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전(重明殿)의 파란 눈 한국인
중명전(重明殿}은 처음 왕실 도서관으로 지었다. 1904년 덕수궁화재로 중명전은 고종의 집무실 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다. 화재로 내부가 소실된 후 복원 된지는 10년 가까이 된다.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는데 이곳만큼 파란만장한 역사의 장이 또 있을까?
고종은 대원군 10년간의 섭정에서 벗어나면서 조정의 실권자가 된다. 외교에 눈을 뜬 명성황후는 서방 강대국의 세력을 이용해 나라를 지키려 했지만 일제의 만행으로 시신도 못 찾는 을미사변을 당한다.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황제는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이완용이 공을 세운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의 숙소에 불침번을 선 이는 최초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였던 파란 눈의 이방인 호머 헐버트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국가 안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조미수호약(朝美修好條約) 이행을 요구하는 친서를 헐버트에게 위임한다.
조선이 어려움을 당하면 미국이 도와주기로 한 약속이었음으로 도와줄 것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은 호머 헐버트와의 면담을 미루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일제의 보호조약은 강압에 의해 체결된다. 조약을 승인할리 없는 고종을 유폐시킨 후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은 일제에게 넘어간다.
만국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열림을 알게 된 고종은 밀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보낸다. 일본과의 보호조약을 승인한 일이 없슴음 알리는 국서를, 한문과 영문으로 작성 친서를 만국평화회의에 가져갔다. 일제의 방해 공작과 조선은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헤이그밀사사건에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던 외국인이 있다. 파란 눈의 한국인이라 불리던 호머 헐버트다. 고종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우리 밀사들과는 다른 경로로 헤이그에 도착했다.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임을 알리는 특사들의 기자회견 주선과 주권회복에 적극 협조하였다. 이 사건 후 고종은 퇴위당하고 헐버트도 추방된다. 스페이 지배했던 필리핀은 미국이 통치하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은 뒤였다. 이러한 내막이 있어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이행은 기대할 수 없었다.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을 추진했는데 당시 내각의 협조와 이완용은 많은 자금을 제공한다. 독립문 앞뒤의 편액 글은 당시의 명필이었던 이완용이 썼다.
이방인 호머 헐버트의 행적과 을사오적의 주역 이완용의 행적이 너무나 대조 된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국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공부하고 미국 유학 후 주미공사로 복무하기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행적은 일제에게로 기울어진다. 그는 일본어를 못했기에 해 대마도 출신의 통역을 항시 데리고 다녔다.
조선의 개화와 독립에 헌신한 호머 헐버트 기념사업회가 있음도 알게 되었고, 그 내역 중 일부를 인용한다. KBS 골든벨 프로 최종 문제에서 조선왕조 고종 때 육영공원 교사로 파란눈의 한국인이라 불리던 호머 헐버트가 순 한글로 쓴 저서가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가 나왔었다. 책은 『사민필지(士民必知)』로 생소한 이름이다. 그 학생은 골든 벨을 울리지 못했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공사를 역임한 민영환은 서당교육을 개혁 할 것을 건의받자 고종은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한다. 교사로 세명의 미국인이 부임해왔는데 호머 헐버트는 우리나라의 신식 교육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그는 4개월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한글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린다. 당시 양반 계급의 지식인들은 언문이라 하여 헐버트가 물어보면 한글을 모른다고 대답하여 실망하기도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한글이 천대를 받고 있다니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두고 3년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만큼 실력을 쌓는다.
헐버트의 『사민필지(士民必知)』는 순 한글 책으로 국제간의 교류를 위해 조선인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해 만들었다. 1891년초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
되며, 태양계와 지구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대륙과 각 나라를 소개하였다. 각 나라에 대한 설명은 지리, 자연 상태, 정부 형태, 풍습, 종교,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포함하고 있다. 『사민필지』는 현재 한글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독립신문에는 띄어쓰기가 최초로 도입되었는데 헐버트의 권고가 반영된다. 그때까지 한글은 띄어쓰기가 없었다. 의미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어의 띄어쓰기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독립신문 한글과 영문판으로 만들었고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 주시경은 한글판 편집, 헐버트는 영문판 편집을 맡았다.
대한제국이 일제와 합방되자 중명전은 이등박문의 애첩 배정자가 기거하기도 했고, 외교크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조선왕조의 재산은 국유화 된다.
박정희 정권시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증명전을 돌려준다. 마지막 황태자라 불리는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 이상노는 은행에 이 건물을 담보로 사업을 벌였으나 파산하고 은행에서는 중명전을 매각한다. 이후 정부에서 다시 매입 보물로 지정했다.
헐버트가 고종의 밀명을 받은 다른 사건이 또 있었다. 고종 개인명의 비자금을 상해의 독일계 덕산 은행에서 찾아오는 일이다. 금과 현금 등 242,500엔을 찾으러 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위조 서류로 그 돈을 일제가 인출해 갔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일조가 넘는 금액이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고종의 자금을 찾아내어 독립운동을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미국으로 추방당한 헐버트는 40년 동안 이 돈을 되찾고자 했었다. 광복 후 환국하면서 일제로부터 반환 받으려고 고종이 건네준 증빙서류를 가지고 왔다. 86세의 나이로 배편으로 한국에 돌아와 여독으로 일주일 만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숨진다. 비자금 서류는 ‘국립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모셔졌다. 사후에 그는 건국 훈장 태극장과 금관문화훈장을 수여 받는다. 중명전은 이름과는 다르게 수난의 현장이었다.
2009년12월 복원 공개 했으나 2017년 2월 현재 내부 개선공사중이며 금년 4월중 개관 예정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김영남 위원님! Homer Herbert 박사는 우리나라의 은인이지요. 업적중에 가장 꼽을 수 있는 게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주시경 선생을 교육시켜 우리말의 연구와 계승에 기반을 마련해 주신거고 또 아리랑을 채보하여 세계에 그 우수성을 알려 현재 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게 한 시작이라 해도 관언이 아닙니다. 항상 그 거룩한 뜻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할중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