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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파는 가게》
19부 — 사라진 작가
봄이 왔다.
별일 없이 왔다.
꽃이 피었고,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저녁은 조금씩 길어졌고, 헌책방 앞 골목에도 늦은 햇빛이 오래 머물렀다.
문태경은 이런 계절이 좋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계절.
그날도 평범했다.
오후 네 시쯤 한 여자가 헌책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서 오세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순쯤 되어 보였다. 회색 코트에 검은 운동화.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책을 찾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책장은 보지도 않고 곧장 문태경 앞으로 왔다.
“문태경 씨죠?”
문태경의 손이 멈췄다.
“네.”
“박지은 작가를 아십니까?”
“압니다.”
여자가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 사람입니까?”
문태경은 사진을 보았다.
박지은이었다.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진 속 박지은은 지금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백발.
깊어진 주름.
하지만 눈빛은 같았다.
사진 아래 날짜가 있었다.
2049년 11월 17일.
문태경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 사진을 어디서 났습니까?”
“책에서.”
“무슨 책?”
여자가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
문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책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니?”
“읽고 나니 사라졌어요.”
문태경은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최유진.”
문태경의 얼굴이 굳었다.
유진.
몇 달 전 《저녁을 파는 가게》를 사갔던 스무 살 여자도 유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예순이 넘었다.
“혹시 어머니를 찾던…….”
여자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문태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 나이?”
“예순셋.”
“말도 안 돼.”
“뭐가요?”
문태경이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2027년.
“당신이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 스무 살쯤이었습니다.”
여자가 웃었다.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옵니다.”
“아니.”
“정말입니다.”
“《저녁을 파는 가게》를 샀잖아요.”
최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그 제목…….”
“알아요?”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문태경이 멈췄다.
“어머니?”
“네.”
“누굽니까?”
최유진이 말했다.
“윤해주.”
문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한 시간 뒤.
박지은.
수연.
윤정.
서인호.
윤해주.
모두 헌책방에 모였다.
최유진은 다섯 사람을 바라보았다.
특히 윤해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주가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최유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해주가 뒤로 물러났다.
“저요?”
“네.”
“잠깐.”
해주가 서인호를 바라보았다.
“나 딸 있어요?”
인호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한 없습니다.”
최유진이 웃었다.
“아빠도 똑같네.”
이번에는 서인호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아버지라고요?”
“네.”
“몇 년도에서 왔습니까?”
최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2027년.”
“당신이 예순셋인데?”
“그게 왜요?”
문태경이 물었다.
“태어난 해가?”
“1964년.”
침묵.
윤해주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다.
최유진이 오히려 불안해졌다.
“왜 다들 그래요?”
박지은이 말했다.
“유진 씨.”
“네.”
“당신 어머니가 윤해주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평생 엄마였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물론이죠.”
“사진 있어요?”
최유진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사진.
어린 최유진.
옆에는 젊은 윤해주.
박지은의 손이 떨렸다.
다음 사진.
초등학교 입학식.
윤해주.
최유진.
그리고 서인호.
세 사람이 웃고 있었다.
인호가 말했다.
“나는 이런 사진을 찍은 적이 없습니다.”
최유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
“죄송하지만.”
“아빠 맞아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최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또 그러네.”
해주가 물었다.
“또?”
최유진은 한참 울었다.
“아빠는 내가 열아홉 살 때 집을 나갔어요.”
인호의 얼굴이 굳었다.
“왜?”
“기억이 없다고 했어요.”
“무슨 기억?”
“우리 가족.”
최유진이 말했다.
“엄마도 나도 전혀 모른다고.”
해주가 인호를 바라보았다.
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일을…….”
“알아요.”
최유진이 눈물을 닦았다.
“지금 아빠는 그때보다 훨씬 젊으니까.”
문태경이 말했다.
“시간이 섞였습니다.”
윤정이 물었다.
“어떻게?”
문태경은 최유진의 휴대전화를 보았다.
“서로 다른 삶이 같은 연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박지은이 말했다.
“평행세계?”
“아마 그보다 복잡합니다.”
수연이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네.”
모두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말했다.
“이번에는 시간여행 금지라고 약속했잖아.”
박지은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쓴 거 아니야.”
그 말에 모두 멈췄다.
박지은이 다시 말했다.
“정말.”
그리고 갑자기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안 썼어.”
하지만 문태경은 웃지 않았다.
“그게 문제입니다.”
“왜?”
“지금까지는 적어도 작가가 있었습니다.”
“…….”
“이번에는 없습니다.”
⸻
최유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1964년생.
