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玄海灘)에 울리는 이화중선(李花仲仙)의 설움
1.
빙하기(氷河期)가 끝나는 기원전 5500년 무렵 빙하가 녹아 에게해(Aegean Sea)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바닷물이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그때까지 담수호였던 흑해(黑海)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흑해의 높이는 지금의 3분의2 정도 였다고 한다. 물은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아래쪽의 담수와 위쪽의 바닷물이 섞이지 않았다. 지금도 흑해의 밑바닥은 단물이고 수면 쪽은 짠물이다. 성질이 다른 두 물 사이에는 교류가 없다. 그 결과 밑바닥 쪽은 산소가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고, 흑해가 검게 보이는 것도 바로 바다 깊은 곳에 있는 담수 때문이라고 한다.
현 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약 200km에 이르는 대한해협을 현해탄(玄海灘)이라고도 부른다.
이 현해탄과 관련하여 일본말(겐카이나다)을 우리의 한자어로 읽은 것으로 바른 사용법이 아니라고 하며, 또한 현해탄의 위치는 쓰시마 해역의 일부인 후쿠오카 앞바다의 오시마 섬(大島)과 그 서쪽의 이키 섬(壹岐島) 사이의 해역이라고 현재의 포털사이트는 기록하고 있다. 바로 반도조선과 열도일본의 역사고착화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38년 출판된 시인 임화(林和, 1908-1953)의 시집 현해탄을 놓고 본다면, 당시 우리나라는 현해탄이라는 말이 아주 일상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 강단에서 말하고 있는 현해탄에 대한 해석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궤변일뿐이라는 점을 간파해 낼수 있는 것이다.
현해탄(玄海灘)의 글자를 보면 검은바다여울이라고 직역할수 있다. 탄(灘)은 여울목을 말하는 것으로 넓은 강이 좁아져 사람이 건널수 있을 정도로 얕아진 곳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현해(玄海)가 되려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 교차하여 민물은 아래로 위치하고 바닷물이 위쪽으로 모여 검게 보이는 바다가 되어야 단어의 의미와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종합해 보면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이니, 바다와 같이 넓은 강의 하구쪽 즉 바다와 만나는곳이 되어야 현해(玄海)가 되는 것이고, 또한 강에서 싣고 내려오는 모래가 퇴적해 형성된 삼각주가 있어 여울목처럼 썰물 때 사람이 건너 다닐수 있을 정도로 얕아져야 탄(灘)이란 단어를 붙일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이용되었던 현해탄(玄海灘)은 이 반도가 아닌 대륙을 기준으로 볼 때 현 남경위쪽에 위치했던 부산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와 하구쪽의 대마도(對馬島-현 숭명도)를 지나게 되는데, 이 하구는 황해의 바닷물과 멀리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장강의 거대한 담수 물줄기가 맞닿는 곳이 된다. 이치상으로 물빛이 검게 보여야 정상인 것이고 이러한 상황을 보고 우리 선조들이 현해탄(玄海灘)이란 말을 만들었음을 유추해 낼수 있는 것이다.
현해탄(玄海灘)은 바로 조선사오천년의 장강(長江)하구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이화중선(李花仲仙,1898∼1943)은 부산(釜山)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의 여류명창 즉 국창(國唱)으로 알려진 사람으로 본명은 이봉학(李鳳鶴)이다.
부산, 동래, 전북 남원, 전남 벌교 등이 그의 출생지로 거론되었으며, 최근에는 그의 두 번째 남편인 이재삼의 호적에 의거해, 이화중선이 전남 목포시 남교동 12번지에서 태어났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주소지는 목포권번이 있던 자리로, 그의 부모가 목포권번을 근거지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판소리 명창인 이중선(李中仙, 1903-1935), 판소리 고수인 이화성(李化成)과 남매간이다.
13세(1911)에 남원으로 이주하면서 남원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판소리를 배웠다. 이때 수지면 박씨 문중의 박해창(朴海昌, 1876-1933)이 그의 머리를 올려주었는데, 이 일이 그가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한 것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14-15세 무렵 권번 소리선생의 소개로 장득진(張得眞, 1884-1928)을 만났고, 17세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하고자 장득진의 고향인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해 약 5년간 수련했다. 장자백(張子伯, ?-1907)에게 소리를 배운 장씨 일가에서 〈춘향가〉 한 바탕을 학습한 것이다.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해 이동백(李東伯, 1866-1949), 송만갑(宋萬甲, 1865-1939) 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이화중선의 장기는 「심청가」 중에서 ‘추월만정(秋月滿庭)’,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였다고 전한다.
이화중선은 23세에 상경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26세에 조선물산장려회 주최의 전국명창대회에서 〈심청가〉의 '추월만정'을 불러 이름을 널리 알렸다. 36세에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수많은 공연을 하고 음반을 발매했다. 그는 임방울(林芳蔚, 1904-1961)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음반을 녹음한 명창으로 꼽히기도 한다.
일제감정기의 유명 가수였던 이화중선(李花仲仙)에 대해 미당(未堂)서정주 시인은 시를 지어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추모하고 있다.
바위옷
-미당 서정주-
日政의 植民地 朝鮮半島에 생겨나서,
妓生이 되어서, 남의 세째 妾쯤 되어서,
목매달아서 그 모가지의 노래를 하늘에 담아 버린
二十世紀의 우리 女子 國唱 李花中仙.
안개 짙은 겨울날 바위옷 푸르른 걸
보고 있으면
거기 문득 그네의 노래 소리 들린다.
하늘도 하늘도 햇볕도 못 가는 아주 먼 하늘에 가 담겨 오그리고 있다가
추운 안개를 비집고 다시 우리 半島의
바위옷에 와 울리는
하늘 아래선 제일로 서러웠던 노래 소리를…….
이화중선의 죽음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일본의 탄광을 돌며 조선인을 위문공연하고 절망으로 연락선서 투신자살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녀가 죽음을 택했을때의 연락선이라 하면 현 반도와 열도를 이동하는 연락선이었을 것이니 지명이동된 현해탄에서의 슬픔이었으리라.
2020.08.13.송계(松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