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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9년 3월 첫째 주, 정기 일요법회 및 출가재일 법회, 포살 법회가 있는 날입니다.
사무국에서는 봉사자들은 업무를 보시고, 회장단은 이른 아침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거사님들께서는 이곳저곳 현수막 부착하시고, 보광당 과 방송실에서는 법회를 위한 작업들로 무척 바쁜 일요법회 아침입니다.
안내 데스크, 현관 입구에서 송파 17구 보살님들께서 법회보를 건네며 법회보러 오시는 분들을 맞이하시고, 송파 6구, 7구, 9구, 중랑구에서 찰밥을 준비해 주시고 직접 나눔을 하고 계십니다. 찰밥 잘 먹겠습니다.
법당 안내팀, 새법우 안내팀, 헌다를 준비하고 계신 헌다 봉사팀들도 완벽하게 법회준비를 마쳤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하시고 법회 시작 타종을 하시는 현진 거사님에 이어 사회자 님이 일요법회 시작 인사를 하십니다.
부처님 전에 마지를 올리고 헌향, 헌다를 드리며 3월 첫째 주 법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출가재일입니다. 스님의 출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불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출가재일을 맞이해서 우리 법등 가족들을 대표해서 법회장님께서 꽃다발과 함께 선물을 증정하였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우리 스님께서 더욱더 건강하시고 더욱 높은 수행정진으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리는 뜻에서 스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3월 포살: 혜담 스님
여러 불자들이여, 합장하고 지성 다한 마음으로 들으라.
내가 지금 모든 부처님의 큰 계의 서를 말하고자 하노라. 대중은 모여서 잠잠히 듣고 스스로 죄 있는 줄 알면 마땅히 참회하라.
참회한즉 안락하고 참회하지 아니하면 죄가 더욱 깊어지리라. 죄 없는 자는 잠자코 있으라.
잠잠하면 마땅히 대중이 청정함을 알지로다~~~
오늘도 포살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고
정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보광당 가득하게 법회에 참석하신 불광 형제들
금주의 법문 : 불광 법회 선덕 혜담 스님
금주의 법어 : 일상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는 기도의 원리[Ⅱ]
존경하고 사랑하는 불광법회 불광사 법등가족 형제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한 전국에서 유튜브를 통하여 오늘의 불광법회를 함께 하시는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을사년의 실질적인 봄이 왔습니다. 모레가 경칩이죠. 대동강 얼음물도 풀린다는 이때에 형제님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이 항상 함께 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나날이 기쁜 날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일상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는 기도의 원리’라는 두 번째 시간인데 계속 다른 일이 생겨서 이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오늘도 다른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저는 바닷가에서 태어났고 때문에 반찬이 좀 모자라고 하면 대나무로 낚싯대를 만들어서 대문에서 한 열 발자국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나가서 뽀시래기를 잡아서 먹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반찬에 대해서 부모님께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시고 한 6~7개월 만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할머니가 얼씨구나 좋다 하고 손자를 데려가서 당신이 키운 겁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그래서 저는 한 번도 어머니하고 같이 잠을 자본 기억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잔 기억만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될 때였습니다. 갑자기 저녁에 할머니께 국수 삶아달라고 칭얼댄 겁니다. 갑자기 국수를 어떻게 삶냐? 사와야 되는데. 안 된다고 했는데 난생 처음으로 국수를 먹고 싶다고 국수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국수를 사와서 삶아가지고 많이 먹지도 않고 조금 먹었는데. 그 뒤에 죽 생활하면서 제가 왜 음식 투정을 안 하는 사람인데 할머니께 그때 국수를 삶아달라고 그렇게 성화를 부렸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출가를 했고 그 뒤에 불광사에 올라왔는데 어느 날 ‘고은’ 시인이 한 번 큰스님을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스님 언제 한 번 국수 먹으러 갑시다’ 하는 거예요.