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XHHMQiTIEw
본문 창18:1-15 제목 :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승용차 중에는 1,2천만원대의 경차도 있고 수억 수십억원대가 넘는 고급 외제 승용차도 있지요. 많은 경우 자동차의 외형을 가지고 그 사람의 경제적인 수준을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시당하지 않고 나의 경제적인 능력을 과시하려고 수준에 넘는 고가의 수입차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런데 차가 운행되려면 연료가 있어야 하고 운전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지금 어딘가에 반드시 가야만 하는데 기름이 충분한 경차와 기름이 바닥난 수억원대의 외제차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차를 타시겠습니까? 내 자존심 때문에 절대로 경차는 못타겠고 그래서 기름도 없어 움직이지도 않는 고급차에 앉아만 있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차를 타야 한다면 운전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 모는 경차를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운전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이 모는 고급 외제차를 타시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요. 즉 부자가 되고, 권세를 누리고, 하는 일이 성공하고, 그래서 자랑과 과시와 우월감을 가지는 것을 인생 성공이고, 이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경차 같은 것은 인생 실패라면서 부끄럽게 여기지요.
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고급 승용차를 가지는 게 아닙니다. 경차이던 고가의 고급차를 가졌던 상관 없이 질좋은 연료를 넣는 것이고, 또 좋은 운전사가 되는 것이지요. 질이 나쁜 연료는 엔진을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운전하는 자가 술에 취해 있거나 운전이 뭔지도 모르면서 핸들을 잡으면 아무리 고급 외제차라 해도 사람을 다치고 죽게 하는 흉기가 되는 거 아닙니까? 좋은 연료와 좋은 운전사가 있다면 1,2천만원대의 경차가 되었든 수억원대의 고급차가 되었든 차도 사람도 편안하고 차들이 운행되는 도로 분위기도 편안해집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좋은 세상이 되려면 고급 외제차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먼저 좋은 연료와 바르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운전할 수 있는 좋은 운전사 있어야 하는 거죠.
좋은 연료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은 운전사는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차냐 고급 외제차냐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주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세상은 육체와 주변 환경을 가지고 구원을 생각하지만 우리가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상은 내 육신을 꾸미고 내 주변 환경을 부유하고 권세 있게 만드는 데 집착한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그 생명으로 어떻게 의미있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데 집중하지요. 내 육체나 주변환경이 어떠하든 내게 주어진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한 삶을 살아내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하려는 사람이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창조역사의 마지막인 인간 창조에 대해 말씀하는데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직접 불어 넣으셨다고 말하지요. 즉 우리에게는 자동차로 치면 최고의 연료인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거죠.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한 운전사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지니셨다면 예수님 타신 차는 가장 고급차이겠지요. 반면 이 세상에 오실 때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죽으실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생각한다면 이 때의 차는 경차만도 못한 차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예수님은 경차만도 못한 것에서부터 최상의 고급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환경 모든 상황에서 가장 완벽한 생명의 삶을 운전하신 분이신 거죠. 그러기에 우리가 가난하고 못배우고 힘겨운 환경 속에 있든, 크게 성공해서 최고의 풍요와 권세와 화려함 속에 있든 거기에서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의미있고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에게서 내 인생이라는 차가 어떤 종류의 차이든 바르게 운전해 가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인 것이지요.
여전히 전쟁이 멈추지 않고, 서로의 견해와 시각이 전혀 변하지 않아서 분쟁, 다툼, 신경전, 무모한 무한경쟁이 멈추지 않고,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이해와 포용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안기보다도 소송과 힘겨루기가 여전한 현실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참된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세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만큼 세상은 생명이라는 연료도 오염되었고, 그 오염된 연료와 더불어 운전하는 자들도 거칠고 왜곡되게 운전하면서 세상을 이처럼 불안하고 위험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어두운 세상이 되게 하고 있는 거죠.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력과 그 생명력으로 완전한 삶을 살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참된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오늘의 본문은 남편인 아브라함이 99세, 아내인 사라가 89세 노인이어서 더 이상 자녀를 가지는 기능을 잃어 버렸는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하시겠다는 내용이지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본문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많은 경우 이 말씀이 못할 것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니까 나의 삶에도 풍요롭고 싶은데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풍요롭게 해 주시고, 내 몸에 병든 것을 내 맘대로 고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고, 내 뜻과 소원대로 안되는 현실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되게 해주시는 쪽으로 본문을 이해하려 하지요. 사도신경에서도 첫 시작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인데 성경에서 말하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언제든 소원을 말하고 두드리면 무엇이든 그대로 이루어지는 전능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생명을 통해 나타나셨고 그 생명력으로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것으로 나타내셨지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완전하게 사셨고, 그러한 예수님의 모든 삶의 핵심은 부활에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장벽을 깨치시고 예수님은 멈추지 않는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셨지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력은 단지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죽음을 극복한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아있어도 죽어 있는 사람처럼 되게 해 버리는 세상의 모든 죄악의 요소들, 여러 가지 이유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만큼 심한 좌절과, 자기자신과 세상에 대한 큰 실망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견디기 힘든 힘겨운 현실과, 세상에서 겪는 모든 억울함과 원통함과,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완전한 실패에서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서도 내가 살아내어야 할 삶을 발견하게 하고 깨닫게 하고 살아내게 하는 생명력이지요.
반대로 내가 풍요롭고 성공했고 남보다 많이 앞서가기 때문에 나는 잘살고 있고, 영원한 평안과 안정 속에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내 육신의 생명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내가 누리는 이 모든 성공과 번영의 순간이 일시적임을 깨닫게 하면서 이 번영과 성공 속에서 참된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생명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당시에 늙은 부모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여겼던 아들이 없었지요. 게다가 이제는 출산능력마저 상실된 상태여서 삶이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의 불완전함을 깨치시고 불가능한 생명의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불가능한 가운데 태어나게 하신 아들 이삭에게 초점을 두려고 하는데 본문의 초점은 기적적으로 태어나는 아들이 아니라 불가능함에서 언제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초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완벽한 생명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생명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내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전능함이 아니라 평안하고 형통한 환경이든, 죽음과 같이 실망스럽고 고통스럽고 열악한 환경이든,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경차를 타야 하던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있든 좋은 연료와 좋은 운전사로 인해 평화로운 운행을 만들어가는 생명력, 바로 이것이 능하지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 전능하심을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완전한 삶을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발견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우리는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의 은총을 힘입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나이가 백세가 되어도 새로운 생명을 기대하면서 살아낼 수 있는 생명의 힘이 우리에게 있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의 처절한 고통의 죽음에서도 여전히 다시 살아낼 수 있는 부활의 생명력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거죠.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하시며 지켜주시며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