栗谷 李珥의 생애와 사상
율곡은 (1536년~1584)은 조선 중종 31년에 외가인 강릉 북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말을 배우면서 책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이면서 무엇같이 보이느냐고 묻자, "석류껍질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졌다"라고 詩句로 답했다거나 열 살도 되기 전에 詩文을 짓고 인물의 됨됨이까지
알아보았다는 몇몇 일화는 그가 영특한 자질을 타고 났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9세에 생원시, 명경과에 장원을 하기까지 약관 이후
에만 아홉 번이나 장원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영재인지를 보여준다.
16세에 사춘기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喪을 당하여 아버지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1년 상복을 입은뒤 심상(心喪)으로 삼년상을 입었다.
심상이란 실제 상복을 입지는 않지만 모든 기거와 동작을 상복을 입은 것과 똑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
18세에 관례를 올리고 19세에 강원도 금강산에 입산하여 1년 가까이 불교에서
놀다가 불교는 세간을 초월할 뿐이지만 유교는 세간을 초월한 본체의 세계를 제시
하면서도 그 본체의 세계를 이 세상 밖에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설정하고
있음을 깨닫고 유교야말로 實學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20세에 노씨와 결혼하고 23세에 예안에 들러 퇴계 이황을 만나보았다.
며칠 묵으면서 이황과 학문을 토론하고 뒤로는 편지로 학문을 논했다.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28세에 상복을 벗었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49세에 병석에 누어 죽기 직전까지 출사와 사직을 번갈아하면서 내직과 외직의
중요한 직책을 거쳤다.
32세가 되던 해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했다.
이듬 해 이황에게 편지하여 새로 즉위한 왕을 돕도록 나오라고 권했다.
34세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올리고 封事를 올려서 시무를 논했다.
35세에 이황에게 편지를 올려 성학십도"에 관해 논했고 그해 12월에 이황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만들어 곡哭을 했다.
42세에 격명요결(擊蒙要訣)을 완성했다.향악을 결성하고 사창(社倉)을 세우는
일을 논의했다.
43세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朱子祠를 세워 조광조와 이황을 배향했다
한글로 高山九谷歌를 지었다.
44세에 소학집주(小學集註)와 사서언해(四書諺解)를 완성했다.
46세에 조광조와 이황의 문묘종사를 청했고 대학보유의(大學補遺議)를 지었다.
47세에 당시의 폐단을 진술하는 봉사를 올리고 12월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사직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48세에 時務를 올리고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다가 어지럼증으로 병조에
누운 일로 삼사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갔다.
49세에 서울 대사동 집에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 (紫雲山)에 묻혔다.
1611년에 (문집)이 간행되었다.
1624년에 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681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율곡은 경연에서 선조를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교육시키려고 노력했다.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비롯한 수많은 상소와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통해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제시하면서 국가의 更張과 개혁을 역설했다.
또한 우계 성혼과 함께 (사단칠정논변. 四端七情論辯)을 벌리면서 奇大升의
기발설을 수정하고 계승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확립하여
조선성리학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관료사회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동서붕당을 화합시키려고 동분서주했다.
율곡은 이황과 함께 조선유학의 쌍벽으로서 성리학의 이론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학문과 이념을 현실정치에 실현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일생을 바쳤다.
율곡은 한국문화사에서 그야말로 이론과 실천을 자신의 삶에서 거의 완전히
조화시킨 보기 드문 인물이라 하겠다.
율곡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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