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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5월 27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15,22-31 요한15,12-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17)
사랑이 사랑이라면 /김찬선신부님
언젠가 한 수도자와 대화를 하는 중에
그분이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는 말에 거부감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뉘우치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도.
베풀다는 말이 상당히 시혜적으로 들렸습니다.
상당히 높은 사람이
줘도 되고 안 줘도 되는데
위에서 크게 선심 쓰듯 뭔가를 주고
그에 따른 치사를 기대하는 그 사랑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렇게 거슬렸던 것은
저 또한 많은 경우 시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을 위해 일을 할 때에도
제가 시혜적인 태도를 취할까봐 매우 신경이 쓰입니다.
“너희는 얻어먹으면서도 어찌 그리 배짱이냐!
또 한 번 그런 식으로 하면 때려 칠거야!”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시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우리의 사랑은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말씀을 존중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내 사랑을 큰 희생으로 주는 것이라면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지만
나누도록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반드시 나누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사랑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만드신 사랑입니다.
누구를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군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사랑이라면
사랑 받는 이로 하여금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황송하게도 발 닦임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러러 나오는 마음으로 형제의 발을 닦을 때
우리는 예수님 사랑의 반열에 오릅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 어울리려면
예수님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으스대는 사랑,
칭송과 감사를 대가로 요구하는 사랑,
그러지 않으면 포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사랑,
받은 사랑이 하도 많아 넘치는 사랑,
사랑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의 사랑,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사랑,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계명의 사랑입니다.
"참 좋은 친구" /이수철신부님
주님은 우리 모두의 참 좋은 친구입니다.
친구인 주님과 속내를 털어 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월 흐르면서 색깔 바래지듯,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때는 색깔 짙었던 관계들도
지금은 희미하게 자취만 남아있기도 할 것입니다.
다 퇴색해가더라도
주님과의 우정은 날로 짙어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이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깊게 합니다.
날로 색깔 바래져 가는 사랑이 아니라,
날로 짙어져가는 사랑입니다.
이 주님과의 사랑이
허무를 딛고 초록빛 열정으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마지막 친구는 주님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친구’라는 호칭, 얼마나 영예롭고 고마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면
비로소 주님의 친구가 된다 합니다.
주님과의 우정의 깊이는
저절로 형제들 사랑으로 표출됨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와 주님과의 우정의 상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날로 바래져가는 상태입니까?
날로 짙어져가는 상태입니까?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던 숱한 성인들,
참으로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다음 두 사도들에 대한 묘사도 감동적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예루사렘 교회가 두 사도에게 붙여준 명예로운 칭호대로
두 사도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미 타계한 불교의 고승 성철 종정의 좌우명도 생각납니다.
종신불퇴(終身不退),
몸이 다하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몸 다 바쳐 진리를 수호하겠다는
수행자의 결연한 의지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인 바르나바와 바오로요,
역시 진리 수호를 위해
평생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진리의 참 좋은 친구, 성철 종정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친구로 택하셔서
우정을 깊게 하시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면서
우리를 주님의 참 좋은 친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시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양승국신부님
이 시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이겠는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끔씩은 철길로 뛰어든 취객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는 의인들을 볼 수 있지만 그런 특별한
상황을 접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지요.
때로 화재진압 중에 불길에 갇힌 사람을
구하고 희생되는 소방관들,
동료나 시민을 구하고 순직한 경찰관들이나 군인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남몰래 무상으로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진정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이란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금만 더 의식하면서 살면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기회"가
일상 안에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들은 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이웃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일은
어떤 의미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이웃의 그 "쓰잘대기 없는" 말들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노력
이야말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이웃의 그 지독한 상처와 고독을 삭여주는 일이야
말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이웃의 가슴 미어지는 사건 앞에 함께 가슴아파
하는 일이야말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돈보스코 성인의 사무실을 노크할 때마다
한결같이 체험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느낌은 찾아갈 때마다 돈보스코는
마치 막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빠져나온 듯한 사람 같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보스코의 일상은 깊이 있는
관상기도로 충만해있었다는 것입니다.
방문객들이 느꼈던 두 번째 체험은 자신이 받았던
극진한 예우, 진심 어린 환대였습니다.
대화를 나눌 때 돈보스코는 진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자신 앞에 있는 그 방문객과 대화하는 것을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겼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가
그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깍듯이
예우를 갖춰 존중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며
성실히 대화에 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송영진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예수님의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
어느 한쪽에게만 해당되는 명령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서로'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사랑을 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그 사랑을 거부하거나 받은 사랑을(은혜를) 배신으로 돌려준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또 어디까지
그 배신을 참고 견디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미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돌아온 것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배은망덕이었습니다.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지진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서
한국이 독도의 실효지배를 강화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하는지...
