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 관전과 런던 여행을 마치고
윔블던 본선 대회가 시작되기 전 영국에 도착해 22일간 런던에서 머물다 왔다. 예정보다 일찍 귀국한 것은 성수기를 맞은 비행기표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마일리지 대기표가 나오자마자 부담 없이 돌아오는 방법을 선택해서다.
이번 런던 방문은 여러 가지 의미 깊은 여행이었다. 본선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알카라스나 메드배데프등 유명한 선수들이 웜업하는 장소에서 어떻게 몸을 만들고 스윙 연습을 하고 있는지 가까운 곳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수확이다. 또 세계적인 선수들의 경기를 센터코트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한국 주니어들의 경기를 보는 중에 애를 태우며 응원하던 한국교포들을 많이 만나게 된 점이다. 기자의 어린 손주들이 런던 근교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같은 공간에 머물며 테니스도 함께 하고 가까운 템즈 강변도 걸어볼 수 있었던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미디어 팀의 아이디카드 위력은 대단했다. 일반인들처럼 새벽부터 줄을 설 필요도 없이 곧바로 입장할 수 있었고 어느 코트든 관전하고 싶은 선수의 경기가 펼쳐지는 곳이면 다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식비가 제공되고 전용 책상까지 배정받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한국의 주니어 선수들을 만나다
16년 전부터 동호인 기사만 써 왔던 기자는 이번 윔블던을 통해 한국의 주니어 선수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권순우 선수는 물론이고 노호영, 장가을, 김동현, 김장준, 14세부 김동재, 홍예리까지 모두 한국테니스의 미래를 짊어진 선수들이었다. 이 주니어 선수들이 본선 1회전, 2회전에서 대부분 영국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졌는데 자국의 선수들이 경기하는 곳이면 어디든 몰려와 격하게 응원하는 영국인들 때문에 옆에 서 있어도 작아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경기 중 매번 위기가 올 때마다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는 어린 한국 선수들은 응원하던 교포들의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윔블던의 초청을 받아 천연잔디코트에서 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선수 가족의 표현처럼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윔블던 대회. 4대 그랜드 슬램중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윔블던을 왜 많은 사람들이 직관하고 싶어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기 쉽지 않은 이유를 이번에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어떻게 입장권을 사야하나
1주일 정도 휴가를 내 영국에 온다 해도 한국보다 8시간 늦은 런던은 시차 극복이 어렵고 입장할 수 있는 표를 구하기도 어렵다. 온라인 판매가 안 되고 무조건 새벽 5시부터 7~8시간 줄을 서야 1인에 1표를 주는 입장권을 살 수 있다. 센터코트는 하루에 판매하는 티켓 양이 미리 정해졌기 때문에 전날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밤을 새워야 티켓을 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기필코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이번 생의 버킷리스트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일반 동호인들에게 윔블던 직관은 꿈같은 일이다.
기자는 런던거주의 교포들을 통해 조금 저렴하게 경기장을 들어 올 수 있는 정보를 알아냈다. 윔블던이 열리기 10개월 전에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 티켓을 구매해 추첨을 통해 당첨되는 방법, 또는 1억 원에 가까운 5년 만기의 채권을 사는 방법등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본선 1회전부터 3회전까지는 모든 야외 코트가 꽉 차서 볼 수 있는 경기가 많은 반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는 애로 사항이 따른다. 다만 8강부터는 오후 4시 넘으면 줄을 설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라운드 티켓 값이 20파운드로 저렴하고 복식과 주니어 경기등이 야외코트에서 열리기 때문에 큰 고생 안하고 게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천연잔디코트
윔블던이 열리는 7월, 영국의 낮은 매우 길다. 밤 9시가 되어도 훤해서 라이트 시설이 없다. 새벽 4시면 동이 트고 밤 10시 정도 되어야 짙은 어둠이 온다. 비가 하루에도 5~6번씩 내려 17개의 천연잔디 야외 코트를 관리하느라 진땀을 뺀다. 각 코트마다 6~7명의 전담 팀들이 구름만 오면 번개처럼 비닐을 덮고 비 그치면 걷어내고 사이드에 고인 물을 두꺼운 방석으로 빨아내느라 바쁘다. 경기가 끝난 밤 9시 정도에 각 코트는 거대한 돔으로 씌워진다. 아침 7시 무렵 윔블던 현장에 일찍 나와 보니 각 코트마다 8mm로 깎고 줄을 긋고 물을 뿌리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천연 잔디는 볼이 빨라 치기도 어렵지만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여유와 낭만이 흐르는 윔블던
윔블던 대회가 열리는 올잉글랜드 클럽은 잘 가꾸어진 공원 같다. 치열한 경쟁을 하는 대회 현장과는 거리가 먼 낭만적인 분위기다. 어디에 눈길을 주어도 그린과 퍼플의 꽃이 조화를 이루고 판매하는 제품들까지도 그 색상들로 주를 이룬다. 경기를 관전하지 않고 센터코트 앞에 서 있다 보면 일류 멋장이들을 만날 수 있다. 멋진 드레스로 성장을 한 여성과 전 세계 신사들의 다양한 패션들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다. 유명한 모델이나 배우, 그리고 잘 알려진 왕족들도 만난다. 그동안 우리 머릿속에 저장된 일반적인 테니스 대회 현장과는 전혀 달라 기어코 한 번쯤은 와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힐
45만원 하는 윔블던 결승 티켓을 최대 2000만원의 웃돈을 주고서라도 볼 만 하다는 윔블던 결승을 언더그라운드 티켓으로 입장해 야외 대형 스크린으로 관전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다. 칵테일 음료 핌스를 마시며 현실에 맞게 그들의 방식으로 윔블던을 맛보며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은 기적 같은 샷이 나올 때마다 박자에 맞춰 협연하듯 개성 있는 제스처와 박수로 갈채를 보낸다. 테니스를 향한 열정이 메가톤급인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실천하는 모습들을 직관했다.
