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유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순조롭게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던 권위와 권력을 승계하지는 못했다. 카이사르 밑에서 부관을 지내며 탄탄하게 권력을 쌓아올린 안토니우스는 풋내기 옥타비아누스를 우습게 봤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아 로마 권력을 장악하기로 한다. 그 자신이야말로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라며 옥타비아누스를 압박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서로 맞붙는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부하인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사실상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 때 옥타비아누스의 나이는 30세에 불과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종료 2년 뒤 기원전 27년 1월 13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놀라운 선언을 한다. '내 일신에 집중돼 있는 모든 권력을 여러분의 손에 되돌리겠다. 무기와 법과 로마의 패권하에 있는 속주의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다시 되돌려 드릴 것을 선언한다.' 사실상 절대 권력자로서 로마를 지배하게된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의 완전 복귀 선언에 회의장은 쥐 죽은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뒤이어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처럼 종신 독재관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참에 난데없이 원로원에 권력을 뒤돌린다는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놀라운 한편 아이들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으로 뒤돌릴 생각도 원로원에 권력도 내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만약 그렇게하면 로마는 곧바로 내란과 혼미의 시대로 돌아가버린다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방심하게 만들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 최초의 수단이 '공화정 복귀 선언' 이었다. 이 대담한 옥타비아누스의 책략은 즉시 성과를 올렸다.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성스러운' 이라는 뜻이다. '성스러운 사람' 이라고 계속 부르다 보면 자연히 존경심이 싹튼다.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를 넘어뜨린 실력자이면 더욱 성스러워 진다. 원로원 의원들이 '아우구스투스'란 명칭을 부여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불평도 못할 노릇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는 명 배우 연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후 아우구스투스는 역사가 타키투스가 평한 것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하나씩 긴 시간을 들여 모든 권력을 손에 넣어 갔다.
그렇다고해도 그는 숨어서 권력을 탈취한 것이 아니다. 그가 행한 것은 모두 당시의 로마에서 완벽하게 합법이었다. 아우구스투스란 명칭은 원로원에서 부여해준 것이고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원로원은 '임페라토르' 일인자의 칭호도 기꺼이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내전을 수습했다는 엄연한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손에 넣고 정치 군사상의 실권도 합법적으로 획득해 간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연기도 불사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남자였다. 개혁의 저항 세력인 원로원을 속여서라도 제정을 실현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굳혔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명 배우였다고 할 수 있다. 원로원 의원 전체를 만족시키면서 원로원 체제나 공화정체를 부정하는 제정으로 옮겨가는 아슬아슬하면서도 대담한 곡예를 해냈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의 통치가 편한 지방은 원로원 속주로 정해 그곳의 통치를 원로원에게 맡기겠다고 하였으며
자신은 항상 적과 마주보는 변경의 고생스러운 곳의 통치 책임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맡겠다고 하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크게 환대하며 공화정에 헌신하는 그의 모습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주도면밀한 계산이 있었다. 나중에 이 지역을 '황제 숙주'라고 불린다. 아우구스투스의 위선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원로원은 그에게 '전군 최고 사령관'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로마 군단은 그가 일원적으로 관리하게 되고 게다가 각 군단 사령관의 인사권도 그의 수중에 들어간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해서 군사권을 수중에 넣었지만 로마를 개혁해 나가려면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정치상의 권력도 교묘하게 획득해 나간다. 기원전 23년 40세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또다시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선언을 한다. 그것은 아그리파와 함께 집정관을 사임하고 그 이후는 시민회에 의한 집정관 선출이라는 공화정 본래의 형태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이 선언을 들은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환호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수호자'로 보였다.
기쁨에 찬 원로원 의원들은 기꺼이 아우구스투스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것은 '호민관 특권'을 1년 한정으로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공화정 복귀가 이제 본격화 된 것이라고 감격했다. 자신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쁨에 찬 의원들에게 1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 따위는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을 때까지 호민관 특권의 보유자가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나 집정관의 결정을 언제라도 거부권을 가졌다. 이것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치에서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다.
