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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③] 구좌읍 대규모 항일운동 해녀들의 정신 깃든 구좌읍
고경호 기자 <제민일보> 2014년 03월 20일
▲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지미봉 정상에서 바라본 구좌읍 일대. 우도(사진 왼쪽)와 종달 포구(가운데), 성산일출봉(오른쪽) 등이 한 눈에 보인다. 고경호 기자
동복·김녕·덕천리 등 12개 마을 모여 이뤄진 지역 전국 당근 주산지 명성…역사·자연 어우러진 곳
일제의 수탈을 벗어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대규모 항일운동을 벌인 제주 해녀들의 정신이 깃든 구좌읍. 구좌읍은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는 철새 도래지와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수종 숲인 비자림이 있는 자연친화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제주의 역사와 자연을 품고 있으면서 전국에 당근 주산단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구좌읍의 각 마을을 살펴보자.
덕이 있는 연못 있어 덕천리 12개 행정리와 12개 법정리, 60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진 구좌읍은 1153년(고려·의종 7년) 제주목 동면 김녕현(촌)이 설치된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남 제주도 구좌면으로 개편됐고 이후 1948년 도제 실시로 북제주군 구좌면으로 바뀐 뒤 1980년 구좌읍으로 승격,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시행되면서 현재의 제주시 구좌읍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복리(東福里)는 구좌읍의 첫 마을로서 옛 이름은 '갓막'이다. '곳'의 뜻은 해변가로 보이는데 '막'은 '집'을 뜻하는 말인지 확실치 않다. 일부에서는 민간에서 불리던 '골'은 경계, '막'은 작은 촌락이란 뜻으로 부르던 것이 마을 명칭이 됐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 동복리란 마을 명칭은 1875년(조선 고종12년)에 당시 초대 경민장인 신영수를 중심으로 해가 뜨면 동쪽을 먼저 비춰 영광과 복이 온다는 뜻의 '동복(東福)'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김녕리(金寧里)의 옛 이름은 '김녕, 짐녕'이다. '金寧(김녕)'의 한자는 고려시대부터 표기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녕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옛 김녕리 동쪽을 '동김녕리', 서쪽을 '서김녕리'로 운영하다 1999년 7월11일 주민투표를 통해 두 마을을 합치기로 하고, 2000년 1월1일부터 두 마을을 병합해 다시 김녕리로 바꿨다.
덕천리(德泉里)는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로서 옛 이름은 '금을흘·금흘, 검은흘' 또는 '검월'이라 불렸다.「구좌읍지」(부영성·1986년)에 따르면 비가 오면 토질이 검고 질퍽질퍽하기 때문에 '검을'이라 불리게 됐고 우뚝한 돌 동산이 많고 바위가 많아 '흘(屹)'을 쓰게 됐다고 한다.
현재의 덕천리 지명은 예부터 마을 내 '모사니 물'이라는 연못이 있어 주민들이 '덕(德)'이 있는 물로 칭해왔고 이로 인해 마을 이름을 '덕천'으로 표기했다는 설이 있다.
월정리(月汀里)는 구좌읍 북쪽 해안에 형성된 해안마을로서 옛 이름은 '무주개, 무주애'다. 현재의 '월정(月汀)' 표기는 마을의 한학자가 마을의 지형이 반달과 같고 바닷가에 접해 있다는 데서 또는 달이 뜨는 바닷가라는 데서 '월(月)'과 '정(汀)'을 합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유난히 바람 많기로 유명한 행원리(杏源里)의 옛 이름은 '어등개'다. '어등개'는 바람이 많고 포구가 잘 발달돼 물고기들이 물결에 밀려들어온다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행원(杏源)' 표기는 마을 주민이 어질기를 바라서 '인(仁)'자의 뜻을 내포한 행자와 그 근원을 말하는 원자를 합해 행원리로 명명했다고도 하고, 일제에 의해 행정개편이 이뤄지면서 아름다운 살구나무 군락이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행원(杏源)'리로 지어졌다고도 한다.
