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릭잰더 보너퍼트 캐스트 씨는 다른 관객들과 함께 토키 극장에서 나왔다. 거기서 그는 ≪한 마리의 참새도……≫라는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다.
오후의 햇빛 속으로 나오자 그는 눈을 좀 껌벅거리며 그 특유의 길 잃은 개 같은 몸짓으로 둘레를 둘러보았다.
그는 혼자말을 했다.
“재미있는 착상이야.”
신문팔이 아이들이 소리치며 지나갔다.
“최신뉴스……처스턴의 살인광…….”
그들은 <처스턴의 살인, 최신뉴스>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캐스트 씨는 주머니를 뒤져 신문을 샀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을 보지는 않았다.
프린시스 공원으로 들어간 그는 토키 만에 면한 정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거기 앉아 신문을 펼쳤다.
제목이 보였다,
카마이클 클라크 경 살해되다.
처스턴의 무서운 참극.
살인광의 짓.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한달전 영국은 벡시힐의 젊은 아가씨 일리저버스 버너드 살인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이 사건은 ABC 철도 안내서가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ABC는 카마이클 클라크 경의 시체 옆에서도 발견되어, 경찰은 두 범죄가 한 인물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우리 바닷가 피서지에서 한 살인광이 마구 날뛰고 있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캐스트 씨 옆에 앉아 있던 플란넬 바지에 화려한 파란 엘틱스 셔츠를 입은 젊은이가 말을 걸었다.
“좋지 않은 이야기군요. 그렇지요?”
캐스트 씨는 깜짝 놀랐다.
“네, 정말……정말로…….”
그 손은 젊은이가 알아차릴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당장 신문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젊은이는 계속 지껄여댔다.
“미친 사람은 결코 구분이 안 됩니다. 그들이 언제나 저능으로 보이는 건 아니니까요. 대게 당신이나 나와 조금도 다름없어 보일테니 말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그들의 상태를 이상스럽게 만든 게 전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뒤로도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요.”
“네……그럴 겁니다.”
“나는 전쟁이라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캐스트 씨는 젊은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돌림병이며 수면병이며 굶주림, 그리고 암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역시 생기고 말지요!“
젊은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캐스트 씨는 웃었다. 그는 잠시 웃고 있었다.
젊은이는 얼마쯤 놀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머리가 돈 게 아닐까.)
그래서 큰소리로 말했다.
“실례지만 당신도 전쟁에 나갔었겠지요?”
“나갔습니다. 그래서……덕분에……머리가 이상해졌지요. 그 뒤로 내 머리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프지요. 아주 아픕니다.”
젊은이는 어색하게 말했다.
“오, 그거 참! 안됐군요.”
“때때로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나는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젊은이는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캐스트 씨는 신문을 손에 든 채 뒤에 남았다.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다.
그 앞을 사람들이 오갔다.
그들은 대부분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섭군요. 여기에 중국 사람이 관계되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 여급사는 중국인 카페에 있었던 게 아닐까요?”
“사실은 골프장에서…….”
“바닷가라고 들었느데요…….”
“하지만 여보, 우리는 어제 엘버리에서 차를 마셨잖아요.”
“경찰이 틀림없이 붙잡을 거야.”
“지금쯤 벌써 잡았는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녀석은 토기에 있어. 그 여자, 자네가 말했던 그 여자를 죽인…….”
캐스트 씨는 신문을 반듯이 접어 벤치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일어나 시내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아가씨들이 옆을 지나갔다. 흰색이며 분홍이며 푸른색으로 차려 입은 아가씨들, 여름 웃옷이며 헐렁한 바지며 짧은 바지를 입은 아가씨들. 그녀들은 웃기도 하고 킥킥거리기도 했다. 그 눈은 지나쳐 가는 남자들의 점수를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눈은 한 번도, 한 순간도 캐스트 씨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조그만 테이블로 가서 앉아 차와 데븐셔 크림을 주문했다.
< 준 비 >
카마이클 클라크 경 살인 사건 뒤로 ABC 사건은 아주 유명해졌다.
신문은 날마다 그 기사로 메워졌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단서가 드러났다고 보도되었다. 체포도 시간 문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에 관계있는 여러 인물이며 장소의 사진이 실렸다. 그리고 국회에서의 질문도 실렸다.