그래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과서적인 대답이고,
무조건 참아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꾸짖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앙갚음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함께 가기 위한 목적의 회초리...
개인의 사적인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가는 것만 있고 오는 것은 없거나 배신감만 얻게 된다면...?
역시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럴 때 무조건 참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교과서 같은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의 질책도 필요합니다.
.....
신앙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의무는 있지만, 사랑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의무는 도덕적인 의무이기도 하고, 종교적인 의무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사랑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네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
그저 부탁하고 요청하고 호소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요구할 수 없고 요청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또 한 가지,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으니 받는 일밖에는 할 것이 없다. 베푸는 것은 네가 해라."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
정말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처지라고 해도...
(사랑 실천이 물질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친구가 되어 /김동하 신부님
800여 년 전 가녀린 나뭇잎이나 듬직한 바위나 풀을 뜯는 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은 덕분에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린 것입니다. 겸손과 가난을 받든 덕분에
보이는 임들 안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입니다.
어떤 임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모습도 생각도 환경도 다르지만 임을 위하여 내려놓고 받아들이기에
대화할 수 있습니다. 격을 무너뜨린 친구끼리의 대화는
사랑을 만날 수 있기에 힘이 솟고 기쁨이 넘칩니다.
하늘에 계신 임께서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내려놓으시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목숨을 팔아서 당신의 임인 인간을 품속으로 사들입니다.
친구로서 보여주시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임을 친구로 두었다는 것이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한량없이 기쁩니다.
예수님의 계명 /최병조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참으로 벅찬 계명입니다. 늘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고 더욱이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명령이니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친구라고 부를 것이고,
우리는 삶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며, 그분은 아버지에게 청하여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얻게 해주실 것이라고요.
사랑의 열매는 참으로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한테는 아무 문제도 걱정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사가는 먼저 그분 안에 ‘머물라 (stay in me)’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남아있으라 (remain in me)’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선 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구체적 사랑 실천으로
늘 그분 현존을 드러내며 ‘남아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조건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한 우리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 ! 우리의 사랑으로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소서. 아멘.’
서로 깊이 사랑받음을 /윤영수 수녀님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그 방법을 자세히
안내해 주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주님은 제가 순수한 이타적 사랑을 할 때
그분의 참 벗이 되는 거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의 일상을 돌아보면 그분의 친구로 살았던 시간보다
친구임을 빙자한 이기적 사랑을 했던 적이 더 많습니다.
오늘은 보건복지부에서 정한 제2회 '입양의 날'입니다.
친부모가 직접 키울 수 없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부모와 자녀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 입양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오늘 복음 말씀에 기인한 사랑의 방법으로
18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하여 지금은 2,080명이 넘는 아기들이
따스한 양부모의 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힘없고 나약한 아기에게 기꺼이 자신의 가정을 제공하여
평생 감싸주고 사랑을 피워내는 삶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배려하는
양부모 가정이야말로 제가 가장 가까이 주님 사랑을 배우는 장입니다.
정성껏 아기 돌보는 봉사를 하던 어느 봉사자께서
유난히 자신을 따르며 반겨주던 아기를 입양하고 몇 개월 후에
행복한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기를 위해 입양을 했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아기로 인해 저희 가족이
삶의 고귀함을 체험하고 하느님 사랑이 무언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답니다."
사랑은 삶 안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우리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나눔 /권태문 신부님
예전에 중국 호북성의 형주시에 있는, 한국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나환자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 있는 나환자들은 그곳 센터로 오기 전에 모두
독거노인들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이후로 가족들에게서 버림받고,
도움도 없이 홀로 살아야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환자들 대다수의 마음 안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다는 걸 체험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같이 살았던 나를 이렇게 사람처럼 살게 해준 수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천주님을 알진 못하지만, 배우고 싶습니다. 천주님은 수녀님같이
따뜻한 분이시겠지요.” 은혜를 잊지 않는 따뜻한 그 말씀 안에, 그들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 나병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외톨이가 되어, 병은 점점 깊어지고, 정말 상처와 고통뿐인 삶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센터로 온 후, 수녀님들의 지극한 간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몸의 상처와 더불어, 마음의 상처까지 깨끗이 치유된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나눔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수녀님들의 사랑의
나눔은 가난하고 소외된 그 나환자들의 삶을,
어둠과 절망의 그늘에서 빛과 희망의 삶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신을 인간으로 만나다 /손우배 신부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처럼 느끼고, 슬퍼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자기가 믿는
신을 우리처럼 인간으로 만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더욱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당신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당신과 일치하도록 초대된 자녀들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한낱 피조물인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품격은 엄청난 격상을 하게 됩니다.
