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연해주(沿海州) 고려인 강제이주
1.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겪은 수난은 수없이 많지만 고려 아리랑의 탄생 유래를 살펴보면서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잊혀지는 것 같은 아쉬움에 잠시 연해주 고려인 강제이주를 되짚어 보기로 한다.
연해주(沿海州)는 러시아 극동변경(邊境)으로 두만강과 접경지역인데 지금은 러시아 땅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전에 해동성국(海東盛國), 우리 민족이 건국하였던 발해(渤海)의 땅이다.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인 일제강점기(1910~1945)가 되자 사람들은 일제(日帝)의 강압을 벗어나고자 이곳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로 이주하게 되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이 세웠던 발해(渤海) 땅이니 우리 땅이라는 인식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압록강 건너 간도(間島)도 같은 맥락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성계가 고려조(高麗朝)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개국(1392)하는데 고려에 충절을 바치던 사람들이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이성계의 정권찬탈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앙금이 남았는지 자신들을 조선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인(高麗人)이라 칭했다.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强制移住)당한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조선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인(高麗人)이라 자칭한다.
강제이주 경로 / 이주 초기 움막집 / 홍범도 장군
2. 연해주(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1837년, 스스로들을 ‘고려사람(高麗人)’이라 부르며 연해주 한복판에 ‘신한촌(新韓村)’을 건설한 사람들은 일편단심 고려에 충성을 바치다가 결국 선죽교(善竹橋)에서 죽음을 맞은 정몽주(鄭夢周)처럼 당시 조선의 정권에 불만이 있었거나, 가난을 벗어나고자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국력을 키운 일본이 대륙진출을 꿈꾸며 가까운 우리나라부터 압력을 넣기 시작하자
일제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수난을 피해서 또다시 이곳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러다 보니 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인들보다 한인(高麗人)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한일합방(韓日合邦) 전(前)해인 1909년, 일제의 횡포에 항거하여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저격계획을 수립한 곳도 이곳 연해주였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성공하지만 결국 1910년 8월 22일에 한일합방 조약이 통과되고 8월 29일부터 발효되며 우리 민족은 36년간에 걸친 수모(受侮)와 수난(受難)이 시작된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되자 이주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대부분 일제에 항거하던 독립투사들과 그 가족들이 주류였다고 한다. 그러다 1920년, 러시아 혁명혼란기를 틈타 일본군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을 습격하여 300여 명을 살해하는데 이것을 일러 ‘4월의 참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합병(合倂)한 일본은 나아가 중국과 소련 등 대륙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게 되는데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이며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에 강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조선인은 일본의 앞잡이다.’, ‘일본 간첩이다.’, ‘독립운동으로 일본을 자극하여 소련(연해주)으로 쳐들어 올 빌미를 준다.’ 등의 구실을 내세워 강제이주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 결정으로 또다시 우리 민족은 비극을 맞게 되는데, 훗날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으로 우리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6.25) 속으로 몰아넣는 장본인이 되는.... 우리 민족의 원수다.
3. 고려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强制移住)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 고려인들은 만리타향 중앙아시아로 내몰리게 되는데 지금은 독립 국가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가 당시는 소련의 영토였다가 1991년 독립한 곳이다.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 17만여 명은 느닷없이 머나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는데 두만강(豆滿江) 접경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라즈돌노예(Razdolnoye) 역에서 출발(1937년 9월)하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우슈토베(Ushtobe) 역에 내린 것이 10월이었다니 꼬박 한 달간의 강행군으로 거리는 약 6.500km(만 6천 여리)이고, 이후 열차에 따라 30~40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광활(廣闊)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는 모두 화물칸과 가축운반 칸만 있는 화물열차로 문을 널빤지로 막아 ‘검은 상자’라 했다는데 제대로 짐을 꾸릴 시간도 없이 갑자기 강제 소집하여 출발하는 바람에 조선인 마을은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독재자 스탈린은 국가도 없는 민족이라고 무시하여 강제이주 직전 우리 독립투사들을 체포하여 ‘일본간첩’, ‘반 혁명자들’이라는 죄목으로 2,500여 명을 총살하거나 투옥했다고 한다.
약 두 달 동안, 고려인을 실어 나른 열차는 총 124편, 각 열차마다 50량(輛)이었고 이동 중 사망자만 554명이며 이동 전후를 합치면 이 강제이주 정책으로 숨진 사람만 모두 2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행 중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제와 싸워 대승을 거둔 홍범도(洪範圖) 장군도 있었다고 하는데 카자흐스탄에서 1943년에 생을 마감하여 그곳에 모셔져 있던 것을 금 년 광복절(2021. 8. 15.)에 우리나라로 유해(遺骸)를 모셔와 대전(大田) 현충원(顯忠院)에 모셨다고 한다.
4. 고려인들의 강한 생명력
초기 강제이주자들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가 신흥 공업도시로 노동자가 필요해서 이주시켰다고 하지만 기거할 주택을 마련해 주지 않아 불모지 허허벌판에 땅굴을 파거나 움막을 짓고 기거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즈베키스탄에 7만 명, 카자흐스탄에 9만 명 및 기타지역에 분산 배치했는데 이후로도 계속 중앙아시아 이곳저곳으로 다시 이주를 시키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고려인들은 불모지 개간, 벼농사, 목화재배 등,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는데 1983년 통계에 의하면 소련 전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생산량이 300만 톤 정도인데 그중 고려인들 거주지인 카자흐스탄에서 90만 톤, 우즈베키스탄에서 50만 톤을 생산했다고 하니 거의 절반을 고려인들이 생산한 셈이다. 또 이 지역에 사는 민족 중 유태인은 젊은이들 대학 진학률이 90%를 넘는다고 자랑했는데 현재 우리 고려인들의 대학 진학률은 99%라고 한다.
그렇게 국가가 없는 떠돌이 민족이라고 홀대를 받던 고려인들이었지만 지금은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정계와 재계는 물론 예술계 및 다양한 장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은 물론, 단군 자손의 저력(底力)이라고 할 것이다.
고려 아리랑은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권익을 위해 물심양면 힘써오던 우리나라에서 파견한 손치근 알마티 총영사의 제안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작사(作詞)는 25년 동안 카자흐스탄에서 한글교육과 문예활동을 하였던 전남 신안(新安) 출신의 시인 황병학이 썼고 곡을 정리한 사람은 현지 고려인인 한 야꼬브라고 한다.
<고려아리랑> 작사: 김병학, 작곡: 고려인 한야꼬브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아리랑 고려 아리랑
원동땅 불술기에 실려서 / 카작스탄 중아시아 러시아 /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도 / 우리는 한가족 고려사람
진펄도 갈밭도 소금밭도 / 땀 흘려 일구니 푸른 옥토 / 모진 고난 이기고 일어서니 / 우리는 한민족 고려사람
아버님 남기신 선조의 얼 / 어머님 물려준 조상의 말 / 가꾸고 다듬고 지키리라 / 우리는 한겨레 고려사람
*원동(遠東)땅: 연해주(沿海州)를 일컬음 *불술기: 기차(함경도 방언)
*진펄: 물을 머금어 질퍽한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