앤도버 살인 사건도 이제는 다른 두 살인 사건과 결부되었다.
경찰국은 최대한으로 공개하는 것이 범인을 추적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준다고 확신했다. 그 겨로가 대영제국의 모든 국민이 아마추어 탐정이 되었다.
<에일리 프리커>지는 다음과 같은 표제를 쓰는 멋진 구상을 생각해 냈다.
범인은 당신 이웃에 있다!
물론 포아로는 사건 한가운데 있었다. 그에게로 보내져 온 편지는 복사되고 공표되었다. 그는 범죄를 막아내지 못한 이유로 크게 비난받고, 또 범인을 지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변호되기도 했다.
신문 기자들은 인터뷰로 그를 괴롭혔다.
포아로 씨, 오늘의 견해.
그리하여 페이지의 반쯤은 바보스러운 말로 채워져 있었다.
포아로 씨, 상황을 중시.
포아로 씨, 성공 직전에 있다..
포아로 씨의 친구 헤이스팅즈 씨, 본지 특파원에게 말하다!
나는 소리쳤다.
“포아로, 부디 나를 믿어주게. 나는 이따위 소리를 한 적이 없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네, 헤이스팅즈, 알고 있어. 이야기한 말과 씌어진 말 사이에는 놀랄만한 거리가 있지. 조금만 문장을 고치면 처음 말과 완전히 반대의 뜻이 되고 마는 수도 있으니 말일세.”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자네가 생각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걸세.”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러나 이런 바보스러운 게 도움디 되는 수도 있지.”
“어떤 도움?"
포아로는 엄숙하게 말했다.
“오늘 <데일리 프리커>지에 실린 내가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기사를 우리의 범인이 읽으면, 그는 적으로서 나에게 품고 있던 모든 존경을 잃게 될 걸세.”
나는 그즈음 아마도 실제적인 조사는 아무 것도 행해지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찰국과 각 지방 경찰에서는 어떤 조그만 단서라도 무섭게 추궁하며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범죄가 저질러진 장소 근처의 넓은 지역에 걸쳐 호텔, 여관, 하숙집 등이 철저하게 조사되었다. 이상한 모습의 겁먹은 눈을 한 사나이를 보았다든가 하는 상상력 풍부한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조사되었다. 어떤 막연한 보고도 내버려두지 않았으며 기차, 버스 전차, 짐꾼, 차장, 책방, 문방구점……모두에 걸쳐 끊임없는 심문과 검증이 계속되었다. 적어도 20명쯤 되는 사람들이 문제의 날 밤의 행동에 대해 경찰이 납득하기까지 구금되어 심문을 받았다.
얻은 효과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어떤 진술은 가치있는 것으로 참작되고 기록되었지만, 그 이상의 증거가 없으면 어쩔 수 없었다.
크롬 형사와 그의 동료들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는 데 비해 포아로는 지나치게 태평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몇 번이나 말다툼을 했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 자네는? 판에 박힌 심문같은 건 경찰이 나보다 훨씬 잘 하네. 자네는 나에게 개처럼 헤집고 다니기를 바라고 있는거야.”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기보다는 그런 식으로……마치…….”
“<현자(賢者)처럼>이라고 말해 버리게! 내 힘은 내 머리 속에 있지 발에 있지 않네, 헤이스팅즈. 자네 눈에는 태평스러워 보여도 나는 늘 생각하고 있어.”
나는 소리쳤다.
“생각하고 있다고? 대체 지금이 생각만 하고 있을 때인가?”
“그렇네. 몇 번이고 말해도 좋지만 그렇네.”
“그러나 생각하고 있어서 뭐가 되는가? 자네는 세 가지 사건의 상세한 상황을 암기하고 있잖은가.”
“내가 생각하는 건 그 사건에 대한 자료가 아니라 범인의 머리일세.”
“미치광이의 머리말인가!”