옹기장이는 자신이 만든 옹기를 소중히 아낄 수는 있지만, 자신이 만든 옹기를
사랑하고 또 벗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자신이 만든 옹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나’라는 옹기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 놓으시는지요!
사랑이 그대안에 머물고 / 류해욱 신부님
오래 전에 낸 제 졸시집 제목이 ‘그대 안에 사랑이 머물고’입니다.
‘사랑이 그대 안에 머물고’라는 제 졸시의 하나를 어순을 바꾸어 시집 제목으로 택했지요.
오늘 어느 잡지에 ‘길’에 관한 글을 하나 쓸 일이 있어 다시 그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시라고 내어놓았던 일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제 시가 대개 그렇지만 저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신부로서
독자들이 복음을 한 번 더 음미하게 하고 싶은 바람에서 시를 쓸 뿐이지요.
그 시도 시라기보다 지난 주와 이번 주 내내
복음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고별사 가운데 핵심인
사랑에 관한 말씀들을 되새기는 안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이 그대 안에 머물고
- 요한 복음 14장에 대한 단상 -
그대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가는 길을.
주님 모릅니다.
당신이 보여주지 않으시면
어찌 알 수 있습니까?
그대 나를 모르는가?
그대 정녕 나를 모른다고 하는가?
그대 줄곧 나를 따라다니지 않았는가?
내가 바로 길이다
그대가 따라 걸어온 길
그대가 따라 걸어야 할 길
그 길은 영원에 맞닿아 있어
따라 걷노라면 아버지를 뵙게 되리라
아니 그대는 이미 아버지를 뵈었다
그대 어찌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는가?
그대 믿지 않는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대가 나를 만난 순간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 안에서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때문이다.
주님 알아듣지 못하나이다
깨우쳐 주십시오.
본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서나니
화살이 과녁을 꿰뚫듯
순간에서 영원을 가로지르는 열림이나니
그대 다만 믿어라
알게 되리라
나는 생명이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이어니
내 안에 머물면 죽더라도 죽지 않으리라
그대 사랑한다면
알게 되리라
빗줄기에 잎이 푸르러지듯
한줄기의 햇살에 꽃이 피어나듯
나에게서 흘러나온
사랑의 샘물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나 아버지께 기도하리라
그대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위로자를 보내주시라고.
사랑이 그대 안에 머물고
그대와 함께 번져 나가리라
나 다시 오리라
그대를 사랑하기에.
떠남은 다만 순간일 뿐이니
그대 다시 나를 보게 되리라
그대 깨달으리라
그대가 내 안에
내가 그대 안에 있다는 의미를.
그리하여
그대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안에서
나를 만나게 되리라
내가 그대 안에 있듯
그들 안에 그대가 있고 내가 있나니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사랑은 그대 속으로 흘러들어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리라
지금 그대가 알지 못할지라도
사랑이라고 부르는 위로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
그대에게 평화를 주나니
평화가 그대와 함께 머무르리니
가거라 세상 안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우리가 진정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까?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은
그분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진정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려고 애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바람이 있다면, 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계명이라고 하시며 주신 말씀이며,
계명이란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뜻도 되니까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 참 많이 쓰면서 진정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말. 사랑.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연인 간의 사랑을 먼저 생각합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친구 간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이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가 그분의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친구 간의 사랑. 그 사랑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라는 말씀을 다시 새겨듣습니다.
물리적인 의미의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뜻보다는
영적인 더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서> : 은총과 자유의 교회 /경규봉 신부님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의를 한 다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신도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유다와 실라를 대표로 뽑아
바울로 일행과 함께 안티오키아로 파견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에 의하여 최초로 설립된 교회이며,
대부분의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방인 신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격려하고
공의회의 공적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방인 신도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이 아니며 잘못된 주장이다. 바르나바와 바울로의 가르침이
올바른 가르침임을 공적으로 인정한다. 다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말 것이며,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이러한 결정을 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주체는 곧 성령과 사도들이다.