호민관의 특권의 보유자인 동시에 원로원의 일인자이며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원로원으로 부터 수여받았다. 거기에다 로마의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호민관 특권을 얻게 되면서 마침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하게 만든 셈이다. 즉, 초대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로마의 황제란 '무관의 제왕'인 것이다. 로마 황제의 취임은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의 승인을 얻는 순간이다. 즉, 원로원이 새로운 황제에게 호민관 특권, 전군 최고 사령관의 권한을 주는 것을 의결하는 동시에 시민들이 황제의 통치를 승인한다는 것을 표명하면 비로소 황제가 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를 확대 노선에서 안정노선으로 전환시키면서 '평화'를 확립시키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평화는 밖의 평화와 안의 평화 양쪽이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팍스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국가전략의 구축을 위해 밖의 평화와 안의 평화의 양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화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와 실행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평화는 현실이 된다. 그점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속적인 의지의 완고함에서는 비교할 자가 없는 인물이었다. 로마사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프랭크 애드콕 교수는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처럼 압도적인 지성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세계는 바로 그와같은 인물이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긴 내란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로마 세계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대에 부응에 아우구스투스는 성공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쌓아 올릴때 가장 심혈을 기울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세제였다. 아우구스투스가 도입한 것이 상속세였다. 상속세로 거둔 수입을 로마 군단에서 제대하는 병사의 퇴직금에 충당하였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상속세를 목적세화 한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시행된 또하나의 간접세는 판매세였다. 현대에는 소비세라 하는 세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판매세를 상속세와 동일하게 목적세로 만들어 방위비에 충당하기로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병력을 무려 3분의1 이하인 25개 군단 15만명까지 줄인다. 그 이유는 건전한 재정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로마 군단 병사는 직업군인으로 군단 해산 후의 퇴직금이나 재취업수당을 지불해야 한다. 이를 소흘이 할 경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자신의 지지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병사들의 퇴직금 지불에 충당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단을 우선 상비군으로 개편한다. 적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니까 방비는 항상 굳건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방위선은 너무 길었다. 이 방위선을 사수하려면 아무리 군사가 많아도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큰 비용이 든다. 한정된 병력으로 광대한 로마 제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내놓은 대답이 속주민 활용이었다. 팍스 로마나를 실행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과감하게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속주민으로 로마군의 정규병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로마 시민병과 속주민의 병사를 묶어 같은 군단으로 만들면 로마의 전통이 파괴되는 셈이 되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비난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군단 병사와는 별도로 속주민 지원자인 보조 병사로 이뤄지는 부대를 결성한다. 그 수는 군단 병력과 거의 동등한 15만명 즉, 30만명의 병력이면 로마 제국의 방위선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군단 병사의 병역기간은 20년이지만 보조 병사는 25년이었다. 보조 병사 25년간 복무하고 만기 전역하면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시민권은 세습되는 권리이기 때문에 자식, 손자들 까지도 혜택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속주민 입장에서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로마 시미권을 준다는 것은 승자인 로마인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결의 표명과 같았다. 로마의 군사력은 군단 병사 15만명, 보조병사 15만명의 체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단 병사를 주된 전력으로 활용하고 보조 병사는 보조나 경계임무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적을 발견하면 즉시 봉화를 올리거나 말을 몰아 가까이의 보조부대 기지에 알린다. 통지를 받은 기지는 즉시 원군을 파견함과 동시에 군단 기지에도 정보를 알려주어야 한다.
이때 관건이 되는 것은 스피드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된 것은 다름아닌 구축해온 도로망이었다. 고대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잇는 로마가도가 속주에 그물처럼 뻗어있는 덕분에 로마 군단은 기병이라면 100km 가까이 이동할 수 있었고 보병도 평균 시속 5km 라는 빠른 속도로 이동이 가능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 14년 77세 나이로 세상을 뜬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배우기 보다 왜 로마 제국이 그 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창조적 천재라고 하면 카이사르를 따를 수 없을지라도 아우구스투스 역시 질은 달라도 천재였다. 로마 제국은 300년에 걸쳐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기본 노선에 따라 계속 운용되어 팍스로마나를 유지해 나갔다.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행한 정책 중에 유일한 실패는 게르만족이 사는 게르마니아 지방 원정이었다. 카이사르가 정한 로마의 기본 방위선은 라인 강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 보다 훨씬 더 넓게 잡아 동쪽을 흐르는 앨베강으로 옮기려고 게르마니아에 군대를 파견한다. 기원전 12년의 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는 천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군사상의 재능은 정치적 재능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가 카이사르 암살 후의 내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어던 것은 카이사르가 생전에 붙여준 우수한 부관 아그리파 덕분이었다.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원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르마니아는 카이사르 조차도 단기적으로는 제압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본 땅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군사를 맡기고 있던 아그리파를 잃은 아우구스투스는 현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원정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겨 버린 것이다.
서기 9년에는 게르만인의 게릴라 전법으로 인해 단 한 번에 5,000명의 군사를 잃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우구스투스는 죽을 때까지 게르마니아 제패에 계속 집착했던 것 같았다. 만약 게르마니아 원정이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면 로마 제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전투에서 계속 지게 되면 결국 제국의 멸망 밖에 없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군인으로서는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정치, 문화, 제도, 관습, 건설 등에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뛰어난 정치가였다. 특히 통치 기간 중에 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내가 발견한 로마는 진흙으로 되어있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약 200년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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