“그렇네. 그러니 금방은 알 수 없다네. 범인이 어떤 인간인 줄 알게 되면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도 알게 되는 걸세! 그리고 나는 차츰 알아차려 가고 있네. 앤도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거의 아무것도 몰랐네. 멕스힐 사건에서는? 앤도버 때보다 조금 더 알았지. 처스턴 살인 사건에서는? 조금 더 많이 알았네. 이렇게 나는 알아가고 있네. 자네가 알고 싶어하는 그런 것, 얼굴이며 모습의 윤곽이 아니라 머리의 윤곽을 말일세. 그 머리는 어떤 뚜렷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며 작용하고 있네. 다음 범죄 때에는……”
“포아로!”
친구는 싸늘하게 나를 보았다.
“그렇지만 헤이스팅즈, 또 하나의 범죄가 일어나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네. 운은 기회에 달려 있지. 지금까지는 우리 미지의 손님에게 행운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운이 그를 거역하게 될지도 모르네. 그러나 어쨌든 다음 범죄가 일어나면 좀더 여러 가지 것이 알려지겠지. 범죄는 모름지기 여러 가지를 나타내기 쉬운 걸세. 자네 좋을 대로 자네의 방법, 취미, 습관, 마음의 방향 등을 바꿔보게. 그러면 자네 행동에 의해 자네의 정신이 나타날 걸세. 혼란된 징후도 있지. 때로는 마치 두 사람의 지능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 그러나 결국 윤곽이 뚜렷해져 올 걸세. 나는 알고 있어.”
“그게 누구인가?”
“아, 헤이스팅즈, 그의 이름이며 주소를 알고 있다는 게 아닐세.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 하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낚아 올리는 거지.”
내가 당황해 있는 것같이 보이자 그는 말을 이었다.
“알겠나, 헤이스팅즈? 숙련된 어부는 어떤 고기에 어떤 먹이가 좋은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법일세. 나는 그 정확한 먹이를 찾아내려는 거야.”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 나서? 그리고 나서? 자네는 마치 언제나 ‘네, 그래서요?’ 라고 되풀이하는 크롬 형사처럼 머리가 나쁘군. 좋아, 그리고 나서 그가 먹이와 낚싯줄을 삼켜 버리면 우리가 낚아 올리는 걸세.”
“그 동안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죽어 가고 있네.”
“세 사람뿐일세. 교통사고로 1주일에 140명쯤이나 죽고 있잖나.”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르네.”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아마 똑같을 걸세. 다른 사람,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있어서는. 아니 그렇지, 확실히 다르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이 사건에서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있다네.”
“기쁘게 해주는 게 있다면, 어디 한 번 그것을 듣고 싶군.”
“빈정거려도 헛일일세.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게 나를 기쁘게 해주고 있네.”
“그건 더욱 나쁘잖은가?”
“천만에, 결코 그렇지 않네! 혐의를 받는 분위기 속에 있는 일만큼 또 자기가 감시 받고 있는 일이며, 사랑이 공포로 변해 가는 것을 느끼는 일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네. 자기 둘레의 친한 사람들을 의심하는 일처럼 무서운 건 없지. 그것에는 독이 있어. 열병 속에 있는 것처럼. 그런 죄 없는 인간의 생활을 짓밟는 일만은 적어도 ABC에게는 없다는 걸세.”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범인의 변호를 하고 있군!”
“왜 안 되는가? 그는 자신이 완전히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네. 모름지기 우리는 그의 생각에 동정해 버릴지도 모르는 걸세.”
“농담 말게. 포아로!”
“흠! 아마 내가 자네를 놀라게 한 모양이군. 첫째로는 내 게으름으로, 둘째로는 내 생각으로”
나는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저었다.
잠시 뒤 포아로가 말했다.
“아무튼 자네를 기쁘게 해줄 계획이 하나 있네. 그것은 적극적이며 소극적인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것은 많은 대화를 필요로 하는데 그 반대로 사고력은 전혀 필요 없다네.”
나는 그의 돌려서 말하는 이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그건?”
“피해자의 친구며 친척이며 고용인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이야기하게 하는 걸세.”