사도들은 이러한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에게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권면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 편지를 읽고 격려를 받았으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공의회의 공적인 결정에 따라 교회는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신도들은 모두가 유다인이었고,
같은 하느님을 믿으며, 같은 성경을 경전으로 삼았다. 다만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만이 교회와 유대교가 달랐을 따름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선포했으나 유대교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유대교와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공의회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유대교와 결별하였고,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공의회는 다만 몇 가지 점에 유의하도록 권면한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말라는 점이다. 이는
이방인 전교 과정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공의회는 이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바울로는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1고린 8,1-13; 10,27-28; 갈라 2,11-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식을 먹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지 않도록 하며,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을 먹지 말도록 한 것은 구약에서
금지한 것이다(창세 9,4; 레위 17,14; 신명 12,16.23).
목 졸라 죽인 짐승은 피가 몸속에 남아 있으므로 먹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었다(레위 17,11).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금했다. 이는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음란한 행동을 말한다. 음행은
자신의 몸에 죄를 짓는 것으로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에(1고린 6,17-20), 또한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출애 34,15-16; 레위 20,5) 이를 금했던 것이다.
이로서 교회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다만 신도들이 지켜야 했던
몇 가지 규정은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세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는 규정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은총과 자유의 종교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주어졌고,
인간은 자유를 누리며,
자유 속에서 그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된다.
오늘,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유를 폐부 깊숙이
숨 쉬며 느끼는 하루가 되자.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자.
사랑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산다 /박상대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말씀(15,1-8)이
전체의 흐름을 주도한다. 복음의 주제는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가지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농부에 의해 잘려나가지 않고 계속
나무에 붙어있게 되며, 역으로 계속 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는 가지와 나무의 기쁨이요, 동시에 농부의 기쁨이며,
농부의 지속적인 손질을 유발한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동시에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1차 고별사의 대의(大意))였던
“서로 사랑하여라.”(13,34)는 새 계명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12절, 17절)
이는 후기편집자의 의도를 역력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이기보다 요한복음 공동체 안에 발생한 ‘서로의
불신과 반목’ 등을 경고하는 후기 편집자의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복되는 계명은 곧 ‘서로 간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12절)
사랑에도 등급(等級)이 있으며, 사랑도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며 잘라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사랑이 벗을 위한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주인이 종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여 얻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이루어지며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드러난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오늘
고별의 밤을 지낸 다음 날 실제로 보여주실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공유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신다.(15절)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된다.(14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시키신다.
가지가 나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무가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가지는 철저하게 나무에 종속된다. 즉 나무와 가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지가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다면
이 관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16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I love you!)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보다 조금 더 큰 사랑은
옷을 입고 육화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영어 문장의 스펠링으로 운을 띄워보자.
I : 실제로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L : 혼자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도 듣는 것이다.
O : 누구도 열 수 없는 마음의 문을 열어 남에게 공간을 주는 것이다.
V : 우정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E : 신뢰심과 믿음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Y : 좋은 분위기를 배려하고 조성하는 것이다.
O : 타인의 잘못을 한 번 이상 눈감아 주고 덮어주는 것이다.
U :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인 행동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이며,
결국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저는 최대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즐긴다는 게 맨 날 논다는 뜻이 아니라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즐겁게 하고, 되도록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하며,
언제든지 뒤돌아서면 후회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저를
만들어 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안 될 때도 있고
힘든 날도 있겠지만, 그 까짓것 때문에 피해가고 뒤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도 저의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죠. …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헤쳐 나갈 용기가 있습니다. …”
[이 글은 1974년 7월 13일 울산광역시 우정동에서 출생, 일본 유학 중이던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철길에 뛰어든
취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故) 이수현님의 생각이다.
고인(故人)은 부산 시립공원(금정구 두구동) 7묘원 39블록 1106호에 잠들어 있고,
추모기념비는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 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에 세워져있다.]
비밀 /노성호 신부님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습니다. 좋은 일이어서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에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비밀도 있고, 별로 좋은 일이 아니기에 들춰내고 싶지 않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혼자서 삭히고 마는 비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비밀은 결코 없는 것인지, 언젠가는 누군가를 통해서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비밀이라는 것을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의 전 인격이 노출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입이 가볍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각인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바로 비밀을
말해 줄 수 있고, 말해 주고 싶은 좋은 사람, 그는 바로 친구입니다. 저는 학
생들을 만나면 늘 “오~ 내 친구들! 어서 와. 반가워” 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사제라면 어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 같은 벽을 허물고자 함입니다. 때로는 수많은
난관에 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과 하나 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비밀들을 알려 줍니다. 그 비밀은 작고 소박해 보이지만,
친구들이 맺게 될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소중한 비밀이기에 우리 모두를
‘친구’라고 불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살며시 알려주는 게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만
속삭여 주셨던 아름다운 비밀이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속삭여 줄 차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박아미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제자인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유죄다.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지 않고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면 그분은 뱉어버리실 것이다(묵시 3,1516).