대구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해주는 글을 썼다.
아버지 서인호는 출판사 편집자였다.
박지은이 물었다.
“잠깐. 편집자?”
“네.”
모두 문태경을 바라보았다.
문태경의 얼굴이 굳었다.
“출판사 이름은?”
최유진이 말했다.
“저녁출판사.”
문태경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가 일했던 출판사입니다.”
“태경 씨도요?”
“1998년에.”
최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저녁출판사는 1983년에 문 닫았습니다.”
문태경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최유진은 계속 말했다.
“아빠가 마지막 편집자였어요.”
서인호가 물었다.
“나는 언제부터 거기서 일했습니까?”
“1979년.”
인호가 웃었다.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최유진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내 세계에서는 태어났어요.”
“몇 년생?”
“1948년.”
이번에는 윤정의 얼굴이 변했다.
박서림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기억했던 해.
윤정이 물었다.
“당신 아버지 생일이 언제입니까?”
“11월 17일.”
문태경이 눈을 감았다.
또 11월 17일.
1998년 원고를 받은 날.
2049년 윤해주가 죽은 날.
그리고 서인호의 생일.
우연일 수 없었다.
“어머니는?”
“1951년 4월 3일.”
해주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전혀 다른 생일이었다.
최유진이 말했다.
“두 분은 저녁출판사에서 만났어요.”
“어떻게?”
“엄마가 원고를 들고 찾아갔대요.”
박지은이 물었다.
“무슨 원고?”
최유진은 대답했다.
“《저녁을 파는 가게》.”
모두 얼어붙었다.
“몇 년도?”
“1978년.”
문태경이 말했다.
“1998년보다 20년 전.”
“네.”
“그 책은 출간됐습니까?”
“아니요.”
“왜?”
최유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읽으면 이상한 일이 생겼대요.”
윤정이 물었다.
“어떤?”
“자기 이야기가 보였대요.”
침묵.
같았다.
바로 그 책이었다.
“그래서?”
“출판을 포기했어요.”
“원고는?”
“엄마가 평생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은?”
최유진이 말했다.
“내가 태웠습니다.”
윤정이 숨을 멈췄다.
“왜?”
“엄마가 죽고 나서.”
해주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언제 죽었는데요?”
최유진은 젊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1998년 11월 17일.”
문태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자신이 원고를 처음 받았다고 기억하는 바로 그날.
“어떻게?”
최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그날 저녁출판사 옛 건물에 갔어요.”
“왜?”
“원고를 없애려고.”
“그리고?”
“불이 났습니다.”
문태경이 눈을 감았다.
화재.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출판사는 불탔다.
하지만 1999년 1월 3일.
날짜만 달랐다.
“엄마는 못 나왔어요.”
최유진이 말했다.
해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죽음을 듣는 것은 이상했다.
슬프다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최유진이 계속 말했다.
“그 뒤 아빠가 사라졌어요.”
서인호.
“어디로?”
“몰라요.”
“죽었습니까?”
“아니요.”
“어떻게 알아요?”
“가끔 편지가 왔어요.”
“뭐라고?”
최유진이 가방에서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유진아, 나는 네 엄마가 죽지 않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
서인호의 손이 떨렸다.
“내 글씨…….”
분명 자신의 필체였다.
편지를 펼쳤다.
나는 아주 먼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는 해주가 아직 젊고, 너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엄마가 살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해주가 입을 막았다.
다음 문장.
하지만 한 가지가 두렵다. 내가 그곳에 오래 머물면 너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
최유진이 말했다.
“그리고 정말 잊었어요.”
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는 엄마를 살리려고.”
최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를 지웠어요.”
“아니.”
인호가 말했다.
“나는…….”
“알아요.”
최유진이 웃었다.
“당신은 아직 그 선택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이 더 아팠다.
아직 하지 않은 잘못.
그러나 어떤 세계에서는 이미 한 잘못.
해주가 최유진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최유진이 울면서 웃었다.
“엄마가 왜 미안해.”
“그래도.”
“엄마는 항상 그랬어.”
“뭘?”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어.”
해주는 웃었다.
“나답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하지 마.”
“뭘?”
“미안해하지 마.”
해주는 처음 보는 딸의 손을 잡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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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윤정이 편지를 들었다.
“여기.”
편지 맨 아래 아주 작은 글씨.
문태경을 찾아라.
문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나?”
다음.
그 사람은 내가 실패한 뒤에 도착할 것이다.
문태경의 얼굴이 굳었다.
“서인호가 나를 알고 있었어.”
인호가 말했다.
“아니.”
