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헬라어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날입니다. 목요일 저녁에 잡히셔서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래서 이번 주를 고난주간이라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4복음서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보면 거의 비슷한 점이 있는데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한 기간이 3년인데 마지막 1주일에 대한 기록이 1/3정도라면 이것은 네 명의 제자 모두 십자가의 고난을 무엇보다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중의 복음이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발자국을 따라 가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잡힌 날 밤에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먼저 심문을 당하고 이후에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졌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일 죄를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헤롯왕에게 넘겼습니다. 헤롯왕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여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욕을 먹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뺨을 맞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맞은 채찍은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채찍입니다. 로마의 기록에 보면 그 채찍은 뼈가 보일 때까지 때리는 형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군인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군인들이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 씌운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십자가를 몸소 메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인 로마총독의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대략 1.5㎞의 길입니다. 그 길을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 맞은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 길을 못 올라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장에 도착해서 옷을 벗기고 손과 발목에 못을 박아 매달고선 고통 속에 죽어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 6시간동안 매달려 계시다가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인간이 당하는 괴로움과 아픔이 이보다 더 큰 경우가 있을까요? 한 인간이 당하는 수치와 능멸이 이보다 더 클 수 있을까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고통 받고 처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주님은 본문의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을까요?
1.‘다 이루었다’는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메시야가 오시면 이런 일을 하고 이러한 죽음을 당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5:39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가 오면 이러하리라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본문 28절 뒷부분을 보시면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목이 말라서 외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성경을(시69:21) 응하게 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 앞의 23,24절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라고 합니다. 이 또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입니다. 즉 시22:18에 예언한 성경을 이루시려 함입니다.
36절에서도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죽은 것을 아시고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죽었는지 확인만 했습니다. 이렇게 함도 성경(민9:12)을 응하게 하려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눅24:44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이처럼 예수님은 예언된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즉 예언된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견뎌내면서까지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메시야가 당할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7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사형수들처럼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형만은 면하기 위해서 자기를 열심히 변호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참으셨는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침묵했습니다. 또 다윗은 시22:14이하에서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2.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의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인 사망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갚아야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의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을 만한 큰 죄악을 범하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극악한 형벌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53:5,6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죄 문제를 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가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의인이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 1:18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옮기셨습니다(시103:12).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주셨고 대신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엡2:4).
3.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뜻한 바를 다 이루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요6:39이하의 말씀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보다 아버지의 뜻이 잘 나타나 있는 구절이 있을까 싶습니다. 아들을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즉 우리가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도록 길을 여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인데 그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러한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사심으로, 살아냄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살려낸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전하고자 하는 목적을 잘 살려냈다, 그려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잘 살려낸, 그려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잘 살려내시려고 아버지의 뜻대로 잘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아들은 죽음까지도 순종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안 보이지만,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을 통해 사랑을 보이신, 나타내신 것입니다(요일4:10).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도 보이지 않지만 값없이 주시는 아들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딛2:11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려는 뜻을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잘 살았다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행13:36). 우리도 오늘날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남은 인생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살려내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위해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죄와 허물을 씻기 위해 피 흘리셨구나, 하는 것을 되새기면서 다시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