“그럼, 자네는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서가 아닐세. 그러나 뭐든지 이야기한다는 건 언제나 선택이 포함되어 있는 법이지. 만일 내가 자네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묻는다면, ‘9시에 일어나 9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했다. 달걀과 베이컨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서 클럽에 갔다. 어쩌고저쩌고……’ 라고 할 테지. ‘손톱을 잘못 손질했기에 잘랐다. 수염을 깎는 데 더운물이 필요해서 벨을 눌러 부탁했다. 테이블보에 커피를 엎질렀다. 모자를 솔질하고 섰다’ 는 것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게 아닌가. 무엇이나 다 말한다는 건 무리일세. 그러니 선택하는 거지.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서 이야기하네. 그런데 대개는 그것이 잘못인 법이라네.”
“그럼,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조사할 수 있다는 건가?”
“지금 말한 것처럼 오직 대화를 통해서지.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서일세! 어떤 일, 어떤 인물, 또는 어떤 날의 일에 대해 몇 번이고 되풀이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서만 특별한 점이 나타나는 거라네.”
“어떤 점이?”
“물론 내가 모르는, 내가 찾아내려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점일세! 이젠 아무것도 아니던 일들이 진정한 제 뜻을 지니기에 충분할 만큼 시간이 지났네. 이 세 살인 사건에 있어 사건에 의미를 갖는 듯한 사실 또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건 모두 수사의 법칙에 어긋나네. 어떤 하찮은 일이나 말속에 사건을 해결할 열쇠가 될 만한 것이 있을 게 틀림없네! 그것은 확실히 마른 풀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마른 풀더미 속에 분명 바늘이 있는 걸세.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네!”
나에게는 포아로가 말하는 것이 아주 막연하고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자네는 모르겠나? 자네 머리는 하찮은 하녀만큼도 날카롭지 못하군.”
그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던져 주었다. 그것은 공립 초등학교의 어린이같이 반듯하고 깨끗한 글씨로 씌어 있었다.
편지 드리는 실례를 용서해주세요. 가엾은 아주머니의 경우와 같이 무서운 살인 사건이
두 번 있고 나서 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어요.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 아가씨 사진을 신문에서 보았어요. 그 아가씨란 백스힐에서 살해된 처녀의 언니
로, 저는 용기를 내어 그분에게 편지를 써서 런던으로 일자리를 찾아가 그분이나 그분의
어머니 계신 곳에서 일할 수 없을지 물었지요.
한 사람보다 두 사람 쪽이 좋을 테고, 이 무서운 악마를 찾아내기 위한 일이니 보수는 많이 필요 없으며, 둘이서 알고 있는 것을 합치면 잘되지 않겠느냐고 썼답니다.
그분은 곧 반가운 회답을 보내주었는데, 자신의 일자리에 대해서는 하숙하고 있다는 것
등을 알려주고, 제가 선생님께 편지 드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며 그분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들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함께 나누는
게 좋겠다고도 했지요.
그래서 제가 런던에 와 있음을 편지로 알려 드리는 거예요.
주소는 밑에 적은 대로예요.
폐가 되지 않기를 빌면서, 안녕히.
메리 드로워
포아로가 말했다.
“메리 드로워는 아주 똑똑한 아가씨야.”
그는 또 다른 편지를 꺼냈다.
“읽어보게.”
그것은 프랭클린 클라크의 편지로, 이제부터 런던에 가니 지장 없으면 내일 찾아가도 좋겠느냐고 씌어진 것이었다.
포아로가 말했다.
“자네 실망하면 안 되네. 바야흐로 행동이 개시되려 하고 있다네.”
< 포아로의 연설 > < 포아로의 연설 >
플랭클린 클라크는 다음날 오후 3시에 와서 곧 요점으로 돌아가 얘기를 시작했다.
“포아로 씨, 저는 불만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클라크 씨?”