“다른 당신은.”
“그렇겠죠.”
문태경은 생각했다.
1978년.
1998년.
2049년.
세 개의 시간.
세 사람.
서인호.
문태경.
윤해주.
그리고 한 권의 책.
“잠깐.”
문태경이 말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박지은이 물었다.
“뭘?”
“2049년의 윤해주가 나를 만들었다고 했죠.”
“응.”
“그런데 최유진의 세계에서는 1998년에 윤해주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2049년까지 살아갈 수 없어요.”
윤정이 말했다.
“다른 세계니까.”
“맞습니다.”
문태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면 2049년의 윤해주는 원래 존재했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해주가 물었다.
“그럼?”
문태경은 서인호의 편지를 가리켰다.
“누군가 만든 미래.”
“누가?”
모두 서인호를 바라보았다.
인호가 웃었다.
“왜 나를 봅니까?”
문태경이 말했다.
“당신입니다.”
“나는 한 적 없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그럼?”
“유진 씨의 아버지.”
인호의 얼굴이 굳었다.
문태경은 설명했다.
“그 사람은 아내가 죽은 뒤 해주가 죽지 않는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
“그리고 다른 세계를 만들었거나 찾았습니다.”
“…….”
“그곳에서는 해주가 2049년까지 살았습니다.”
박지은이 말했다.
“대신 유진이 태어나지 않았고.”
최유진이 웃었다.
“그래서 아빠가 나를 잊었군요.”
인호의 얼굴이 무너졌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최유진이 말했다.
“그럼 하지 마요.”
“하지만 해주가 죽는다면?”
인호가 해주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은 무거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것을 막을 수 있다면?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을 지우는 대가로.
인호는 최유진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딸일 수도 있는 사람.
“안 하겠습니다.”
“확실해요?”
“네.”
“엄마가 죽어도?”
인호의 눈이 젖었다.
“그래도.”
해주가 그를 바라보았다.
인호가 말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없애는 건.”
잠시 숨을 골랐다.
“사는 게 아닙니다.”
최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말을.”
“…….”
“그때 아빠에게 듣고 싶었어요.”
인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사과할 일 아니에요.”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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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최유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문자.
발신자 없음.
화면에는 한 줄뿐이었다.
이제 선택이 달라졌습니다.
최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다음 문자.
따라서 당신의 과거도 달라집니다.
“안 돼.”
최유진이 말했다.
해주가 물었다.
“왜?”
“내 과거를 바꾸면.”
최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가 안 죽을 수도 있어.”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녀는 울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침묵.
또 같은 문제였다.
한 사람을 살리면 다른 사람이 사라진다.
그 지긋지긋한 공식.
박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어.”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박지은이 화가 난 듯 말했다.
“또 이거야?”
“지은 씨.”
“누가 이딴 규칙을 만들었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 사라져야 하고.”
“…….”
“과거를 고치면 현재가 없어지고.”
“…….”
“사랑하면 대가를 내고.”
박지은이 책상을 쳤다.
“지겨워.”
수연이 엄마를 바라보았다.
박지은은 말했다.
“우리는 18부 동안 그 규칙을 깨려고 했어.”
문태경이 조용히 말했다.
“18부?”
박지은이 멈췄다.
“내가 왜 18부라고 했지?”
모두 얼어붙었다.
박지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저녁을 파는 가게》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18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연이 말했다.
“엄마.”
“응?”
“기억난 거야?”
박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어떻게?”
그 순간.
헌책방 한쪽에서 소리가 났다.
툭.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문태경이 다가갔다.
책을 집었다.
표지는 비어 있었다.
저자도.
제목도.
첫 장을 펼쳤다.
한 문장.
19부 — 사라진 작가
문태경의 손이 떨렸다.
“이건…….”
다음 문장.
봄이 왔다.
그 아래.
별일 없이 왔다.
박지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이 조금 전부터 겪은 일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한 줄.
한 줄.
대화까지.
문태경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어디까지 있어?”
박지은이 물었다.
문태경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지금 이 순간.
문태경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 아래.
지금 이 순간.
모두 숨을 멈췄다.
다음 문장이 눈앞에서 생겨났다.
모두 숨을 멈췄다.
수연이 뒤로 물러났다.
“이거 싫어.”
또 한 줄.
수연이 뒤로 물러났다.
수연이 입을 막았다.
문태경이 책을 덮었다.
“읽지 마.”
박지은이 말했다.
“펴요.”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까지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펴.”
“왜?”
박지은이 책을 빼앗았다.
“확인할 게 있어.”
책을 펼쳤다.