그러나 그분의 단호함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연약한 우리가 기댈 수 있도록 은근슬쩍 어깨를 빌려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에서 ‘∼처럼(kaqwv?’은 단순 비교가 아니라
제자들의 행동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라는 의미다.
곧 예수님께 사랑받은 체험이 서로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제자들은 스승이 떠난 후에도 이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서로 사랑했고, 목숨을 내놓았으며,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안데르센 동화에 ‘찻주전자의 행복’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자만심 강한 찻주전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양새를 뽐내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찻주전자는 그만 바닥에 떨어져 주둥이는 깨지고 손잡이도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한동안 구석진 곳에 쓸모없이 놓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망가진 찻주전자 속에
흙이 채워지게 된 것이다. 찻주전자는 이제 끓는 물과 차 대신에 흙을 품었고
거기에 작은 꽃씨 하나가 심어졌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몸 속에 심장이 고동치고 맥박이 뛰기 시작한 것이.
씨앗은 싹이 텄고 얼마 후 예쁜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곧 그 꽃을 좋은 화분에 옮기기 위해 찻주전자를 두 조각으로 깨어버렸다.
찻주전자는 지독히 아팠다. 그는 마당에 내던져진 채
부서진 낡은 조각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슬프지 않아. 내겐 잃어버릴 수 없는 사랑의 추억이 있거든.”
누구에게나 사랑의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사랑을 찾아 5월의 따스한 햇살을 벗삼아 여행을 떠나봄은 어떨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유시찬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사랑은 심리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를 심리차원의 문제로 오해하다 보니
쓸데없는 죄의식을 떠안고 살아가게 된다.
마음의 차원에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구별이 있는 것은 사시사철의 변화와
구분이 있는 것과 같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각자가 모두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모양새도 제각기 다르다.
얼굴이 못 생겼다 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대상을 싫어한다 해서 죄가 될 것은 아니다.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함과 싫어함이 있는
상대적 지평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사랑한다 해서 특별히 상 줄 일도 아니고
미워한다 해서 벌을 줄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내 마음에 안 들고 싫어하는 이라고 해서,
그가 올바른 소리를 해도 인정하지 않고
좋은 의견을 내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이 된다.
진리의 차원에 서 있지 않은 것이다.
영의 차원은 진리의 차원이다.
진리는 이분법적으로 쪼개어
그 중 하나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뒤섞음이
없이 둘 다 끌어안는 가운데
둘을 뛰어넘어간다.
뛰어넘어서는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지평을 창조해낸다.
사랑이란 이와 같이 영적 차원의 문제이다.
이성 내지 마음의 차원은 호불호를 다투며 거듭거듭
나뉘어 나가는 것을 본성으로하는 반면,
영의 차원은 그 나뉜 것들 상호간에 질서를 잡고
통합을 이뤄냄을 그 생명으로 한다.
각자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구분 지어 지고 그에 따라
가까이함과 멀리함이 있다 손치더라도,
영의 차원에서는 그 좋아함과 싫어함을 함께 묶어
통일을 이뤄내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차원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이 사랑 안에는,
마음의 차원에서 볼 때의 사랑함과 미워함이 함께 들어있고
상호간에 밀고 당기는 가운데 영적 의미의 참된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밤과 낮이 번갈아 움직이며 하루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온갖 생물들을 살려내고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본래의 사랑이 이러하다 보니 사랑하려고 애쓰고 결심한다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많이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애쓰고 결심하는 것은 기껏해야
심리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리차원으로써 영적 차원을 해결하거나 다스릴 수는 없다.
다만 심리적 움직임들 즉 사랑할 때의
느낌들과 미워할 때의 느낌들을 살펴보며
영적 차원에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면 유용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가뭄 끝 단비 같은 고마운 존재 /양승국 신부님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는군요.
모심기를 준비하시는 농부들에게 반가운 손님 같은
고마운 비입니다. 저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번 비로
단숨에 쑥쑥 키가 클 모종들 생각하니 흐뭇할 뿐입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가뭄 끝 단비’와 같은 반갑고도 고마운
존재여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시는데,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 기다리던 단비처럼
존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요?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스트레스의 원천이 아니라 행복의 원천,
기쁨의 원천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겠지요.