“크롬 형사는 아주 유능한 경관일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 화가 납니다. 뭐든지 다 알고 있는 체하는 그 태도를 보면! 처스턴에 계실 때 친구분께 제 마음속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형님 일로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생각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포아로 씨, 제 생각은 발밑에 풀이 돋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헤이스팅즈가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 범죄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럼, 다음 범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생각하고 말고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도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당신 생각을 뚜렷하게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포아로 씨, 특별 수사대 같은 것--당신 지휘아래 움직이는--살해된 사람들의 친구며 친척들로 이루어진 수사대 같은 것을 제안합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찬성해 주셔서 기쁩니다. 우리들의 머리를 한데 모아 부딪치면 무엇인가에 들어맞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또 다음의 경고가 있으면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거기 있게 되어--그런 일은 그리 쉽게 있을 것 같지 않지만--전의 범죄 현장에 가까이 있었던 누군가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건 피해자의 친척이나 친구분들은 당신과 같은 환경에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 일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짧은 휴가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프랭클린 클라크는 그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만이 돈을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나 자신은 그리 유복하지 못하지만, 형님이 부자였으니 저도 결국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특별 수사대를 편성하여 그 대원에게 그들의 수입과 같은 금액은 물론 수당도 주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그 수사대는 어떻게 편성하면 좋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 점은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건 버너드 양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이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그녀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저와 버너드 양, 죽은 아가씨의 약혼자였던 도널드 프레이저를 넣으면 어떨까요. 그리고 앤도버에서 살해된 부인의 남편 되는 사람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밤낮 술에 취해 있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버너드 부부도 적극적으로 싸움에 참가하기엔 나이가 좀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 밖에는?”
“그렇지. 저……그레이 양도 있습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클라크는 얼굴을 좀 붉혔다.
“아, 그레이 양, 말입니까?”
이 짧은 말에 포아로만큼 멋지게 부드러운 빈정거림의 말투를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35년쯤 되는 세월이 프랭클린 클라크에게서 사라지고, 그는 갑자기 수줍어하는 초등학생처럼 되어 버렸다.
“그렇습니다. 그레이 양은 형님 곁에 2년 넘게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곳과 그곳 사람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1년 반이상 집을 비우고 있었고요.”
포아로는 가엾은 생각이 들었는지 화제를 바꾸었다.
“동양에 가 계셨습니까? 중국입니까?”
“네, 형님을 위해 물건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지요.”
“그거 재미있었겠습니다. 그런데 클라크 씨, 저는 당신 생각에 대찬성입니다. 어제도 저는 헤이스팅즈에게 관계자들의 단합이야말로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지요. 모든 사람의 기억을 모아 요점을 비교하는 일, 결국은 하나의 사실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찮은 이야기 속에서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니까요.”
2,3일 뒤 이 특별 수사대는 포아로의 방에 모였다.
위원회 의장처럼 테이블 윗자리에 앉은 포아로 쪽을 보며 모두들 긴장하여 앉자,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그들에 대한 첫인상을 확인하기도 하고 바로잡기도 했다.
세 아가씨들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소러 그레이의 뛰어난 아름다움, 인디언처럼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는 표정을 가진 미건 버너드의 어두운 표정, 그리고 검은 코트와 스커트에 단정히 몸을 감싼 귀엽고 총명스러운 얼굴을 한 메리 드로워.
두 남자에 대해 말한다면, 몸집이 크고 검붉은 피부에 말수가 많은 프랭클린 클라크와 말없이 조용한 도널드 프레이저는 서로 흥미있는 대조를 이루었다.
포아로는 물론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짧은 연설을 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여기에 모여 주십사 한 까닭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경찰은 온 힘을 다해 범인 수사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사건에 개인적인 이해 관계를 갖고 계신 분들 - 피해자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 의 모임은 외부 조사로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훌륭한 효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노부인과 젊은 아가씨와 나이든 신사를 숨지게 한 세 살인 사건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물이 이들을 살해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 한 인물이 다른 세 곳에서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으리라는 겁니다. 이 사나이가 꽤 심한 미치광이라는 건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겉모습이며 행동이 이 사실에 아무 암시도 주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 이 인물 - 나는 이 사나이라고 말합니다만, 남자일지도 모르고 여자일지도 모릅니다 - 은 광기가 가진 모든 악마적인 교활함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나이는 지금까지 그 행적을 감추는 데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경찰은 어떤 막연한 증거를 잡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 행동을 개시하려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막연한 것이 아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한 가지 특별한 점을 들면, 이 살인귀는 한밤중에 벡스힐에 도착해 바닷가에서 안성맞춤으로 B로 시작되는 이름의 아가씨를 찾아낸 게 아닙니다.”
“그 점을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됩니까?”
도널드 프레이저였다. 그 말은 그를 마음속의 어떤 번민으로 혼란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게 했다.
포아로는 프레이저를 보며 말했다.
