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8.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9장 9~13절
예수님의 사람 이해
■ 도수 있는 안경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시력이 떨어진 분들을 위해서입니다. 먼 곳이 잘 안 보이는 사람에게, 먼 곳을 잘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저같이 가까운 곳이 잘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가까운 곳을 잘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도수 있는 안경은, 시력이 떨어져서 일으킬 수 있는 실수나 잘못의 가능성을 줄여줍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에도 믿음의 안경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기본적으로 시력이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안경을 착용해야 세상과 사람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영적 흐름을 바르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안경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는 사태/사건들이 난무합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착용해야 할 믿음의 안경은 예수님의 안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안경이 가장 정확한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입장과 신약의 입장이 차이 나는 것처럼 보일 때, 이를 최종 안내하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율법은 복음으로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 복음이 최종적인 답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시각/관점이 예수님의 안경에 의해 어떻게 교정되고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람 이해에 대해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선택한 본문은 마태복음 9장입니다만,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같은데,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에 서는 복음서에 따라 더 설명하는 곳과 덜 설명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9장이지만,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서 보충하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셨는데, 예수님을 보고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신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던 중에 마태라고도 하고 레위라고도 하는 세관원(세리)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만나셨다기보다는 세관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그냥 지나치실 수도 있으셨는데,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과연 그의 무엇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민족의 피를 빼먹는 그 세관원(세리)의 인생이 불쌍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있지만, 더러운 직업이라느니, 민족의 반역자라느니, 하는 등의 말을 듣는 무시당하는 인생을 사는 그의 쓸쓸함을 보셨던 것입니다. 이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순종했습니다. 마치 이 부르심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는 이 초대의 자리에 자신과 함께 일하는 세관원들과 죄인들을 함께 초대했습니다.
세금 문제 외에는 누구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챙겨주시는 분을 만났으니, 자신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 이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가 초대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그와 가까이하는 사람들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세관원들이었고, 죄인들이었습니다. 부자이지만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는 세관원이었고, 사람 취급 못 받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사람대접 해주시는 예수님이셨으니 이 식사 자리는 무척 화기애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사달이 났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시비가 들어왔습니다. 11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어찌하여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하시느냐, 그것도 밥을 같이 드시느냐는 시비였습니다.
이들이 시비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단 한 방에 이 시비를 제압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이들은 병든 자들이므로 의사인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13절 말씀으로 더 이상의 시비를 종결시키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더 이상의 시비를 종결시키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규칙-율법으로서의 제사가 아니라 “긍휼”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은 하나의 진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긍휼”로 모두를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저놈, 죄인이군. 잡아서 혼 좀 내야지.’가 아니라, ‘아이고, 내가 아니면 누가 챙기겠나?’라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가엾게 여겨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흠 있고 부족한 사람을 규율이라는 도덕적 잣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불쌍한 마음으로 품어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긍휼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시기에, 긍휼을 우리의 마음에 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이고, 이를 나타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시선이시기에, 긍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신앙이고, 이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고, 우리의 시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의인만 찾고, 우리의 시선은 제사라는 율법과 규칙만을 추구할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긍휼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에서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정리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그 어떤 완벽이나 완전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무흠과 순결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누구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긍휼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에 대해, 아내는 남편에 대해 가져야 할 마음이고 시각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고 시각입니다. 내가 너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고 시각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내가 모든 피조물에게 가져야 할 마음이고 시각입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죄인들이 벌인 사건들입니다. 그 어떤 정치인도, 그 어떤 경제전문가도, 그 어떤 학자도 불완전하고 부족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혹시 그녀나 그에게 어떤 완벽함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오판한 것입니다. 그녀나 그는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실망을 누적시킬 뿐입니다. 실망의 누적은 절망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인이든 경제전문가이든 그녀를/그를 붙잡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만이 바른 신앙이고, 이 신앙에 기대어 사는 것이 옳은 신앙생활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완악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던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시비를 걸어야 합니다. ‘당신은 의인인가, 죄인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늘 나에게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이렇게 이 질문의 일차적 의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한계적 존재요, 부족함의 극치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의인의 삶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불러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삶을 부단히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이지만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모두 죄인이다. 긍휼히 여겨라. 그러나 의를 추구하라.”
분명 우리 모두는 죄 가운데 한계와 부족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긍휼의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교만함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하나님의 정의가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부연하고픈 말이 많지만, 오늘의 메시지로 대신하겠습니다. “모두 죄인이다. 긍휼히 여겨라. 그러나 의를 추구하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