글자가 나타났다.
박지은은 책을 빼앗았다.
그 아래.
확인할 것이 있었다.
박지은이 말했다.
“내가 다음에 뭘 할지 써봐.”
아무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 써?”
침묵.
“미리 써.”
아무것도.
박지은이 웃었다.
“역시.”
문태경이 물었다.
“뭐가?”
“이 책은 미래를 쓰는 게 아니야.”
“그럼?”
“일어난 일을 따라 쓰고 있어.”
윤정이 말했다.
“기록?”
“응.”
“누가?”
박지은은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걸 알아야 해.”
그때 페이지에 문장이 나타났다.
알고 싶습니까?
박지은이 말했다.
“그래.”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작가는 없습니다.
박지은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
당신들이 작가를 지웠습니다.
침묵.
“언제?”
18부 마지막에서.
박지은의 손이 떨렸다.
기억.
아주 희미하게.
어떤 책의 제목이 사라졌다.
《저녁을 파는 가게》.
새 제목.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들은 모든 것을 잊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놓아버렸을 때.”
네.
“작가도 사라졌어?”
네.
“누구였는데?”
오랫동안 아무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박지은이 다시 물었다.
“원래 작가가 누구였어?”
한 글자.
두 글자.
천천히 이름이 나타났다.
최유진.
모두 최유진을 바라보았다.
“나?”
유진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작가가 아니에요.”
책은 대답했다.
아직은.
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2049년 11월 17일.
최유진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빈 노트 한 권을 발견합니다.
다음.
첫 장에 제목을 씁니다.
《저녁을 파는 가게》
최유진이 울었다.
“내가?”
그리고 한 문장을 씁니다.
페이지에 아주 익숙한 문장이 나타났다.
해질녘이면 사람들은 지나간 것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박지은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시작된 문장.
그러나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
2049년의 최유진이 쓰게 될 문장.
“그럼 유진 씨가 최초의 작가?”
책은 즉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수연이 소리쳤다.
“또 아니야?”
이 상황에서도 문태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주도.
긴장 속에서 잠깐 웃음이 흘렀다.
그리고 책이 다음 문장을 썼다.
최유진은 그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유진이 물었다.
“어디서?”
어머니의 일기.
윤해주가 말했다.
“나는 아직 안 썼는데.”
맞습니다.
“그럼 언제?”
2027년 4월 3일.
모두 벽의 달력을 보았다.
오늘.
2027년 4월 3일.
해주의 얼굴이 굳었다.
“오늘?”
네.
“내가 오늘 그 문장을 쓴다고?”
선택한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정해진 미래가 아니었다.
선택.
해주는 펜을 들었다.
종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 쓰면?”
책이 대답했다.
이야기는 끝납니다.
박지은이 물었다.
“모두 사라져?”
아닙니다.
“그럼?”
그냥 살아갑니다.
모두 멈췄다.
해주가 물었다.
“내가 쓰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왜?”
당신의 딸이 언젠가 그 문장을 읽고 다시 쓰기 때문입니다.
해주는 최유진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딸.
존재해서는 안 되는 딸.
그러나 분명 눈앞에 있는 사람.
“그러면 이 사람은?”
살아갑니다.
“내가 안 써도?”
살아갑니다.
“인호 씨는?”
살아갑니다.
“지은 씨?”
살아갑니다.
“수연?”
살아갑니다.
“윤정?”
살아갑니다.
“문태경?”
살아갑니다.
해주가 웃었다.
“그럼 아무 문제 없네.”
책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네.
너무 간단했다.
18부 동안 찾아 헤맨 답이 그것이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를 지우지 않아도 됐다.
이야기가 끝난다고 삶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박지은이 해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해주는 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안 쓸래요.”
최유진의 눈이 커졌다.
“엄마.”
해주가 웃었다.
“왜?”
“그러면 나는 2049년에 그 소설을 못 써.”
“그래도 살아 있잖아.”
“응.”
“그럼 다른 거 써.”
최유진이 울면서 웃었다.
“뭘?”
“당신 이야기.”
그 말에 최유진은 한참 울었다.
해주가 그녀를 안았다.
처음 안아보는 딸.
자신보다 늙은 딸.
이상했다.
하지만 따뜻했다.
“엄마.”
“응.”
“이렇게 불러도 돼?”
해주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까지만.”
유진이 웃었다.
“왜 오늘까지만?”
“내일부터는 당신도 자기 삶 살아야지.”
“엄마답네.”
“당신이 아는 내가 그래?”
“응.”
둘은 오래 안고 있었다.
