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과 2009년에 US 오픈이 열렸고, 내년에는 PGA 챔피언십이 개최되는, 그 유명한 베스페이지 블랙에서 내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여기는 어렵기로 유명한 코스지만 퍼블릭임에도 부킹이 힘든 것으로도 둘째가라면 서운해하는 곳이다. 보통 티타임을 얻기 위해서 새벽부터 (성수기에는 전날 저녁부터) 줄을 서야하며, 최근에는 온라인 부킹도 가능해졌으나 그마저도 (뉴욕 주민이 우선이기에)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나는 어차피 혼자 가는 것이므로 무작정 가서 기다려보다가 자리가 나면 칠 생각을 했는데 여기 Bethpage 주립공원에는 Black 코스 말고도 18홀 코스가 네개나 더 있으니까 정 안되면 다른 코스라도 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내가 공원 사무소에 (일반적인 골프장 프로샵이 아니라 외부나 내부 모두 정말로 어디 관공서처럼 생겼다) 도착한 것이 오후 1시경이었고, 바글바글 붐비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문의하니 오후 2시에 한 자리가 빈다고 한다. 보나마나 느려터질 라운드라 일몰이 좀 걱정이었으나 운이 좋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실은 이날도 일찍 일어나서 어디 인근에서라도 18홀을 돌까 생각했었지만 사흘간 매일 54홀씩을 걸어서 다녔더니 발에 물집이 잡혀서 그냥 늦잠자고 쉬기로 했다.
위에서 적었듯이 Bethpage 주립공원에는 총 5개의 18홀 코스가 있고, 그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Black 코스는 A. W. Tillinghast가 설계한 골프장들 중에서 최고로 쳐주는 곳이다. 원래의 개장년도는 1935년이었고, 2002년 US 오픈을 치르기 위해 Rees Jones가 리노베이션을 했으며 (아마도 더 어렵게?), 2009년도 두번째 US 오픈을 위해서도 다시 코스를 고쳤다는데 이 역시 Rees Jones와 Greg Muirhead가 담당했다. 뉴욕 주민이 아니라면 평일에 130불을 내며, 카트를 탈 수 없는 워킹 코스라서 따로 들어가는 돈은 없다. 기대에 차서 주변을 둘러보니 Black 다음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코스는 Blue와 Red 코스인 모양인데 카운터의 모니터에 현재 비어있는 티타임이 나오는 것을 보니 (Black 코스 이외에는) 생각보다 널럴해서 언제 다시 여기에 와본다면 2-3일 정도를 투자해서 5개 코스를 다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메이저 대회를 유치하는 유명한 퍼블릭으로 서부에는 Torrey Pines와 Pebble Beach가 있고, 시카고에는 Cog Hill 등이 있다. 돈만 내면 어떻게든 칠 수 있는 골프장들이기 때문에 조만간 나도 가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관공서 분위기라고 했는데 정말로 줄을 서서 (마치 과태료를 내러온 심정으로) 그린피를 지불하니 어디 놀이공원에 온 마냥 손목에 띠를 둘러준다. 돈을 받는 아줌마나 입구의 경찰관이나 다 무뚝뚝해보이는데 아무튼 그들은 골프장 프로나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정말로 뉴욕주 공무원들이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1번 홀로 가니 스타터 아저씨가 (이 사람도 공무원) 4인을 조인시켜주면서 주의사항을 말해주는데 요지는 이렇다. 여기는 무지무지 어려운 코스니까 웬만하면 레귤라티에서 치시고 (거기서도 슬로프가 145에 코스레이팅은 74였다), 공이 죽으면 고민하지 말고 새 공을 꺼내서 치라는 식이다. 앞의 팀이 티샷하는 것을 보자니 다들 프로들인가 싶게 멀리 쳐서 나는 주눅이 살짝 들었다. 물론 나는 말대로 화이트티로 갔지만 프로들의 무대를 제대로 즐겨보겠다는 동반자 3명은 빽티에서 친다 (그리고 18홀 내내 퍼덕거리며 제대로 고생하더라). 내 경우에는 괜히 힘이 들어가고 긴장되는 첫번째 티샷이 잘 맞았고, 목표한 바와 같이 천천히 또박또박 전진. 쓰리온 쓰리펏을 목표로 하니까 처음 몇 홀에서는 성공했지만 이후의 스코어카드에는 트리플과 양파가 적혀간다.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고, 어떤 곳으로 공을 보내더라도 다음 샷이 편안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그렉에 그린이 보이지도 않는 업힐 라이가 많았는데 저 너머에 도대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짐작도 하기 어려웠으며, 막상 잘 쳐놓고 가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깊은 러프나 벙커가 도사리고 있다. 