한다.
안병하의 두 남동생은 속초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살다 지금은 작고하였으며, 속초 장사동에 큰 이모가 살고 있었는데 속초수협장 출신 박씨 집안이라고 한다.
안병하는 감찰장교에서 사단 감찰참모, 대대장과 부연대장을 지내고는 1962년 11월 2일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1962년 11월 2일 예편한 안병하는 다음날인 11월 3일 총경으로 채용되었다. 총경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다. 군에서 감찰장교로 근무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정보계통인 내무부 치안국 정보계장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했으며, 1980년 6월 2일 강제사임되기 전까지 17년 7개월을 경찰에서 근무하였다. 부산경찰서장, 서울 서대문경찰서장, 내무부 치안국 방위과장,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전남도 경찰국장을 지냈다. 특히 1974년 10월부터 1976년 4월까지 강원도경찰국장을 지내며 강원도와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74년 10월부터 1976년 4월까지 강원도 경찰국장을 지낸 안병하는 1976년 4월 경기도 경찰국장, 1977년 7월 치안본부 제2부 경비과장을 지내며 평탄한 공직생활을 계속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20일 전라남도 경찰국장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결국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광주시민들 경찰과는 무력충돌 없어
1980년 5월 광주도 서울이나 다른 도시처럼 민주화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1979년 10.26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 이후 12.12쿠데타로 전두환 등 신군부가 사실상 권력을 탈취하고 등장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말로 새롭게 시작된 민주주의가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980년 5월 들어 대학생들은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등을 내걸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에서는 5월 14일 대학생 7만명이 서울역에 모였으며, 다음날 시위군중은 10만명에 이르렀다. 전국 대도시에서 학생들의 민주화요구 시위가 늘어났으나 신군부의 개입을 우려한 학생들은 더 이상의 행동을 자제하고 학교로 복귀했다. 광주에서도 5월 14일 시위를 시작으로 16일에는 학생과 시민, 민주인사 등 5만여명이 모여 민족민주화성회를 열고 횃불행진을 벌였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고 군중과 경찰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학생들도 더 이상의 시위는 하지 않는다고 학교복귀를 선언했다.
당시 광주 전남지역의 치안책임을 맡고 있던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5월 14일 도청분수대의 집회 현장을 찾아가 학생 대표와 만났다. 평화적인 집회와 질서 유지를 요구하고, 시위 중에 경찰서로 연행된 학생 11명을 보내달라는 학생들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 16일에도 박관현 당시 전남대총학생회장과 면담, 평화적으로 시위를 한다는 약속을 전제로 야간 횃불 시위 요구를 허락했다. 당시 경찰로서는 파격적인 조치로 시위대는 폭력 시위를 자제하고 경찰은 시위대를 에스코트하며 질서유지 활동을 펼쳤다. 만약 계엄군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1980년 5월의 광주는 더 이상의 충돌과 희생 없이 끝날 수 있었다. 후에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안병하는 자신의 비망록에 당시의 데모 저지 방침으로 “경찰 희생자가 있더라도 절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고, 일반시민 피해가 없도록 한다”, “주동자 외에는 연행치 말고, 교내서 연행을 금지한다”, “경찰봉 사용에 유의하고 반말, 욕설을 엄금한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전국적으로 터져 나오는 민주화요구와 야당의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 등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 신군부는 사회혼란을 빌미로 5월 17일 자정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학생들과 김대중 등 주요 정치인사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 시위 등을 금지하고 학교를 폐쇄했다. 광주에서도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무차별 학생들을 폭행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공수부대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싸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계엄군과 시위대의 물리적 충돌이 계속되고, 신군부의 강경진압 명령이 떨어지자 안병하는 개인적인 결단을 해야 했다. 명령에 따를 것인지 소신있는 항명을 할 것인지. 항명의 결과는 어떨지 너무나 뻔한 상황이었다. 그는 결국 의로운 항명을 선택했다. 훗날 그는 지인에게 “부마 사태 때 김주열의 머리에 박힌 최루탄이 연상되어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밝혔다.