“무엇이든지 그 핵심에 들어가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레이저 씨, 당신은 여기 있는 세부에 이르는 점을 생각하기 거부하고 당신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고통스럽더라도 필요하다면 사물의 밑바닥까지 파로들어가 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ABC에서 베티 버너드가 희생자로 제공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범인으로서는 깊이 잘 생각하고 난 다음에 한 선택이니 만큼 미리 계획한 바가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범행에 앞서 그곳을 살펴보았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에게는 미리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즉 앤도버에서 범행을 저지르기에 알맞은 시간, 벡스힐에서의 연출, 처스턴에서의 카마이클 클라크 경의 습관입니다. 따라서 나로서는 이 사나이의 정체를 잡아내는 데 도움이 되는 아무 증거도 없으며 아주 조그만 힌트조차도 없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억측을 합니다. 그것은 누군가, 어쩌면 여러분 모두가 자신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서로의 협력에 의해 무엇인가가 표면에 나타나 상상도 못했던 뜻을 지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도 없지만, 합하면 전체 그림의 한 부분을 뚜렷이 보여 주는 조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미건 버너드가 말했다.
“말일 뿐이에요!”
“네?”
포아로가 묻듯이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 지금 말씀하신 건 다만 말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 뜻도 없어요.”
어떤 자포자기의 어두운 정열을 담아 말했으므로 나는 그녀의 인품을 잘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말이란 사상의 겉옷에 지나지 않습니다.”
메리 드로워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뜻이 있다고 생각돼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미건 아가씨. 같은 일에 대해 몇 번이나 되풀이 이야기하는 동안 갈 길이 뚜렷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에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자기도 모르는 새 방향이 정해져 버리는 일이 흔히 있지요. 이야기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보여줘요.”
프랭클린 클라크가 말했다,
"만일 <가장 조금 이야기하는 자가 가장 빨리 고쳐진다>면 우리는 여기서 대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프레이저 씨 어떻습니까?"
"저는 오히려 당신이 말씀하는 일의 실제적인 응용이 가능할지 의문이군요, 포아로 씨."
클라크가 물었다.
"어떻소, 소러?"
"어떤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원칙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해요."
포아로가 제안했다.
"이제 됐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봐 주십시오. 여러분, 우선 클라크 씨에게 부탁할까요."
"형님이 살해된 날 아침 저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고등어를 여덟 마리쯤 잡았지요. 바다는 실로 기분 좋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렇지요, 아일랜드 식 스튜를 먹었습니다. 그 뒤 해먹에서 한숨 자고 나서 차를 마셨습니다. 편지를 두세 통 썼지만, 편지를 모아 가는 시간에 대지 못해 자동차를 타고 페인턴까지 부치러 갔었습니다. 그 뒤 어릴 때 아주 좋아했던. E.네스빗의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 전화가 걸려 와서……“
“좋습니다. 그럼, 클라크 씨. 잘 생각해 봐 주십시오. 아침에 바다로 가는 도중 누군가 만나지 않았습니까?”
“많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 뭘 기억하고 있습니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정말입니까?”
“저……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굉장히 뚱뚱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무늬있는 비단옷을 입고……어째서인지 저는 누구일까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둘 함께 있었지요. 그리고 바닷가에 폭스테리어를 데리고 나온 젊은이가 두 명 있었는데, 개에게 돈을 던져 주고 있더군요. 또 금빛 머리칼의 아가씨가 헤엄을 치며 웃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생각나는 것은 재미있군요. 마치 사진 현상처럼……”
“당신은 좋은 실험 재료입니다. 그 뒤 좀더 시간이 지나 정원에서나, 우체국으로 가는 도중에는 어땠습니까?”
“정원사가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우체국에 갔을 때 말입니까? 하마터먼 자전거를 탄 사람을 칠 뻔했습니다. 비쩍 마른 바보같은 여자였는데, 친구에게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이것이 모두일 겁니다, 아마.”
포아로는 소러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 양은?”
소러 그레이는 밝고 또렷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침에 카마이클 경과 통신물에 대한 일을 끝냈어요. 그리고 가정부를 만났지요. 오후에는 편지를 쓰고 나서 바느질을 했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늘 똑같은 날이었으니까요.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놀랍게도 포아로는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고 미건 버너드에게 말했다.