투어 시즌이 아닌데도 페스큐 러프는 도저히 탈출이 불가능할 정도라서 그쪽에 들어가느니 벙커샷이 차라리 나았다. 비교적 평평하지만 커다랗고 엄청나게 빠른 그린에서도 쓰리펏은 기본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1번 홀이 (돌이켜보면 가장 쉬웠던 홀이다) 아마도 나중까지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럭저럭 쓰리온해서 쓰리펏으로 더블보기를 했는데 첫 홀임을 감안하면 나쁜 결과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똑바로, 멀리 티샷을 보냈다. 1번 홀이 끝나면 찻길을 건너야하는데 2번으로 가는 길은 터널이지만 나중에 14번을 끝나고 다시 돌아오려면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무단횡단해야한다. 잔디의 관리상태나 경치는 어느 홀이나 다 최고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또는 최악의) 경험은 4번 홀이었는데 파 5였지만 티에서 그린까지가 3단으로 층이 나뉘어져있고, 지그재그로 공을 보내야하는데 좋은 위치 근방에는 어김없이 엄청난 벙커군이 자리잡고 있어서 뭐랄까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서 매 샷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5번도 더블 도그렉인데 커다란 페어웨이 벙커를 넘어가게끔 (그러려면 생애 최고의 티샷이 나와야 가능) 쳐야만 그린이 간신히 보인다. 코스 입구에 붙은 표지판의 문구 그대로 하이핸디캡 골퍼는 아예 살아남을 길이 전혀 없을 디자인이었다. 이렇게 두 홀을 지나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말이 없어진다. 행복과 비참함이 섞여 뭐라 표현하기 힘든 심정으로 남은 홀들을 돌았다. 초반에 이정도는 우리나라 골프장들도 어렵잖아? 했던 자만심은 15번부터 이어지는, 아마추어라면 도저히 보기도 어려울 홀들에서 무너져간다. 조만간 2009년 US 오픈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볼 생각인데 15번부터 18번까지 과연 프로들은 어떻게 공략할런지 (진정 심각하게) 궁금해서 그런다. 비록 힘들었어도 일몰에 반짝이는 클럽하우스를 바라보며 치는 18번 홀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나랑 조인한 셋중에 둘은 고교 시절까지 골프팀에 있었다는데 처음 몇홀은 파를 잡는가 싶더니 결국 나랑 비슷한 스코어를 만들었고, 다른 한 아저씨는 시작한지 일년이라고 하던데 혹시나 이제 골프를 접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2009년의 US 오픈에서 루카스 글로버가 마지막 날에 73타를 치고도 2타차 우승했던 코스다왔는데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게 느껴졌으니 나는 백돌이 골프를 쳤어도 아쉽지는 않았다. 그보다 지난주에 라이더컵 경기를 보았는데 2024년에는 여기서 열릴 예정이라니까 또박또박 잘치는 유럽 선수들이라면 Bethpage Black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궁금해졌는데 프로들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내 느낌에 이 코스는 무조건 투온 아니면 양파가 된다.
숙소가 보스턴 인근이었으므로 체크아웃하고 네시간을 운전해서 여기서 골프치고 했더니 이미 해가 져버린 어둠이었다. 골프장에 샤워시설이 있긴 한데 따로 돈을 내야한다. 나는 자정에 떠나는 뉴욕발 대한항공을 탈 예정이므로 온전히 하루를 Bethpage Black 코스에 바친 셈인데 버킷리스트의 한 페이지를 채웠으니 후회는 없다. 여기가 내가 가본 최고의 골프장은 아니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곳이고, PGA 투어에서 칭송받는 목적지라는 것은 대충 이해가 된다. 경험상 투어가 열리는 코스보다 그 근방의 좀 떨어지는 골프장이 더 기억에 남은 일이 많았다. 물론 라운드를 마치고 홀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생생하니까 여기는 좋은 코스가 맞다. 그리고 이 어려운 코스에서 무사히 18홀을 마친 (혹은 살아남은) 나 자신이 대견했다. 저녁을 먹고, 렌트카를 반납하고, JFK 공항의 라운지에서 샤워를 마쳤더니 죽을만큼 피곤하지만 열몇시간의 꿀잠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