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토레 페라가모를 이야기할 때마다 ‘할리우드의 구두 제작자’라는 호칭이 붙는다. 천진난만한 섹시함을 간직했던 영원한 연인 마릴린 몬로, 우아함의 대명사 그레타 가르보, 청순가련한 눈망울로 연기했던 오드리 헵번 등. 이 모두는 예외없이 페라가모의 매력에 사로잡혔던 주인공들이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에 왕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추던 여인이 황급히 달아난다. 당황해서 쫓아오던 왕자는 빨간 카펫에 놓여 있는 여인의 구두 한 짝을 발견한다. 클로즈업되는 구두…. 동화 〈신데렐라〉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드류 배리모어 주연 영화 〈에버 애프터〉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신데렐라 신발은 1998년 페라가모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작됐다.
이 실크 슬리퍼는 18세기 르네상스 스타일로 은색 레이스와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이 꽃 모양으로 장식돼 있다. 유리 구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굽은 아크릴로 제작됐다. 영화 속 신데렐라가 구두로 왕자님을 만나듯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구두로 할리우드를 안게 된다.
1898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작은 마을 보니토에서 태어나 1920년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간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스타들과의 인연은 초창기 서부시대의 부츠를 제작해 달라는 영화사 아메리칸 필름(American Film)의 의뢰에서 시작됐다. 영화에 필요한 다양한 구두를 만들면서 페라가모는 카메라 앞에서 장시간 시달리는 여배우들에게 착용감 좋은 구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먼저 고객들의 발 모양을 조사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20%가 평발이고, 45%는 티눈에 시달리며 그 외에도 구부러진 발톱, 굳은살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페라가모는 편한 구두를 만들기 위해 미국 UCLA에서 인간 해부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사람의 체중이 4cm 정도의 면적에 불과한 발 중심에 쏠리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구두 제작자의 대부분은 발 중심을 불안정한 상태로 방치한 채 구두의 뒷굽과 복사뼈를 지탱하는 부분에만 신경을 썼다. 그 탓에 굽 높은 구두를 신는 여성들은 걸을 때마다 발이 앞으로 밀리게 되고,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여성용 구두 바닥에 장심(arch)을 박는 공법을 고안했다. 마치 자동차의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설치한 도로의 방지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장심은 구두 앞 부분에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도록 해 걸을 때 발이 앞으로 밀리는 현상을 방지한다. 디자인과 착용감의 조화, 이것이 바로 페라가모 구두가 다른 구두와 차별화하는 요인이다. 페라가모는 언제나 직접 고객의 발을 재고 몰드를 떠 디자인하기로도 유명했다. 일일이 고객의 요구에 맞춰 구두를 제작했다. 지금도 구두를 만드는 134가지 공정 가운데 몇몇 중요한 단계는 엄격한 관리 하에 숙련된 담당자에 의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이런 페라가모 구두만이 지닌 디자인의 독창성과 과학적 공법 때문에 단골 고객 명단은 점점 늘어갔다. 할리우드 배우들에서 귀족 계급, 재벌가의 부인들과 정치계의 요인들이 페라가모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트기를 타고 페라가모 본사가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날아와 구두를 사갔다. 그 가운데에는 윈저 공작 부인, 영화배우 비비안 리 ·오드리 헵번 ·소피아 로렌 등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영화 〈7년 만의 외출〉의 유명한 지하철 통풍구 장면에서 마릴린 몬로는 자신의 각선미를 살리기 위해 페라가모의 샌들을 선택했다. 그 후 그녀는 뾰족한 코에 높이가 11cm나 되는 페라가모의 스틸 소재 하이힐을 10년간 애용했다. 그레타 가르보 역시 페라가모 구두 착용으로 그녀의 심플한 우아함을 발휘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화려한 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가볍고 높은 코르크 굽, 새끼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샌들 등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1947년 투명 구두로 패션계의 오스카 상인 ‘니먼 마커스’ 상을 구두 제작자로는 처음으로 수상했다. 1960년에 〈꿈의 구두 제작자〉라는 자서전을 남긴 채 페라가모는 그 열정의 삶을 마감한다.
페라가모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족 경영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자녀들에게 구두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예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교육을 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일과 예술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며 자녀가 자연스럽게 그의 패션 철학을 이해하게 했다.
그리고 페라가모는 구두 외 다양한 상품으로도 영역을 확대하면서 자녀가 각 사업부서를 맡아 경영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페라가모가 토털 패션업체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된다. 현재 페라가모의 회장직은 장남 페루치오가 맡고 있다. 차남 레오나르도는 유럽 및 아시아 시장, 그리고 막내 마시모는 미국 시장을 담당하고 있다.
장녀인 풀비아는 여성 액세서리, 차녀인 지오바나는 여성 기성복을 담당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페라가모는 “가족 경영이 어려울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 쉽다”며 “그것은 가족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원칙이나 방향이 비슷하며, 진행하고 있는 사항이나 아이디어에 대해서 항상 토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굳건한 가족 경영을 토대로 59년엔 여성 기성복을, 68년엔 핸드백을 선보였다. 특히 65년엔 여성 구두에서 쌓은 명성을 남성 구두로 확대했다. 앞이 각진 형태의 구두나 브라운과 와인색 장식이 달린 구두 등은 지금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적이고도 클래식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남성복 라인은 74년 첫 선을 보였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페라가모의 편안함과 세련된 디자인에 매료돼 “내 생애에 이 구두 외에는 신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난 100여 년 동안 스타들을 망라하고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사랑받아 온 페라가모의 비결은 창업자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인생 철학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착화감 좋은 구두를 만들고자 한 그는 정직한 장인정신으로 단순히 예쁜 구두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편안함과 개성을 가미했던 것이다.
페라가모가 고객의 입장에서 구두를 생각한 반면, 구두 제작자들의 대부분은 고객이 구두가 불편하다고 불평을 할 때면 그것을 나쁜 발 모양 탓으로 돌렸다. ‘디자인은 모방할 수 있을지라도 그 편안함은 모방할 수 없다’는 창업자의 신념, 바로 그것이 페라가모의 진정한 성공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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