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으면서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아, 그렇지 스님들이 옛날부터 국수를 좋아해서 국수가 나오는 날엔 발우에 두세 번 받아먹는 그런 것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초등학교 때 할머니께 국수를 삶아달라고 조른 것이 전생에 내가 국수 먹었던 기억이 불현듯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생에 내가 국수를 먹었던 생활을 하다 보니까 다시 출가를 해서 다시 국수를 많이 먹는 그런 신세가 되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전생에 제가 이 조선 땅에서 스님으로 있다 보니까 죽은 후에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출가를 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출가를 한다는 것이 뭔가? 보통 스님들이 처음에 스님 되기 전에 행자 때부터 배우는 것이 초발심자경문입니다. 요즘 중앙승가대학에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옛날에는 행자 때부터 초발심자경문을 배웠고 밑에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했는데 그 초발심자경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離心中愛曰 是名沙門이요 (이심중애왈 시명사문)이요, 不戀世俗曰 是名出家니라, (불연세속왈 시명출가)니라. 즉 마음 가운데에 이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부 여읜 것을 이름 해서 사문 즉 스님이라 말하고 불연세속왈 출가다. 그러니까 세속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그러니까 출가란 것은 뭐냐? 일체 명예와 이런 것을 다 버리고 세속적인 것을 다 버리는 것이 출가다. 이 세속적인 것이 뭐냐?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것을 버린다는 말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이건 출가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요즘 스님들이 출가를 하고서 계속 재물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진출가는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삽니다. 물론 우리 불광사에서 소임 살고 있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진짜로 離心中愛왈 是名沙門이요 (이심중애왈 시명사문)이요 不戀世俗왈 是名出家 (불연세속왈 시명출가)인데 세속에서 생활한 돈과 명예에 집착해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이건 진짜 출가는 아니다. 그럼 참다운 출가는 뭐냐? 바로 이심중애왈사문이요 불연세속왈 출가다. 이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수행자의 길을 가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아울러 하게 됩니다.
물론 제가 드린 이 말씀을 지금 현재 불광사에서 소임 살고 있는 스님들이 아마 안 듣거나 못 들을 겁니다. 어쩌면 초발심자경문에 이런 말이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억하고 형제 여러분 가운데서 지금 현재 불광사에 소임을 살고 있는 스님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이것을 좀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심중애왈 시명사문이요 불연세속왈 시명출가다 이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 됩니다. 그럴 때 불교가 살아나는 겁니다.
다만 큰스님께서 가끔 말씀하셨습니다만 스님 가운데는 그냥 묵묵하게 염불이나 하는 그런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도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로 불법이 이어지는 겁니다. 제가 출가했던 것도 우리 선배 스님들이 조선시대 500년의 긴 시간 동안 핍박을 받으면서도 묵묵하게 출가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도 출가하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겁니다. 비록 범부 같은 스님을 보더라도 저 분들이 나름대로 다음 세대로 불법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님들 역시 내가 지금 도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나의 이 행동이, 이 처사들이 다음 세대에 불법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부전생활도 하고 염불도 하는 스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동시에 드립니다.
