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요 15: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요 15: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 고데이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기리의 분리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 "성전과 돌들"의 비유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로 썼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율례들이 이제부터 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하였다.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 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형제파나 17세기의 란텔과는 그렇게 잘못 움직였다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마음에 온다는 영적 감동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