“버너드 양, 당신은 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 애가 죽기 2주일 전쯤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토요일에서 일요일에 걸쳐 집으로 돌아가 있었지요. 아주 좋은 날씨여서 우리는 헤이스팅즈의 수영장으로 헤엄치러 갔었어요.”
“그동안 주로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다른 것은? 동생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가씨는 생각해 내려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애는 돈에 쪼들린다고 했어요. 마침 모자와 여름옷을 두벌 막 사놓은 참이어서요. 그리고 도널드 이야기를 조금……그 애는 또 그 카페의 동료인 히글리 양이 싫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카페 경영자인 메리언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었지요……그 밖의 일은 그리 기억나지 않아요.”
“동생은……미안합니다, 프레이저 씨……만나기로 되어 있던 남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미건이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 않았어요.”
포아로는 네모진 턱을 한 빨강 머리 젊은이 쪽을 보며 말했다.
“프레어저 씨, 한번 과거 쪽으로 생각을 돌려봐 주십시오. 당신은 그 운명의 날 밤 카페에 갔었지요. 당신의 처음 생각으로는 거기서 베티 버너드를 기다리려고 했었습니다. 당신이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에 본 누군가를 생각해 낼 수 없겠습니까?”
“그 언저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속의 누군가를 생각해 낼 수는 없습니다.”
“실례지만, 생각해 내려고는 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정신이 혼란되어 있더라도 눈은 깨닫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보고 있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아무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포아로는 한숨을 쉬고 메리 드로워 쪽을 보았다.
“아주머니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고 있었지요?”
“네, 받고 있었어요.”
‘편지가 마지막으로 온 것은 언제입니까?“
메리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이었어요.”
“뭐라고 씌어 있었습니까?”
“늙어빠진 악마가 왔기에 따끔하게 말해서 쫓아 보냈다.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해서……그리고 수요일에 기다리고 있겠다고, 제가 쉬는 날이거든요. 영화를 보러 가자고 씌어 있었어요. 그날이 마침 제 생일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조그만 축제일 일을 생각해서이리라. 갑자기 메리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그녀는 흐느낌을 꾹 참으며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용서하세요.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울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에요. 그러나 아주머니 생각을 하면, 그리고 제 일을 생각하면……그날이 즐거웠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슬픔이 복받쳐요.”
프랭클린 클라크가 말했다.
“아가씨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언제나 조그만 일이지요. 특히 즐거운 일이라든지 선물이라든지 어떤 유쾌함 같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한 여자가 자동차에 치인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마침 새로 산 구두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녀가 쓰러져 있고, 찢어진 꾸러미에서 우스꽝스럽게 생긴 굽 높은 구두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굉장히 슬프게 보였습니다.”
갑자기 미건이 열중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에요. 무섭도록 진실이에요. 배티가 죽었을 때에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그 애에게 주려고 양말을 샀었지요. 그것은 바로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어요. 가엾게도 어머니는 좀 이상해져 버려서 그 양말을 보고 우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계속 말하고 계셨지요. ‘베티한테 주려고 샀는데……베티한테 주려고 샀는데……’라고 말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얼마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 듯이 하고는 프랭클린 클라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 사이에 급격한 연민이, 괴로움 속에서의 우애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지요.”
도널드 프레이저는 불안스러운 듯 몸을 움직거리고 있었다.
소러 그레이가 화제를 바꾸었다.
“무슨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좋을까요, 앞으로의 일을 위해?”
프랭클린 클라크는 다시 여느 때의 태도로 돌아갔다.
“물론이지요. 기회가 오면, 이 말은 네 번째 편지가 온다면 하는 뜻입니다만, 우리는 힘을 합해야만 합니다. 그때까지는 아마 저마다의 운을 시험해 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아로 씨, 조사에 무슨 도움될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포아로가 말했다.
“몇 가지 얘기해 드리지요.”
“좋습니다. 적어 두겠습니다.”
그는 노트를 펼쳤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포아로 씨, 첫째는?”
“여급사 밀러 히글리 양이 어떤 도움이 될 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프랭클린 클라크는 써 나갔다.