▲ 하도리에 위치한 철새 도래지. 해수와 담수가 교차, 새들의 먹이가 풍부해 해마다 다양한 철새들이 보금자리를 트는 새들의 고향이다. 고경호 기자
'웃' '알'로 나뉜 상·하도리 한동리(漢東里)의 옛 이름은 '궤' 또는 '궤을·궤슬'이다. '궤'의 뜻에 대해서 '고양이'의 옛말이라는 설과 '바위굴'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현재의 '한동(漢東)' 명칭은 마을 이름이 '궤'라 불렸을 당시 마을에 도깨비불이 날아오르거나 헛불이 날아와 집을 태우는 등 기이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자 이병휘 목사가 도깨비불을 끄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므로 '한(漢)'을 쓰고 한라산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동(東)'을 합쳐 현재의 '한동(漢東)'으로 개칭됐다는 설이 있다.
300~600년 된 비자나무 수천그루가 자생하는 비자림이 있는 평대리(坪垈里)의 옛 이름은 '벵듸'이다. '벵듸'는 '돌과 잡풀이 있는 널따란 들판'이라는 뜻의 제주어다. '坪代, 坪岱, 坪垈(평대)' 등은 모두 '벵듸'의 한자차용표기로 현재 평대리의 한자표기는 '坪垈'로 쓰이고 있다.
송당리(松堂里)의 옛 이름은 '손당·송당' 등으로 불렸다. 송당에는 '송당루(송당지)'라는 당이 있었는데 당 안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어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큰 소나무가 있는 집이라 하여 '송당'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구좌읍지」(강대원·1979년)는 전하고 있다.
세화리(細花里)의 옛 이름은 '가는곳·가는 곳'이라 불렸는데 '가는곳'은 아끈다랑쉬(작은 월랑봉)에서 현 세화리 남측까지 가느다랗게 뻗어온 나무숲을 이르는 말이다. 현재의 세화(細花)는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표기되기 시작한 것으로 '가는곳'의 '곳'을 꽃으로 미화해 지어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진원지인 상도리(上道里)와 철새 도래지가 있는 하도리의 옛 이름은 '도이여(도려)'다. '도의'의 뜻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여'는 '물속에 잠겨 있는 바위'를 뜻하는 제주어다.
「남사록」(1601~1602년)에 '알도의여을'의 한자차용표기인 '下道衣離里'가 표기되고 있고 18세기의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 상도의리리(上道衣離里) 표기가 확인돼 적어도 16세기에 '도이여' 마을이 '알도의을'과 '웃도의여을'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웃도의여을'은 현재의 상도리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자차용표기로 상도의리리(上道衣離里)로 표기하다 18세기 초반 상도의리(上道衣里)로, 19세기에는 '의(衣)'자가 생략되며 오늘날 상도리(上道里)로 이어지고 있다. 하도리는 '알도의여을'로서 1510년(조선 중종 5년)에 '알도의여을'에 별방진이 생기면서 '별방을'로 불리기도 했다.
▲ 1510년(중종 5년) 우도에 자주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구좌읍 하도리에 지어진 별방진성. 고경호 기자
구좌읍의 가장 동쪽에 있는 해안마을인 종달리(終達里)는 '종다리' 또는 '종다릿개'로 불렸다. 민간에서는 '종달이(종다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終達(종달)'은 '종다리'의 한자차용표기로 파악할 수 있다. 종달은 '맨 끝에 있는 땅' '제주목의 동쪽 끝 마을' '지미봉이 종처럼 생겼고 그 인근에 형성된 마을' 등 다양한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법정리와 행정리~里는 읍(邑)·면(面)의 하부 행정 구역이다. 행정리(行政里)는 도시 지역의 통(統)과 대등한 행정 구역이고, 里長이 그 행정리를 대표한다. 법정리(法定里)는 법률로 지정된 전통적인 명칭이다. 행정리와 법정리의 구분은 예를 들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는 법정리이고, 왜관1리~16리는 행정리이다. 광복 당시까지 평안북도, 함경북도에서는, 읍·면의 하부 행정구역은 리가 아닌 "동"(洞)으로 불렸다. (예: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薪島面) 동주동(東洲洞)) 이것은 형식상 지금도 유효하다(이북 5도청 참고). 1988년까지 경상북도 등에서는 읍·면의 하부 행정구역은 "동"(洞)으로 불렸다가, 일괄적으로 리(里)로 변경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