*윔블던 현장에서 만난 한국인들
박경이 부부
1년 전에 비행기표 예약해서 5박6일 관전하러 온 과천의 박경이 부부를 만났다. 새벽 다섯 시부터 여섯 시간 이상 대기했다가 센터코트 표를 구한 이 부부는 첫 게임부터 마지막 게임까지 관전하더니 그 이튿날 또 입장했다. 이 부부는 “윔블던에 와서 세계적인 선수들의 경기를 본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를 이룬 것이다”며 “QUEUE라는 기다림의 힘듬 속에서도 오랜 전통으로 닦아 온 윔블던을 느끼고 선수들의 경기를 통해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라켓가방을 메고 센터코트까지 간 최승희
무작정 혼자서 라켓 메고 혼자 온 동호인을 만났다. 용감한 이 동호인은 5년구력의 최승희다. 센터코트에 들어가기 위해 전날 밤 텐트에서 잠을 잤다. 꽁꽁 언 손으로 받아 든 윔블던 입장권이 천국행 티켓만큼이나 귀하게 여겨졌단다.
4대 그랜드 슬램을 모두 관전하겠다는 유길초
호주오픈 예선부터 결승까지 관전했던 유길초는 “9년 전에 유럽여행 할 때에는 윔블던 센터코트 잔디 위에 노는 비둘기밖에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6시간 이상 줄을 서서 어렵게 들어와 경기를 직접 보니 더욱 특별하게 와 닿았다”며 “온통 꽃으로 장식이 된 올 잉글랜드 클럽의 분위기는 승패를 가리는 현장이라기보다는 우아한 정원에 피크닉 온 기분이 든다”고 했다.
호주 브리스번에서 온 한인들
루카스 한이 Boy's 14 & Under Singles에 호주 대표로 윔블던에 출전하면서 아버지 한석희씨와 함께 온 브리스번 동호인들을 만났다. 한석희씨는 “루카스 한이 호주에서 태어났지만 한국말을 잘 해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을 만나면 호주 대표팀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촉매 역할을 해 왔다”고 했다.
그 외에도 푸켓에서 온 엘리와 교환학생으로 온 남민우, 그리고 다양한 런던거주 교포들을 만났다. 준우네는 3년 런던에 거주하면서 매 년 방문해 한국 선수들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부모 같은 마음으로 한국 주니어들을 응원했다.
*후기
윔블던에 취재를 간다하니 지인들은 십시일반 온라인 혹은 봉투를 건넸다. 좋은 추억 쌓아 오라는 뜻으로 많은 후원을 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동시다발적인 협찬이었고 평생 잊지 못할 감동적인 일이었다. 윔블던 기간 동안 한국 선수들의 경기는 반드시 챙겨 보았다. 날마다 센터코트에 가서 유명 선수의 경기를 보며 즐기기 보기보다 우선순위로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뛰는 현장에 머물렀다. 런던에 머무는 주재원들은 한국 선수들의 경기를 애 태우며 응원하는 것이 제대로 윔블던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 시간 내어 어린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생활과 방과 후로 이어지는 교육현장을 구경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비를 맞으며 운동회를 하는데 학부모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끝까지 박수와 격려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라면 교육청에 민원이 쇄도할 일인데 학교를 믿고 자녀들을 맡기는 그 현장을 지켜보며 커다란 문화충격을 받았다.
영국의 물가는 살인적이고 음식 맛은 형편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이다. 외식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싸지만 마트에서 파는 야채와 고기등의 장바구니 물가는 한국보다 더 싸서 놀라웠다.
이번 윔블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굳이 센터코트 입장이 아니어도 힐에서 윔블던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차가운 텐트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기어코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 각자 주어진 상황에 최대의 만족을 느끼며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ALWAYS LIKE NEVER BEFORE” 눈길이 가는 곳마다 보이는 던 올 잉글랜드 클럽의 캠페인 문구처럼 새로운 생각이 스며들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