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 영화> 피아니스트
절망 이겨낸 희망 삶은, 이토록 위대하다
제2차 세계대전서 살아남은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실화
이데올로기 아닌 음악과 전쟁·예술가와 군인 주제 다뤄
배우 브로디의 절제된 연기 일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감독: 로만 폴란스키 / 출연: 애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취만, 프랭크 핀레이
독일장교 호젠펠트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스필만
|
‘유비무환’. 국가의 방어를 말할 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선제적 준비가 혹 닥칠지도 모르는 위협을 미연에 방지한다. 25일까지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을지연습도 마찬가지다. 막강한 군의 방어력을 토대로 적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유비무환’의 훈련이 49회째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참화는 막강한 군사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막을 수 있다. 그간 영화는 전쟁의 잔혹함을 다루면서, 역설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도입부. 음악이 흐르는 평화로운 일상이 폭발음으로 한순간에 깨지는 반전은 바로 그 참상을 드러낸다. 에보니 앤 아이보리(Ebony And Ivory).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한다. 쇼팽의 ‘야상곡’. 카메라는 연주에 온전히 몰입한 한 남자의 표정을 찾아낸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건물 창문이 포탄 파편으로 무너진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치는 유대인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은 가족과 화목한 나날을 보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소개령에 따라 유대인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어느 날, 스필만은 피아니스트라는 이유로 홀로코스트의 위기를 피한다.
폐허가 된 건물 여기저기서 숨어 지내던 스필만은 한 독일군 장교를 만난다. 이 장교는 피아니스트라는 스필만의 말에 연주를 명령한다. 스필만은 두려움에 떨며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린다.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연주에 몰입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장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스필만에게 용기를 준다.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물러나고 자유를 찾은 스필만은 다시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친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그 독일 장교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독일 장교 호젠펠트는 러시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죽었다고 영화 자막은 말한다.
폐허가 된 도시에 절망하는 스필만
|
애드리언 브로디는 절제된 연기로 타인의 배려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한 도망자를 표현했다. 가늘고 긴 얼굴은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남자의 모습을, 무표정하지만 생명을 갈구하는 눈빛은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피아니스트의 아픔을 그렸다. 폴란스키 감독은 영국에서 주인공을 찾지 못해 미국까지 영역을 넓힌 끝에 브로디를 발탁했다. 브로디는 이 작품으로 제75회 아카데미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살아남아 88세로 생을 마친 국영 라디오 방송국 소속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처럼 독일군 장교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스필만은 회고록 ‘죽음의 도시’를 내놓고 이를 알렸다.
이 영화는 음악을 소재로 하지만 희망을 찾아가는 인간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필만은 독일군 장교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음악으로 독일군 장교의 인간성을 치유한 것은 아닐까?
음악과 전쟁, 인간과 괴물, 그리고 예술가와 군인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영화다. 이데올로기와 사상을 다룬 영화는 아니다. 전쟁 중에 피아노를 치게 된 사람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피아니스트를 통해 음악의 힘이 무엇인지 가늠케 한다.
영화 속에는 음악이 주는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독일인 부부의 도움으로 은신하는 스필만은, 옆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미소 짓는다. 피아노 앞에 앉지만 연주할 순 없다. 대신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누른다. 마치 영화에서 처음 연주하던 쇼팽의 야상곡처럼.
<고규대 영화평론가>
추억의 영화 음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