“첫째, 히클리 양.”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버너드 양은 공격적인 접근 방법을 쓰면 좋을 겁니다.”
미건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것이 제 성격에 맞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 아가씨와 말다툼을 해보십시오. 그녀가 동생을 좋아하지 않은 걸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생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모두 들려주는 겁니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크게 말다툼이 벌어지게 될 겁니다. 그녀는 동생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모조리 내뱉겠지요! 거기서 어떤 도움이 될만한 게 생겨날 겁니다.”
“두번째 방법은?”
“프레이저 씨, 당신은 그 아가씨에게 흥미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십시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 꼭 필요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수사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지요.”
프랭클린이 말했다.
“제가 해볼까요? 저는 저……꽤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포아로 씨, 그 아가씨한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한 번 시켜봐 주십시오.”
소러 그레이가 좀 따끔하게 말했다.
“당신이 할 일은 따로 있을 거예요.”
프랭클린의 얼굴이 좀 수그러졌다.
“그렇지요. 있겠지요.”
포아로가 말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당신이 할 일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군요. 지금으로선 그레이 양이 훨씬 더 적합할 것 같은데요.”
소러 그레이가 그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하지만 포아로 씨, 저는 이미 데븐셔를 떠났어요.”
“네? 무슨 말씀인지요?”
프랭클린이 말했다.
“그레이 양은 일의 뒤처리를 위해 내내 함께 있어 줬습니다만, 당연히 런던에서 새 직업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포아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그가 물었다.
“클라크 부인은 어떠십니까?”
나는 소러 그레이의 뺨이 살그머니 붉어지는 것을 넋잃고 바라보던 참이라 하마터면 클라크의 대답을 놓칠 뻔했다.
“꽤 나쁩니다. 그런데 포아로 씨, 데븐셔로 오셔서 형수님을 좀 만나 주실 수 없을까요? 형수님은 제가 이리로 오기 전에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야 형수님은 이틀씩이나 계속해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만, 만일 와주신다면, 물론 비용은 제가 내겠습니다.”
“좋습니다, 클라크 씨. 모레쯤 떠나면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간호사에게 연락해 두겠습니다. 그렇게하면 알맞은 자극제를 처방해 줄테니까요.”
포아로가 메리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드로워 양, 아가씨는 앤도버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을 통해 알아보십시오.”
“아이들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에게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아주머니가 사시던 마을에서 얼굴이 알려져 있지요.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가 아주머니 가게에 드나들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클라크가 물었다.
“그레이 양과 저는 무슨 일을 해야 될까요? 만일 벡스힐에 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소러 그레이가 물었다.
“포아로 씨, 세 번째 편지의 소인은 어디로 되어 있었지요.”
“프트니입니다. 아가씨.”
그녀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남서 제 15국 프트니였나요?”
“드물게도 신문이 정확하게 보도했지요.”
“그렇다면 ABC는 런던 사람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편지로 봐서는 그렇습니다.”
클라크가 말했다.
“녀석을 유인할 어떤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포아로 씨. 예를 들어 이런 광고를 내보면 어떨까요. <ABC, 급한 용건이 있음. HP가 자네를 뒤쫓고 있다. 내 침묵에 대해서 100파운드. XYZ.> 그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더라도. 하지만 아이디어는 아시겠지요? 그렇게 해서 녀석을 유인하는 겁니다.”
“그것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겠지요.”
“녀석을 유인해 놓으면 저를 쏘려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소러 그레이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런 일은 위험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해요.”
“포아로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해봐도 그리 해롭지는 않겠지요. ABC는 꽤 교활하기 때문에 걸려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만.”
포아로는 조금 미소지었다.
“클라크 씨, 이렇게 말하면 뭣합니다만, 당신은 아이 같은 기분을 지닌 분이시군요.”
프랭클린 클라크는 좀 부끄러운 듯했다. 그는 노트를 보면서 말했다.
“그럼, 일을 시작합시다. 첫째, 버너드 양은 히글리 양을 만나 본다. 둘째, 프레이저 씨는 히글리 양을 만나 본다. 셋째, 메리 양은 앤도버의 아이들을 만나 본다. 넷째, 신문광고, 모두 그리 희망적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만, 기다리는 동안에 할 일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