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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0일(주일) 주일설교 마태복음 26:1~16 '살리는 의논을 하려면'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사람은 살아가면서 무언가 계속 의논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복음의 핵심되시는 예수님을 모르면 결국 자기 이익에 따라 의논하고 결정하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의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팔릴 것이라고 이르실 때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고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나아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 때 재정을 담당하는 12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기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유대의 종교지도자은 흉계로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의논을 하고 가룟유다도 예수를 팔아넘기려는 죽이는 의논을 하는 반면에, 한 여인은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며 예수의 머리에 매우 위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붓는 살리는 의논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죽이는 의논이 아닌, 살리는 의논과 행동을 하기를 원합니다.
살리는 의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함께 은혜 나누며 주님주시는 음성듣고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살리는 의논을 하려면? 예수님처럼 자신은 죽고 남은 살리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1~5절).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 분을 따라가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하심을 잘 배우고 본받아 그 분의 길로 따라가는 길이 지혜로운 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나는 죽고 너희는 사는 적용’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주 작은 밀알이지만 땅에 심겨져 겉을 싸고 있는 껍질이 썩으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의 눈이 밖으로 나와 싹을 틔우고 크게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담겨 있는 밀알이라도 땅에 심기우지 않으면 싹을 낼 수도 없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도 땅에 심겨지지 않은 밀알은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자신의 죽음’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보좌에 앉아 계실 때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 안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땅에 떨어져 죽으신 한 알의 밀알이 되자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의 씨앗’이 이 땅에 생명없이 살면서 아무 소망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매로 맺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는 자마다 새 생명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새 생명은 사람들 안에 있는 ‘불안’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마귀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죽으신 한 알의 밀알이심이 전해지고 그 기쁜 소식을 듣고 또 다시 많은 열매가 맺혀집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젠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열매가 많이 확산되는 길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외는 없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5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님은 생명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기를 포기하셨고, 자기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편안함과 부유함, 그리고 명예도 포기하셨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높여주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한 회사에서 사원을 뽑으며 입사 시험 문제를 냈습니다.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밤길에 당신은 차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시 바삐 병원에 가야 살 수 있는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차에는 단 한 명만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2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이 무엇이었을까요?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전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요."
이처럼 내 것이라는 것에 매여 집착을 포기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크게 생각할 때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예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인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려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대로 복음 전하는 사명을 계속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반면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라고 하는 욕심에 집착해서 걸림돌이 되는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는 의논합니다. 3~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아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기에 유월절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명절에는 민란이 일어날까 봐 그날을 피해 예수를 죽이고자 합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옳고 그름의 문제로 싸우는 것이 바로 자신은 살고 상대방을 죽이려는 의논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죽고 너희는 살기로’ 결정하셨지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우리는 살고 너는 죽자’로 결정한 것입니다.
적용) 나는 맞고 남이 틀렸다며 다른 사람을 죽이려 의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의논을 합니까? 사람을 죽이는 의논을 합니까?
둘째로 살리는 의논을 하려면? 향유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적용을 해야 합니다(6~13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때 주께 의외의 헌신을 하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나아와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 향유의 값어치는 노동자 1년치 품삯과 같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그녀가 옥합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향유를 조금 붓고 옥합을 다시 가져간 것이 아니라 아예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자신의 귀한 것을 내놓았을까요? 그녀는 주님을 만나서 영육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까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곧 주님이 돌아가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장례 준비를 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이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며 여자의 헌신을 깍아내리고만 있습니다(8절). 이처럼 마리아의 헌신은 살리는 의논이고, 마리아의 헌신을 깎아내리고 무참히 짓밟는 행동은 죽이는 의논입니다. 이처럼 예수께 헌신하는 살리는 의논은 때로는 고독하고 모두가 칭찬하는 길은 아닌 좁은 문이요, 좁고 협착한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하나님이 진실로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를 통틀어 마리아만큼 의미있는 헌신을 했던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예수님의 장례를 예견하고 의미있는 행동을 한 사람은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외에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을 반대만 했을 뿐 아무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향유 드림이 더 빛이 나고 예수님께서도 그녀를 칭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리아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그녀와 같은 헌신이 이후에도 교회역사에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심이 아닐까요? 돈만 보았던 제자들과 달리 복음을 보았던 마리아의 신앙을 교회가 본받기를 기대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도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가 지금까지 가장 잘한 헌신은 바로 화재로 폐허가 된 함평 진양교회의 소식을 듣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연말까지 나가야 할 형편 속에서도 그동안 쌈지헌금으로 모아둔 성전대지헌금 794만원 전액을 함평 진양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린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열두광주리 헌금을 진행하면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저도 목요일 새벽에 감동 주신 대로 직장 퇴근후 교회에 들려서 30분간 기도하고 가기로 결심하고 순종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열두광주리 헌금이 다 찰 때까지 그렇게 할려고 합니다. 이것이 나름대로 제 개인적으로는 살리는 의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도 매월 정액 헌금을 하지만, 내주 만원씩이라도 열두광주리 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1년이면 52만원은 되겠죠~ 이 모든 것이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헌신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겠지만, 저는 우리가 처한 환경속에서, 즉 헌신할 수 있는 이런 조건속에서 살리는 의논을 하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향유옥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이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열두광주리 프로젝트 속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좇아 살리는 의논과 적용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내가 우리 교회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내가 주께 드리고 싶은 헌신은 무엇입니까?(7~8절)
셋째로 살리는 의논을 할려면? 돈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14~16절)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무리에게 예수님을 넘겨줍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에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마리아를 비난한 사람들을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데요,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사람을 ‘가룟유다’라고 콕 찍어 지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요12: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이 가룟유다는 제자들의 재정을 관리하는 총무였는데 공금을 조금씩 횡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룟유다는 돈 욕심 때문에 마리아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가룟 출신으로 돈궤를 맡은 자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정당성에 목을 매다보니 사탄이 틈을 타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스승인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팝니다. 물론 외적으로는 선한 의도로 가장하지만 그 뒤에는 돈에 대한 탐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가룟유다처럼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해서 의로운 인생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람들로부터 배척받고 고독한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디모데전서 6:10 KRV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말씀합니다. 가룟유다는 돈을 사랑하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죽이는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갸롯유다는 앞서 9절에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번지르르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은 삼십(34만원 정도)에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 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26:24, 눅23장, 요한복음 12장). 돈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죽이는 의논을 한 가룟유다 그의 삶의 결론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적용) 내가 가룟유다처럼 선한 의도로 위장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지 않도록 회개하고 기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의논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살리는 의논을 한 마리아와 돈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은 30에 넘긴 죽이는 의논을 한 가룟유다를 바라보면서,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께 칭찬받았고, 유다는 돈을 사랑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비참한 삶의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의논과 결정과 그로 인한 행동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데,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여 살리는 의논을 하며, 살리는 결정을 하고, 살리는 행동을 통해 한 영혼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몸된 교회를 살리는 적용을 하시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