시위대가 무장을 하자 그는 경찰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회수해 시 외곽으로 소개했다. 당시 경찰봉만 소지했던 경찰은 계엄군에 부상당한 시민들을 치료해주고, 밥도 사주고, 옷도 갈아입히는 등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안병하는 훗날 비망록에서 ‘경찰 및 예비군 무기 탈취’에 대해 “지서의 한두명 경찰 인원으로 무장한 시민군 몇백명에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시민군이 적이 아닌 이상 무기를 탈취당하는 과정에서 사격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시위대도 경찰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계엄군이 경찰이 시민편을 든다는 이유로 구타하기도 했다. 시민군이 광주를 장악했을 때 시민군은 경찰서에 보초를 세우고 경찰시설을 보호했으며, 경찰이 철수한 도경 경찰국장실도 일체의 훼손이 없었다고 한다.
고문후유증 치료차 양양 낙산에 머물어
광주항쟁의 마지막 진압이 펼쳐지던 5월 26일 신군부는 도청진압작전에 경찰이 앞장설 것을 요구하고 강제진압과 발포명령을 내렸다. 안국장이 이를 거부하자 계엄사령부는 그날로 그를 직무유기 혐의로 연행하였다. 1980년 5월 27일자 일간신문의 1면에는 계엄군의 광주진압 기사 아래에 안병하국장의 연행 소식이 함께 실렸다. 헬기로 서울 동빙고의 보안사로 끌려간 안병하는 11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끝내 강제사직 당했다. 육체적인 고문 후유증뿐만 아니라, 육사 8기 출신이었던 안병하로서는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 후배들에게 받은 정신적 모멸감이 너무나 컸다고 한다. 안병하는 고문후유증으로 망가진 몸을 요양하기 위해 고향인 양양 낙산에 머물기도 했는데, 12.12쿠데타 때 신군부에 체포되었던 정승화 전 참모총장도 이곳을 찾아오기도 했다. 신부전증 등 병마에 시달리던 안병하는 광주청문회가 있기 바로 전인 1988년 10월 10일 광주비망록을 완성하지 못한 채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안병하 국장은 평생을 청렴한 경찰로 근무한 탓에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신장이식도 받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지내야 했으며, 유가족은 치료비 등으로 가산이 모두 바닥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미망인 전임순씨는 그동안 집도 없이 전전하다가 간신히 지난해 막내 아들이 마련해 준 서울 후암동의 작은 빌라에 안착하였다.
안병하 전 도경국장의 명예회복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93년 7월 부인 전임순씨는 남편 안병하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로 신고서를 접수했으나 경찰관이고 당시에 사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그러나 전임순씨는 포기하지 않고 소송을 제기해 1995년 5.18 희생자 가족으로 판정받았으며, 2002년 11월에는 남편의 민주화 관련자 인정 통지서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안병하 전도경국장이 살아 생전 소원이라고 했던 국립 현충원 경찰 묘지에 안장된 것은 2005년 11월 24일이며, 정식으로 순직경찰로 인정된 것은 2006년 지난해로 그가 사망한지 18년만의 일이었다.
광주의 5.18 시민단체에서는 “신군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안병하 전국장의 온건 진압지침으로 유혈사태의 확산을 막고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언론에서도 “당시 안병하 도경국장이 계엄군의 협박에 굴복해 시위대에 총을 쏘았다면 시민들이 대거 희생되었을 것이며, 4.19 때처럼 경찰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후배 경찰들도 그의 ‘고매한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고 평가했다.
어린 시절 모천에서 떠난 연어가 긴 여행 끝에 다시 돌아오는 남대천, 비록 육신은 멀리 현충원 묘역에 묻혔어도 안병하의 고결한 영혼은 그의 어린 시절 남대천의 추억과 함께 설악의 향기로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