서인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물을 닦았다.
수연이 말했다.
“아빠도 가서 안아줘요.”
인호가 당황했다.
“내가 왜 아빠입니까?”
최유진이 울면서 웃었다.
“한 번만.”
인호가 천천히 다가갔다.
세 사람이 어색하게 안았다.
“이상하네.”
인호가 말했다.
유진이 대답했다.
“가족이 원래 좀 이상해요.”
해주가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든다.”
⸻
책에서 글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부터.
한 문장씩.
박지은이 바라보았다.
“없어지고 있어.”
문태경이 말했다.
“끝나는 겁니다.”
윤정이 물었다.
“무섭습니까?”
문태경은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지막 페이지.
19부 — 사라진 작가
그 제목도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백지.
완전한 백지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잠시 뒤 수연이 말했다.
“끝난 거야?”
박지은이 웃었다.
“그런 것 같네.”
“진짜?”
“아마.”
“또 20부 나오면?”
모두 웃었다.
박지은도 크게 웃었다.
“그때는 내가 화낼 거야.”
책을 덮었다.
빈 표지.
문태경이 물었다.
“이 책은 어떻게 합니까?”
박지은이 말했다.
“버리지 말아요.”
“왜?”
“백지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쓰면 되지.”
문태경이 웃었다.
“이번에는 뭘?”
박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정할 일이 아니었다.
⸻
최유진은 그날 저녁 돌아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시간의 문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지하철을 타고 갔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모두 웃었다.
해주가 물었다.
“집 있어요?”
“있어요.”
“밥은?”
“해 먹어요.”
“혼자?”
“네.”
해주는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이거 가져가.”
최유진이 웃었다.
“엄마.”
“왜?”
“예순셋한테 용돈 줘?”
“딸이라며.”
유진은 결국 돈을 받았다.
오만 원.
“뭐 사 먹어.”
“알았어.”
“김치도.”
“엄마는 김치 좋아했어.”
윤정이 옆에서 말했다.
“김치는 좋은 음식입니다.”
모두 웃었다.
최유진은 지하철 계단 앞에서 돌아섰다.
“엄마.”
해주가 손을 들었다.
“응.”
“잘 살아.”
해주가 웃었다.
“너도.”
이번에는 누구도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았다.
어떤 만남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유진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
그날 밤.
최유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윤해주가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여자.
유진은 한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사진 뒷면.
엄마와 유진, 1972년 봄.
그녀는 웃었다.
“그래.”
자신에게는 또 다른 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삶.
그것도 자신의 삶이었다.
윤해주를 잊지는 않았다.
오늘 하루 엄마라고 불렀던 사람.
그 기억도 자기 것이었다.
둘 다 가져도 됐다.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최유진은 책상에 앉았다.
빈 종이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제목을 썼다.
《두 명의 어머니》
첫 문장.
내게는 어머니가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나를 낳았고, 한 사람은 나를 기억해주었다.
유진은 잠시 바라보다 웃었다.
“괜찮네.”
두 번째 문장을 썼다.
이번에는 저녁상점이 없었다.
시간여행도.
사라지는 사람도.
그냥 두 어머니를 사랑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
같은 밤.
박지은도 책상에 앉았다.
수연이 방문을 열었다.
“엄마.”
“응?”
“또 써?”
“응.”
“이번에는 진짜 다른 장르?”
박지은이 웃었다.
“완전히.”
“뭔데?”
“범죄소설.”
수연의 눈이 커졌다.
“엄마가?”
“왜?”
“사람 죽어?”
박지은이 잠시 생각했다.
“첫 장에서.”
“엄마!”
둘은 웃었다.
수연이 문을 닫으려다가 말했다.
“시간여행은?”
“없어.”
“평행세계?”
“없어.”
“기억 삭제?”
“없어.”
“저녁?”
박지은이 웃었다.
“밥 먹는 저녁만.”
“좋아.”
문이 닫혔다.
박지은은 빈 화면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이야기.
완전히 다른 세계.
이번에는 누가 진짜인지 묻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한 사람이 죽는다.
밀실.
여섯 명의 용의자.
사라진 유언장.
그리고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성립하는 살인.
박지은은 첫 문장을 썼다.
장례식에 참석한 여섯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을 사랑했다.
잠시 생각했다.
두 번째.
그래서 경찰은 그들 가운데 살인범이 있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박지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맛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녁상점도.
윤해주도.
시간도.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두었다.
이제 새로운 문을 열 차례였다.
그 문 너머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다.
미스터리.
그리고 아직 아무도 모르는 범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 19부 끝 —