이제 ‘일상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는 기도의 원리’에 대해서 같이 읽어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란 말은 빌 기(祈), 빌 도(禱)의 합성어지만, 불자의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불교에 있어 기도한다는 것은 법성 진리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다른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도 기도란 말을 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기도는 뭐냐? 예배라고도 그러죠. 오직 신에게 예배하고 이거 이뤄주십시오 그렇게 소망을 원하는 것을 이름해서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없죠. 부처님께 이것 좀 이뤄주십시오 그렇게 부처님은 못 듣습니다. 그럼 불교의 기도는 뭐냐? 신을 믿는 종교와 질적으로 다른 기도법이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내 생명에 넘치고 있고, 흐르고 있는 부처님의 진리 광명을 언제나 마음에 두는 행동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내 생명에는 끊임없이 부처님의 공덕이 흐르고 있다. 그럼 이 생명이란 것이 뭐냐? 이것을 사전적으로 찾아보면 시원적, 처음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몸과 기운을 이루고 있는 시원적 에너지를 이름 해서 생명이라 한다고 되어 있고 또 샤띠라는 말을 씁니다. 샤띠란 우주적인 원초 에너지를 생명이라 하는데 이런 생명, 즉 우리 몸을 흐르고 있는 우주적인 원형 에너지 이것이 생명인데 이 에너지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이 에너지란 것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 그대로 생명이다. 즉 내 생명이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즉 영원하고 청정하고 원만구족하면서 독존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나의 생명이다. 이것을 생각해서 그것에 항상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 뭔가 이거 이뤄주십시오, 저거 이뤄주십시오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부처님께 바라는 그 모든 공덕, 모든 사항들을 이미 내가 가지고 있다. 여기에 조금도 의심이 들지 않는 확실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한다 하지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 또 다른 생각이 나요. 보통 잡담할 때는 생각이 안 나는데 바라밀 염송을 하면 꼭 생각이 나는 거요. 그래서 왜 그러냐? 마음을 모아서 내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을 하니까 문득 지금까지 있던 그런 망상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스를 잠궜나, 설거지를 했나, 누구는 잘 사는가, 병은 나았는가, 이런 잡념이 생기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사실인데 사람의 마음이란, 우리 모두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일심(한마음)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보통 6초에서 10초 사이가 지나면 또 다른 생각이 난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모아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불해도 한 6~7초 지나서 10초 이내에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참선하는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화두를 관하고 있지만 화두를 관한다는 것이 6~7초 지나면 또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거여. 그러니까 참선해서 견성하기가 그만큼 힘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불교의 가장 큰 잘못, 현안이 뭐냐 하면 소위 말해서 내가 견성했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한 30년 40년 전만 하더라도 도처에 내가 견성했다고 큰소리치는 스님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없어. 내가 견성했다고 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스님들이 수행을 한다 하면서도 일심으로 마음을 모아서 30분이나 한 시간을 오로지 잡념 없이 화두를 관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 뭐냐? 스님들에게 법문을 들어서 무엇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선문의 가장 중요한 서적인 무문관이라든가 전등록 이런 것들을 봄에 의해서 다른 스님들이 수행하는 즉 당나라 때 스님이나 혹은 고려 때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을 엮어 놓은 그런 책이 많이 있어요. 그런 책을 보면서 그 책에 나와 있는 화두를 관하면서 내가 이 화두를 어느 정도 계합하느냐, 또 그 화두에 대해서 많은 스님들이 나름대로 소견을 붙여놓았어요. 예를 들어서 무자 화두 하나에도 역대 조사스님들이 수백 가지로 거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이 경계가 되느냐 그런 화두를 평해 놓은 스님들의 말씀을 자기 자신과 비교해서 내가 지금 어느 정도에 와 있다는 것을 캐치하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공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러냐하면 지금 현재 전국의 방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들이나 이런 분들이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어느덧 제 연배에 있는 스님들입니다. 그런데 그 스님들의 실력이나 수행하는 것을 저는 너무나 잘 알아요. 제가 출가는 22살에 했지만 제 도반들은 전부 저보다 3살이나 5살 많아요. 