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2023년 10월 8일 전 4:9-12
1. 연대(連帶 solidarity)
(1) [밤의 방문객]
영국의 작가 존 프리스틀리(J. B. Priestley)가 쓴 희곡 가운데 <밤의 방문객>(An Inspector Calls)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해드립니다.
영국 중북부 어느 안락한 집에 버링(Birling) 일가가 살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큰 공장의 사장이자 지역 정치인인 아서(Arthur)는 딸 쉴라(Sheila)가 경쟁업체 사장의 아들 제럴드 크로프트(Gerald Croft)와 약혼한 것을 매우 흡족해 합니다. 그 결혼을 통해 두 회사가 더욱 번창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딸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한 만찬에는 행복감이 넘쳐흐릅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방에서 긴 식탁을 가운데 두고 가족 모두가 둘러 앉아 샴페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구울(Goole)이란 이름의 수사관이 불쑥 찾아옵니다. 에바 스미스(Eva Smith)란 여자가 음독자살을 했는데, 일기에 이 가족이 언급되어 있어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버링은 에바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여자라 생각하고 자신 있게 수사관의 심문에 응하지만, 결국 그녀가 몇 년 전 임금착취에 항의하다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여직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그게 오래 전의 일이니 지금의 사건과는 무관하다 생각하여 안심하려는 순간, 검사는 그의 딸 쉴라에게 심문을 계속합니다.
쉴라는 어느 날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다가 그곳 점원을 혼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점원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그녀가 자신보다 예쁜 것에 질투가 났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점원이 바로 에바 스미스였는데, 그녀는 결국 그 일로 그곳에서도 해고되었음이 밝혀집니다.
연이은 실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든 에바 스미스의 처지는 먹을 것은 물론 잠잘 곳조차 없을 정도로 비참해졌습니다. 에바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어떤 남자한테 희롱을 당하는데,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녀를 구해준 남자가 바로 쉴라의 약혼자인 제럴드입니다. 그는 에바 스미스를 측은히 여겨 자기 소유의 아파트에 살게 하지만, 그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처음의 순수한 의도는 희석되고, 그녀를 정부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쉴라와의 결혼을 위해 제럴드는 그녀를 버렸습니다. 가명을 썼기 때문에 그게 에바 스미스인 줄 몰랐지만, 수사관은 그게 동일인임을 확인시켜줍니다.
다음으로는 그 집의 안주인 시블(Sybil)이 심문 대상이 됩니다. 상류층의 귀부인이자 자선단체를 책임지고 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지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시블은, 심문 결과 혼전 임신에다가 무일푼인 절망적인 상태에서 도움을 청하러 온 에바 스미스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서 내쳤던 적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마지막으로, 그 집의 아들 에릭(Eric)은 에바 스미스를 임신시킨 장본인입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지만, 사랑에도 돈이 필요한 법. 아버지로부터 넉넉한 돈을 타낼 수 없었던 에릭은 아버지 사무실에서 돈을 훔쳐서까지 에바에게 주지만, 그 돈을 받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에바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음독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도움을 청하러 왔던 에바를 몰인정하게 내쳐서 결국 자신의 손자마저 죽게 한 어머니를 에릭이 원망하면서,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행복했던 만찬의 분위기는 최악의 상태가 됩니다.
그 순간 잠시 밖에 나갔던 제럴드가 어느 경관을 만나 구울이란 수사관에 대해 물어보는데, 놀랍게도 검찰과 경찰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급히 돌아와 전화로 그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요양소에도 전화해보지만, 구울이란 수사관도 음독자살 사고도 없었음이 확인됩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한 순간, 가족들은 안도하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때 음독자살 사건 때문에 조사차 방문하겠다며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2) 연대의 중요성
이 연극의 마지막에 걸려오는 이 전화가 이 작품의 제목(An Inspector Calls)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는데, 에바 스미스의 자살 이야기는 비록 허구지만 결코 허구로만 생각지 말라는 작가의 경고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연지사 사람도 물론 연관되어 있습니다. 비록 에바 스미스의 자살 이야기는 허구일 수 있지만, 제2, 제3의 에바 스미스는 실제로 우리 신문지상에 늘 나오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용인에서, 의정부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는 바른 태도가 못됩니다. 불쌍하게 죽은 에바 스미스의 비극에 우리 모두는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불행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같은 불행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와 히틀러에 반대해 고백교회를 목회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나치)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치의 각개격파 작전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독일의 지식인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야기입니다.
2. 전도서 4:9-12
오늘 본문 전 4:12에서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겹줄(삼 겹줄)이란 세 가닥을 꼬아 만든 줄을 말합니다. 마치 여자 아이들 머리 땋듯이 꼬아놓은 이런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지요. 한 가닥 줄은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 연대가 인간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점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교인들은 그 중에 어떤 교회를 다닐까요?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좋은 교회를 다닙니다. 여기서 좋다는 말은 나에게 좋은 교회를 말합니다. 나에게 좋다는 것은 뭘 뜻하는 것일까요? 목사와, 그리고 교우들과의 친소관계를 말합니다. 그 친소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저는 교인들이 설교말씀이 좋은 교회를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교인들은 목사님 설교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익숙하고 친한 교회를 다닙니다. 익숙하고 친하다는 것은 교제가, 친교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교제와 친교가 있는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힘이 되고, 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3. 수련회를 가는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수련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수련회에는 프로그램을 대폭 줄였습니다. 앉아서 강의 듣고, 기도회 하고 이런 프로그램들 다 뺐습니다. 1박2일의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성도의 교제를 위해 사용하시라는 뜻에서입니다.
매 주일 암송하는 사도신경 가운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란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말은 성도의 교제를 뜻합니다. 성도의 교제란 교회의 신앙고백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수련회의 실천 지침을 알려드립니다.
첫째, 이름을 외우십시오. 이름표를 만들었습니다. 교우들의 이름을 부르고 외우시기 바랍니다.
둘째, 모든 이들과 인사하십시오. 다해봐야 30명입니다. 옛날이면 대가족 정도에 불과한데, 아직도 데면데면한 분들이 있습니다. 어른들과도, 젊은이들과도 인사하십시오. 30명 작은 교회가 3,000명 큰 교회 같으면 되겠습니까? 적어도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교회 비판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소 닭 보듯 살면 우리도 헛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살아나는 변화의 첫 단추를 이번 기회에 꿸 수 있길 바랍니다.
4. 주제가
이번 수련회 주제가는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함께 있다는 뜻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교우들이라는 뜻에서 이 곡을 선택했습니다. 주보에 실린 악보를 보며 함께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