업무 차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니
꽤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버스가 끊어져 택시를 탔습니다.
게다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목적지를 대니 기사님의 얼굴에 조금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꽤 외진 곳이거든요. 게다가
강의록이랑 영적독서 책을 넣어
안주머니가 불룩한 새까만 잠바를 입었지요.
그럭저럭 집 가까이 도착했는데, 비도 많이 오고해서
수련관 건물까지 100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되니 조금 더
올라가자고 부탁드렸습니다.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긴장된 얼굴로.
그 순간 약간 기분이 묘했지만,
기사님의 입장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아무소리 않고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는 한밤, 만만치 않게 생긴 사람이
불빛도 없는 으슥한 곳으로 올라가자니
얼마나 겁이 나셨겠습니까?
요금을 받자마자 총알처럼 달려 내려가시더군요.
비를 맞고 수도원으로 걸어 올라오면서
혼자 킥킥 웃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생각하면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분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는 외치는 사랑이란
것, 특별한 것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
상대방 입장에서 서보는 것, 나 자신을 비우는 것,
나란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육체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결코 다가 아니기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딱딱하기 그지없는 나란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오랜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일,
그래서 결국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는 일,
결국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 사물, 상황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일이 사랑이 아닐까요?
결국 사랑은 부드러움, 강요하지 않음, 겸손, 떠남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꽃이 저리 아름다운 것은 자기 자태를 뽐내지 않기 때문이고,
무지개가 저리 고운 것은 잠시 머물다 가기 때문입니다.
겸손, 떠남, 그것은 사랑,
아름다움의 가장 큰 배경입니다.
2011.5.27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15,22-31 요한15,12-17
사랑의 깊이 /이수철 신부님
하느님 사랑의 향기를 맡듯이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깊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랑의 깊이에서 발산하는 사랑의 향기요,
사랑이 깊어지면서 하느님을 점점 더
알게 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한량없는 사랑의 깊이를 지니신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의 깊이는 다
다를 것입니다. 이 사랑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경을 요약하면 이 한 구절입니다.
곧 이어 나오는 다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당신 친구들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서로 사랑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 사랑의 열매가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제 정원의 잡초를 뽑으면서
함께 삶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말끔했던 잔디밭이 잡초 밭으로 변했습니다.
뽑고 뽑아도 함께 살겠다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정원의 온갖 잡초들입니다.
공존공생이 삶의 원리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잔디만이 독점할 수 없는 땅이요
생명을 지닌 것들이
함께 붙어살아야 할 땅입니다.
땅만 아니라 공기도, 물도,
햇빛도, 밥도 나눠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복지가 잘 되어
교육도, 일자리도,
의료혜택도 함께 나눠야 합니다.
새삼 독점이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함께 나눔의 중심에
모든 함께 나눔의 원형인
성체성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하늘을 함께 나눠야 하듯
밥도 함께 나눠야 한다는,
밥이 곧 하늘이라는 시가
성체성사의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함께 밥을, 성체를 나누기에
한 식구(食口)의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바로 이 구절이 서로 사랑의 기준입니다.
이 주님 사랑에 부단히 점검하고
비춰봐야 하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마치 소금 같은 이 주님의 사랑이
서로 사랑의 부패와 변질을 막아주고,
우리의 서로 사랑을 더욱 정화하고 성화하며
깊고 넓게 해 줍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깊어지면서
더불어 깊어지는 서로간의 사랑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위의 묘사를 통해
바르나바와 바오로, 그리고
성령과 자신들의 의견을 동일시하는
사도들과 원로들의 주님과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여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영예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서로 간의 사랑도 깊어져
풍성한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은 당신과의 우정을 깊이 하고자
우리를 친구로 뽑으셨습니다. 하여
당신 아드님의 친구들인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다 이루어주십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가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 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마음이 새겨야 할 다음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멘.
흐르는 사랑 /강영구신부님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어버이의 하늘같은 사랑을 받고 생명을 이어온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되갚지 못하고 자식을 낳아서 자식 사랑으로 대신합니다.
자식들도 같은 일을 되풀이 하면서 ‘내리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물 흐르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사랑이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지요.
‘치사랑’도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을 하면서 ‘치사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15,9)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내리사랑’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우리가 ‘내리사랑’을 할 차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은 생명을 살리고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습니다.
사랑 받기만 하고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이미 병든 사람입니다.
당신 가슴에 가득한 하느님 사랑이
물처럼 흐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Worthy is the lamb / 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