거의 제 대학 동기 중에서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서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그 분들이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 거의 참선을 안 해요. 그래서 누구한테 가서 참선법을 묻고 깨닫고 하는 환경이 여건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우리가 충분히 알고 내 스스로가 벽암록이나 이런 걸 통해서 스스로를 정비해보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실 기도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도 기도지만 그것을 찾고, 내 생명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이란 것을 확신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확신하려 해도 생각이 다른 데 가버리죠. 그때 마다 마음을 다잡아서 다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이다. 내 생명이란 것이 영원하고 청정하고 원만구족한 모든 공덕을 다 가지고 있는 것에 항상 마음을 모아서 그것을 느껴가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렉 브레이든이라는 물리학자가 ‘1700년간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이란 책을 썼는데 거기 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기도법이 나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어떻게 기도하느냐를 찾아서 미국에 있는 그 사막 가운데를 찾아가요. 가서 인디언들이 하는 기도가 뭔가 묻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어떤 주문을 왼다고 할 때 그 주문을 계속 외는데 언제까지 외느냐 하면 언론에서는 인디언 기도를 기우제라고 조롱조로 말하기도 하는데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모든 사람 스스로가 마음에서 내 주변에 지금 비가 오고 있다. 지금 현재 먼지가 나는 곳에 비가 오고 내가 비에 흠뻑 젖는 것을 확실히 느꼈을 때 비가 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뭘 느끼기가 한참 오래 가는 거죠. (보리광 보살님 녹취)
그래서 기도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런 노력 기간이 지나서 내가 그 감정을 느낄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이 학자는 여기에서 놓치지 않고 저 티벳까지 찾아갑니다. 티벳에 찾아가서 여러 스님들에게 묻습니다. 스님께서 지금 현재 계속 ‘옴마니반메훔‘을 염불을 하고 앉아계시는데 이게 무슨 기도입니까? 이렇게 여쭸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티벳 스님들이 한결같이, 말합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여기 앉아서 지금 현재 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느낄 때까지 체득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가 앉아 있는 것을 기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내가 그것을 느낄 때 보면 우리가 말하는 뭐 자녀들이 대학 입시라든가 이런 것에 대해서 기도할 때 자녀중 아들 딸 중에 누구 하나가 뭐 스카이면 스카이 아니면 다른 대학에 합격을 해가지고 그 3월 달 4월 달부터 아주 즐겁게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이 눈 앞에 확 나타날 때까지 됐을 때 비로소 그것이 기도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느낌적으로 이것이 올 때 그것이 기도 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입으로 아무리 해도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입으로 함에 의해서 그것이 느껴질 때까지 우리가 노력해 나갔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막연하게 돈을 벌겠다. 하는 것은 안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내가 필요한 돈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났다 그래서 수술을 해야 된다.그럼 돈이 필요하다. 자 그러면 수술을 해야 되는데 내가 수술을 받아서 완쾌된 그 몸이 느껴질 때까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무슨 염불을 하고 진언을 외우더라도 가장 기도의 원리는 뭐냐 내 생명이 지금 완벽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낄 때까지 계속 그 행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한 것 중의 하나가 뭐냐 우리의 이 머리라 하는 것은 이 대뇌라 하는 건 피질이라 하는 이것은 뭐냐 면은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거 하고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것하고를 구별을 못 해요.
그래 가지고 내가 지금 실제로 내가 수술을 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을 생각하는 그거하고 실제로 돈이 생겼다 하는 그거 하고 구별을 못 해요. 그래서 뇌를 속이는 겁니다. 내가 지금 현재 돈이 생겼다. 하는 것을 계속 형상화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형상화 시키면은 뇌가 그렇게 딱 아! 지금 돈이 생겼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돈이 생긴 것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이게 기도법이다. 그래서 대뇌라하는 것이 이렇게 실질적으로 벌어지는 현상과 내가 생각하는 현상을 구별 못 하는 그런 내부적인 이 머리 두뇌 구조를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 시키는 것이 바로 기도법입니다.
그래서 근대 물리학이라고 하는 그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도의 원리를 가장 중요하게 그 요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를 할 때 항상 이것이 돼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 느낌이 올 때까지 하는 겁니다.
그 다음을 보면은 자기의 생명에 위에 너울치고 있는 부처님의 무한 공덕, 온 이웃, 온 세계에 충만한 부처님의 자비, 온 생명 구석구석 넘쳐나는 부처님의 지혜 위신력, 그것을 생각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온몸 자체로써 보는 이것이 기도행위이다. 그러니까 입으로 말을 하는 것도 벗어나서 내 몸 전체가 부처님의 공덕이 차있음을 느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온 몸을 구체적으로 그냥 마음적으로 다 느낄 때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교 기도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 그래서 제목이 일상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한다. 내가 지금 생활하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그런대로 그냥 흘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리고 만들어 간다는 것은 뭐냐! 내 생명이 그 속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할 때 내가 바꾸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이 기도라는 말을 쓰지마는 불교의 기도와 신을 믿는 종교의 기도는 근본이 다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우리들이 기도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제도했을 때 모두가 성취하는 그런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문단을 보면은 때문에 기도는 부처님께서 이미 주신 완전한 진리가 나의 생활과 몸과 마음에 완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형태이고, 이런 까닭에 기도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일요법회에서도 계속 말씀하셨지만, 가장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신 것이 뭐냐면은 1년 동안을 호법 법문에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 말씀을 하시니까 일부 스님들이 아니 불교는 수행인데 무슨 기도냐 말이 안 된다. 하는 그런 말씀을 많이 했고 그런 말을 들으시면 안 돼요. 그래서 사실은 불교의 기도라고 하는 수도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수행이다. 그리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 바로 기도고 수행이죠. 그래서 내 수행이 따로 있고 내가 원하는 기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면서 내 생명에 부처님의 공덕생명이 피어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를 수행이라 생각해야지 기도 따로 수행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선방에서 수행하시는 그런 스님들께서는 다른 말씀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참선 수행을 해서 도달한 마지막 도달처가 어디냐! 도달처가 마하반야바라밀 자리다. 즉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자리가 기도를 해서 수행을 해서 도달하는 그 자리다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보통 그 참선방에 앉아 가지고 계속 화두를 관하는 것도 수행이지만은 내 생명부처님 무량공덕생명 이라고 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이것을 느끼기 위해서 계속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도 수행이다. 그래서 화두를 관하는 수행이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 하는 수행이나 똑같은 것이지 다른 수행이 아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육조혜능 조사께서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신 겁니다.
육조단경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육조단경이라는 것은 육조혜능스님이 수계 산림에서 계를 설하는 자리에서 법문한 내용이 육조단경입니다. 육조단경이라는 특별히 어떤 것이 계획해서 법문을 하신 게 아니라 계단에 올라가서 보통 계를 설(說)할 때는 달마사도 있고 뭐 계사도 있지만은 또 소상하게 설명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그런 스님들도 계시는데 혜능선사께서는 바로 그 시간에 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 주는 그 뒤에 있는 대목이 뭐냐 바로 육조단경입니다. 육조단경에서 보면은 특히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선지식아! 육조혜능대사께서는 이제 청중들을 향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선지식들아! 다 함께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자 그렇게 해서 다 함께 마하반야바라밀을 일곱 번인가 이렇게 해요. 그러고 난 뒤에 육조단경이 설해지는 겁니다. 육조스님의 근본적인 것들 사상이 설해지는데 그것을 후세에 사람들은 그걸 역어서 육조단경 이라 이렇게 씁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이 자체를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복을 비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는 것이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나 똑같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이 수행이고 수행이 염불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하는 것과 참선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내 삶을 가꾸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 불광 형제들이 해야 할 그런 행동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대단한 것인데 기도가 무슨 수행이냐고 반문할지는 모르지만 불교의 기도는 부처님께서 우리가 원하기 전에 완전한 것을 이미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직 정진을 해서 우리에게 주신 밝은 은혜의 햇살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 까닭에 믿었으면 참다운 삶의 실현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인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과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데, 그래서 사실 우리불광에서 하는 기도하고 다른 곳에서 하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스님들은 또 뭐 나이 드신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비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공개적으로 많이 합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그건 아니다.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고 이거 주십시오, 저거 주십시오, 이러는 것이 아니고 내 생명에 이미 그런 것이 장착돼 있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것이다.
밝고 맑고 희망찬 그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내어 쓰기 위해서 끊임없이 염불하고 하는 것이 기도지 다른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바른 믿음 바른 기도에 의해서 반드시 바뀌고 기도는 성취된다. 이것은 결코 부처님이 제시한 논리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요즘 이제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유튜브를 많이 보는데 어제 보니까 허경영 씨가 나오더라고요. 그 허경영 씨가 그 어마어마한 부지에 자기 수행 장소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전국에서 그냥 버스를 타고 와서 허경영 씨에 말씀을 들으려고요. 한번 말씀을 들으려면 10만 원을 내야 돼요. 그러면서 또 허경영 씨의 초상화를 팔아요. 그 초상화는 또 오만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 말을 듣기 위해서 전국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그곳을 가요. 참 희한한 세상이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런지 속이기가 좋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온갖 그 사이비 종교가 생기게 되는데 우리 주변에도 많죠? 사이비 종교에 자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망치는 그런 일들을 많이 봅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보면 그러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 속아 넘어가요. 그런 엄청난 돈을 바치고 마침내 거기서 나오려고 하면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그런 일 까지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소망하는 바가 있을 겁니다.
그 소망하는 내가 소망하는 바가 전부 지금 내 내면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재창 하시는 말씀이 뭐냐!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건 뭐냐! 다른 많은 큰 스님들이 당신대로 말씀을 많이 했어요. 가령 예를 들어서 법정 스님 같은 분은 맑고 향기롭게 그런 말씀을 했어요. 그러나 맑고 향기롭고 그 말씀도 훌륭하고 좋은 말씀입니다마는 큰 스님께서 제정한 내 생명 무량공덕생명 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큰 스님께서 불교사상 최초로 제창하신 이 내 생명 무량공덕생명 이라는 것에 신비함을 알고 우리들이 항상 내 생명무량공덕생명 이라는 것을 느낄 때까지 끊임없이 행해나가는 것이 불광 불자의 사명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뭐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법으로 하자 법등오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전법으로 무량공덕을 삼겠다고 하는 말씀은 이런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에 의지해서 이것을 이뤄주십시오 저것을 이뤄주십시오 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아니다. 네가 지금 원하는 것은 이미 너 속에 다 있다. 그래서 너의 생명이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고 네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은 네가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알려줘서 그 사람과 같이 행복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법을 하자 하는 이것이 뭐냐 사람을 막연하게 데리고 와서 우리의 조직을 좀 더 확장시킨다. 이것부터 우리는 넘어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이웃도 내 생명무량공덕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자 그래서 그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생활 속에서 살 수 있게끔 해주자 하는 것이 전법을 하자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한 주부가 혹은 가장이 그런 생각하고 있어서 자식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식들과 더불어 부모와 형제들이 그런 삶을 가질 때 삶이 기뻐지는 것이고 그다음에 품격을 짓는 겁니다. 품격을 짓는다는 말은 뭐냐 내 마음적으로 풍족하지만은 현실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는 겁니다. 결코 부처님께서 없는 말을 사람들을 호리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까 참 희유하다 모든 중심이 나와 똑같은 중심을 가졌구나 이게 부처님 말씀이에요. 이걸 지금 현재 많은 불교 지도자들이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내가 지금 현재 전법의 책임자고 내가 이 사명을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사명이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해야됩니다.
요즘 와서 이제 나이가 좀 들었으니까 이제 언제 죽어도 되겠다. 괜찮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행이라는 것이 뭐냐 저는 입전수수(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았던 깨닫지 않았건 간에 일단 불자들속에 뛰어 들어서 그냥 불법을 전하고 사는 것이 수행자의 마지막 단계다 이것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인데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삽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스님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계속 요령 잡고 염불을 하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님이 와서 요령 잡고 시식을 하는 그런 스님들이 계신다면 언제든지 저는 내 자리를 그 스님에게 내어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하든 저는 이 나이지만은 입전수수(入廛垂手) 하는 겸 요령 잡고 목탁 치면서 형제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수행하는 것을 마지막 사명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저에 대해서 나이도 많은데 고생한다.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제 삶은 그렇게 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22살 때 집에서 나와서 해인사로 처음 갈 때 그때 벌써 이건 정해져 있는 겁니다. 내 삶에 이렇게 가기로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이거 누가 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업이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여러분들이 제 얘기에 대해서 나이도 많은 어른이 참 고생한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그런 어떤 입전수수(入廛垂手)의 마지막 단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당연히 그렇게 한다. 그렇게 마음을 가지고 저를 대해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자은성 보살님 녹취)
출가재일 축원을 하고 계신 혜담 스님.
♬ 찬탄곡 : 출가재일 노래 ( 반영규작사. 정부기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생로병사 해탈의 길 찾아가는 싯달태자 칸타가 올라타고 찬타기 앞세우고
초생달 고교한 밤 카피라성 넘었네 아리다운 야쇼다라 갓 태어난 라후라
삼색 연꽃 고운 궁전 권세 안락 다 버리고 머리깎고 누더기에 걸실의 길 떠났네
말머리 돌리라 왕궁으로 돌아가라 권세와 인생의 봄 어찌 다 버리랴
이 세상 으뜸가는 전륜성왕 되리니 그대는 악마의 왕 물러가라 파피야스
나는 오직 생사 떠난 나르바나 도를 구해 하늘 땅 만인이 공양하는 여래되리.
호화로운 비단 옷 마부에게 맡기고 궁으로 돌아가 부왕에게 바치라
생로병사 벗어날 진리의 길 찾으리 맨발의 싯달태자 홀홀단신 걸어가네
해와 달 길 밝히고 하늘 나는 새들도 얖서거니 뒤서거니 숲을 지나 강을 건너
우~~~우~~~~~~~우~~~~~~~~~우 아~~~~~아.
발원문 낭독 : 송파 2구 명등 자은여 보살님(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부회장을 회향하시는 법광 거사님, 명등을 회향하시는 사라수 보살님 선도행 보살님께 감사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새로 선임되신 혜안 부회장님, 그리고 각구 법등 임원들의 선임장 수여, 선서, 밝고 맑은 모습으로 스님, 법회장님과 함께 의미있는 사진도 한 장. 찰칵 남겼습니다.
오늘 불광 법회에 첫걸음 하신 새 법우님들 환영식도 하고, 법회장님과 한 가족이란 의미의 사진도 한 장 남겼습니다. 반갑습니다.
법복 착용하시고 꽃바구니 든 모습의 오늘 선임 받으신 송파 13구 보살님들 정말 멋집니다. 초록 치마 흰 저고리, 법복은 불광의 빛나는 얼굴입니다.
법회에서 나누어 드린 찰밥 도시락을 각자 준비해 오신 반찬으로 맛나게 드시며 법등 모임을 하고 계신 구법회 형제여러분들의 오붓하고 정겨운 풍경.
법회를 마치신 형제여러분들을 배웅하고 계신 법당 안내팀의 공손한 모습. "다음 법회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웅전에 모여 금강경을 독송하고 계신 불광형제 여러분들의 장엄한 독경소리는 불광 정상화의 발원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법회가 끝난 후 1시 30분 보광당에서 개최된 3월 명등회의. 3월의 모든 행사를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보광당을 쓸고 닦고, 의자를 배치하여 일요법회 준비를 완벽하게 해주고 계신 청정 봉사팀 여러분들.
지난주에도 변함없이 봉은사, 동명사, 조계사에서 1인 시위 정진 기도 중입니다. 여러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토요일이면 집회 신고를 하고 열심히 시위 정진을 이어가며 불광 정상화를 염원하는 불광 바라밀 형제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사 측에서는 이번 주에도 붙여 놓은 반론문을 어김없이 제거하셨더군요. 어찌하오리까? 다시 제작해서 다시 붙여놓습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불광의 탁월한 기도법을 잊지 않도록 항상 짚어주시는 스님께 감사합니다 _()()()_
자원봉사로 이어가는 희유한 불광법회 모습을 여실히 기록하신 마음님, 법회 사진 찍으신 지일심보살님, 법문 녹취하신 자은성보살님 모두 뛰어난 보현행에 수희찬탄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